[김남희의 그림 에세이] 신윤복의 ‘미인도’

  • 김수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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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8-07-13   |  발행일 2018-07-13 제39면   |  수정 2018-10-01
시대의 뒷골목 신명나게 그린 풍속화의 거장…21세기에도 빛나는 미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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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윤복, 미인도, 비단에 채색, 114.0X45.5㎝, 간송미술관 소장

팔공산을 바라보는 여인이 있다.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미인이다. 옥색치마에 흰색 저고리를 입은 여인은 단아하다. 비 갠 아침, 그녀 옆에서 안개 자욱한 팔공산을 바라본다. 행복하다. 시공을 초월한 만남에 자연의 기운마저 신령스럽다. 물기 젖은 소나무에 새소리가 요란하다.

예술가에게는 닮고 싶은 모델이나 아끼는 작품 하나쯤은 있다. 보물을 숨겨놓듯이 화가도 좋은 작품은 가슴 깊이 감춰둔다. 나에게도 ‘히든카드’가 있다. 바로 혜원(蕙園) 신윤복(申潤福, 1758~?)의 ‘미인도’다. 미인도를 볼 수 있을까 싶어 몇 차례나 서울 간송미술관의 정기 전시회에 갔지만 그 작품은 볼 수 없었다. 도판으로 본 ‘미인도’는 은은하게 미소를 띤 채 수줍은 자태로 서 있는 여인의 초상이다.

아침부터 서둘렀다. 대구미술관에 도착하니 미술관 건물 기둥 한 면을 가득 채운 대형 포스터 속의 그녀가 나를 반긴다. 간송미술관의 소장품이 대구로 나들이 온 차에, ‘미인도’도 동행했다.

신윤복은 화원으로 만호(萬戶)를 지낸 고령신씨(高靈 申氏) 신한평의 2남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조선시대 후기 풍속화의 대가로 통하지만 행적에 관한 기록이 적어 작품으로 그를 유추할 수밖에 없다. 자는 덕여(德如), 입부(笠父), 시중(時中)이고, 호는 혜원이다. 신가권(申可權)이라는 이름도 썼다. ‘혜원’은 ‘난초가 아름답게 핀 정원’이라는 뜻이고, ‘입부’는 ‘떠도는 인생’을 의미한다. 이를 참조하면, 그는 서정적이며 자유분방한 성격의 소유자로 보인다.

이익의 손자 이구환(1731~84)의 ‘청구화사’에는 혜원의 20대 시절이 기록되어 있다. “혜원은 동가숙 서가식 하였으며, 방외인(국외자) 같았고, 여항인과 가까이 지냈다.” 이로써 혜원의 자유분방한 삶의 여정을 짐작해볼 수 있다. 그의 일탈 행위는 미천한 ‘기생’을 그림의 소재로 삼았기에 수긍이 가고도 남는다. 그의 떠돌이 인생은 유흥문화와 깊은 연관이 있어 보인다. 누구도 주목하지 않던 양반과 기생이 어울려 유흥을 즐기는 광경을 빼어난 감각과 솜씨로 포착하여 큰 즐거움을 주었다. 또한 자신이 체험한 부조리한 사회의 단면을 사실적이며 해학적으로 승화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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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레는 마음을 가다듬으며 미술관으로 들어갔다. 입구에 있는 작품부터 찬찬히 보면서 돌아서는데, 갑자기 빛이 났다. 가장 중앙에 오롯이 조명을 받으며 ‘미인도’가 걸려 있었다. 함초롬히 서 있는 여인과 마주한다. 가슴이 뛰었다. 한참을 뚫어져라 눈빛을 교환했다.

신윤복이 남긴 ‘혜원전신첩’ 30폭에는 인물이 주로 작게 묘사되어 있다. 인물의 디테일에 갈증을 느끼곤 했는데, 그것을 ‘미인도’가 한방에 해갈해준다. ‘미인도’는 단독 인물상으로, 신윤복의 예술적 기량을 유감없이 확인할 수 있는 작품이다. 빈 배경에 한 여인만 다소곳이 서 있다. 왼쪽 상단의 화제(畵題)에는 “화가의 가슴속에 만 가지 봄기운 일어나니, 붓끝은 능히 만물의 초상화를 그려내준다”라고 적혀 있다. 신윤복이 여인을 통해 봄기운을 빌려 애틋한 연정을 토로한 것이 아닐까 싶다. ‘혜원’이라는 관서 밑에 ‘신가권인’이라는 인장과 ‘시중’이라는 인장이 그녀의 입술 자국처럼 붉다.

여인의 머리에 올린 가채는 그녀가 사대부가 아닌 기생의 신분임을 알려준다. 한 손에는 옅은 보라색 수마노 노리개를 살짝 받쳐 들고, 다른 손으로는 진한 자주색 옷고름을 풀기 직전이다. 계란형의 얼굴에 초승달 같은 눈썹, 선량한 눈빛은 살포시 화제 쪽을 향한다. 오뚝한 코와 연분홍의 작은 입술이 꽃잎처럼 단아하다. 가는 목선에 꼭 맞는 저고리가 가냘픈 몸매를 강조한다. 풍성한 옥색 치마 사이로 한쪽 버선이 살짝 코를 드러내고 있다. 남성의 애간장을 녹일 포즈다.

늘씬한 옥색의 12폭 치마는 모양이 지루하지 않게 세밀한 선으로 변화를 주었다. 몸에 착 달라붙는 짧은 흰색 저고리는 맵시가 난다. 왼쪽 겨드랑이 근처에서 흘러내린 두 가닥 주홍색 허리띠 끈과 자주색 옷고름이 한복의 아름다움을 강조한다. 저고리 깃과 겨드랑이는 옷고름과 같은 짙은 자주색으로 회장을 대고, 끝동은 치마와 같은 옥색으로 회장을 대어 삼회장(三回裝)으로 멋을 부린 그녀는 당대 최고의 미인으로 등극한다.

파리 루브르박물관에 ‘모나리자’가 있다면, 간송미술관에는 ‘미인도’가 있다. 30대 초반에 파리에서 ‘모나리자’를 봤지만 ‘미인도’는 50대 중반이 되어 비로소 봤다. 그래서 감동이 더 클 수밖에 없다. 진품은 화가의 체취를 고스란히 느낄 수 있기에, 화질 좋은 도판 수백 번 보는 것보다 더 가슴 뛰게 한다.

신윤복은 기생을 주제로 한 파격적인 그림으로, 조선 후기 회화의 ‘슈퍼스타’ 반열에 올랐다. 어느 누구도 관심을 두지 않던 시대의 뒷골목을 신명나게 그린 우리 풍속화의 거장이다. 지금 대구미술관에는 그가 혼신을 다한 걸작 ‘미인도’가 미소를 짓고 있다. 난향(蘭香)처럼 번지는 여인의 미소 탓인가, 멀리 보이는 팔공산의 풍모가 유달리 의젓하고 당당하다.

화가 2572kim@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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