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중심에 선 구미人 .1] 대를 이어 과거에 급제한 이심지와 다섯 아들

  • 박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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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8-07-20   |  발행일 2018-07-20 제11면   |  수정 2018-09-18
형곡에 터 잡은 명민한 사내…그곳에서 ‘생육신’ 될 아들을 낳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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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미시 형곡동 구미시립중앙도서관내 공원에 위치한 경은선생유허비각(耕隱先生遺墟碑閣). 생육신 경은 이맹전의 뜻을 기리기 위해 1778년 세운 것으로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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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육신 이맹전을 배향하고 있는 구미시 도개면 월림리 월암서원. 1630년에 창건한 서원으로 1868년에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없어졌다가 2010년 복원했다. 이맹전 외에도 명종 때의 문신 농암 김주, 사육신 하위지를 배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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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암서원에는 김주, 하위지, 이맹전의 위패를 묻은 매판소(埋版所) 비가 서있다.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월암서원이 훼철되자 세분의 위패를 묻은 곳이다.

☞ 시리즈를 시작하며
‘인재향(人材鄕)’. 예부터 구미를 일컫는 말이다. 학문을 숭상하는 유학적 기풍이 뿌리 깊게 내린 구미는 수많은 인재를 배출한 인재의 고장으로 유명하다. 이는 구미의 자부심이자 정체성이기도 하다. 실제 고려말 충신 야은 길재를 비롯해 영남 사림의 영수 김종직, 사육신 하위지, 생육신 이맹전 등이 구미에 뿌리를 두고 있다. 장원방(壯元坊)이라 불리는 선산의 작은 마을 옛 영봉리에서는 15명의 과거급제자를 배출하기도 했다. 무엇보다 구미 출신의 인재들은 역사의 중심에 서서 나라가 나아갈 방향을 제시했다.

영남일보는 오늘부터 ‘역사의 중심에 선 구미人’ 시리즈를 연재한다. 그동안 크게 조명되지 않았던 구미의 대표적인 인재들을 중심으로, 그들이 추구한 삶과 지향한 가치를 엿본다. 시리즈 1편은 생육신 이맹전을 배출하고 대를 이어 과거에 급제한 이심지 집안의 이야기를 다룬다.

태종조 문과에 등제한 이심지
판예빈시사 등 주요 관직 맡아
사후에 공 인정 병조판서 추증

단종 폐위로 은거 맏형 이맹전
생육신 한사람으로 존경 받아

세조 밑에서 벼슬 사남 이계전
말년엔 단종 묘 보살피며 참회


#1. 바를 정(正)의 사내 이심지, 구미에 정착

하늘과 땅 사이가 온통 어수선하던 고려 말의 어느 날이었다. 눈빛이 형형한 두 사내가 형곡(荊谷) 현재의 구미시 형곡1동)에 조용히 깃들었다. 한눈에도 닮은 두 사람은 짐작대로 부자지간이었다. 아버지는 판도판서(版圖判書) 여위현(呂渭賢)이고, 아들은 공부전서(工部典書) 여극회(呂克誨)였다. 본디 성산(星山, 성주)에서 살았으나 명당을 찾아 이리저리 수소문한 끝에 정착한 곳이 바로 구미 형곡이었다.

처음부터 형곡 사람이었던 듯 자연스럽게 머물러 산 지 얼마 후, 아들 여극회가 사위를 들이게 되었다. 벽진(碧珍)을 본관으로 둔 경상병마도원수(兵馬都元帥) 이희경(李希慶)의 아들 이심지(李審之)였다. 이심지는 지밀직사(知密直司) 이견간(李堅幹)의 증손이자, 이군상(李君常)의 손자이기도 했다.

혼인을 기점으로 이심지의 형곡 살이가 시작됐다. 당시는 남귀여가(男歸女家)의 시절이어서, 이심지가 형곡에 눌러앉은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남귀여가란 신랑이 신부의 집에서 혼례를 치르고 그대로 살다가, 자녀가 성장한 다음에야 자신의 본가로 돌아가는 것을 말한다.

명민한 데다 성정 또한 나무랄 데가 없던 이심지는 장인 여극회로부터 신임을 받았다. 당시 조선의 신하가 되어 문장으로 이름을 떨치고 있던 여극회의 안목에 이심지는 여러모로 맞춤형 인재였다. 실제로 이심지는 태종조에 문과에 등제했고, 판예빈시사(判禮賓寺事) 등 주요 관직을 두루두루 거쳤다. 그러던 중 장인 여극회로부터 형곡의 집을 물려받기도 하였다. 그리고 사후에는 나라로부터 그 공을 인정받아 병조판서에 추증됐다.

#2. 걸출한 인재, 다섯 아들의 행로

이심지에게는 아들이 여럿이었다. 위로부터 이맹전(李孟專), 이중전(李仲專), 이숙전(李叔專), 이계전(李季專), 이말전(李末專) 등 무려 다섯이나 됐다. 모두 걸출했으며, 다섯 아들 중 맹전, 숙전, 계전, 말전 네 아들이 대를 이어 과거에 급제했다. 특히 장남 이맹전이 가문에 미친 영향력은 지대했다. 무엇보다 단종을 향한 절의를 지킨 생육신(生六臣)의 한 사람으로 존경을 받았다.

이맹전은 1427년(세종 9) 3월14일에 치러진 정미9년친시방(丁未九年親試榜)을 통해 관직의 길에 올랐다. 임금이 친히 주관한다 해서 친시(親試)였다. 명나라 선종의 황제등극을 축하하고 중시(重試, 승진시험)에 대응하기 위해 계획된 그날의 시험은 창덕궁 인정전(仁政殿)에서 실시됐다. 우의정 맹사성을 비롯해 원로 학자들이 시험관으로 지켜보는 가운데, 이맹전은 자신의 뜻을 가감 없이 펼쳤다. 결과는 을과2등(乙科二等) 5위였다. 이후 이맹전은 사간원좌정언(司諫院左正言), 지제교(知製敎), 소격서령(昭格署令) 등을 거쳐 거창현감으로 나가 선정을 베풀었다. 고을 사람들의 칭송이 높았고, 청백리 호칭을 받기도 하였다.

차남 이중전은 실력이 뛰어났음에도 불구하고 운이 미치지 못하여 대과에는 합격하지 못했다. 하지만 생원과 진사를 선발하는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여 현감을 지냈다. 삼남 이숙전은 세종조에 문과에 합격해 관직에 나아갔다. 상호군(上護軍)을 거쳐 예빈시정(禮賓寺正)을 지냈으며, 사후에 병조판서가 추증됐다.

사남 이계전은 어려서부터 영민하고 문장이 뛰어나 주변에서 거는 기대가 컸다. 그는 1447년(세종 29) 4월3일에 열린 식년시(式年試) 정묘29년방(丁卯二十九年榜)에서 병과(丙科) 3위로 등과해 그 뜻에 부응했다. 이후 중서시랑(中書侍郞)으로 시작해 내외요직을 두루 거치다가 이조참판에 이르렀으나 신병으로 물러났다. 막내 이말전은 세종조에 무과(武科)에 등제하여 현감과 예빈시정을 지냈다. 후에 자헌대부 병조판서가 추증됐다.

눈에 띄는 점은 아버지 이심지가 예빈시(禮賓寺)를 맡은 것과 병조판서에 추증된 이력을 셋째 아들 이숙전과 막내아들 이말전이 그대로 따랐다는 사실이다.

#3. 생육신 이맹전, 임금에 대한 사랑이 깊고 깊어

선산 망장촌(網障村, 현재의 구미시 고아읍 오로리)에 은둔 중인 이맹전에 대해 이상한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청맹과니에 귀까지 멀었다는 내용이었다. 누구는 이게 웬일인가 흉흉해 했지만, 또 다른 누구는 그 속내를 짐작하겠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세상 돌아가는 꼴이 보기도 싫고 듣기도 싫은 것이리. 장인과 사위가 하나로 충신이니 마을에 거룩함이 깃드는 것 같으이.”

장인은 김성미(金成美)를 일렀다. 김성미는 단종이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넘겨주고 강원도 영월로 쫓겨 갈 때 미련 없이 벼슬을 버리고 내려와 은거 중이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사위 이맹전이 따라와선 함께 폐인연하며 지내고 있었다.

실제로 이맹전은 89세로 세상을 뜨기까지 무려 30여 년 동안 문을 닫고 틀어박혀 찾아오는 사람을 모두 거절했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잊지 않고 꼬박꼬박 챙기는 것이 있었다. 매일 일정한 시각에 의관을 정제하고 단종의 유배지인 영월 쪽으로 예를 올리는 일이었다. 심지어 한양이 있는 북쪽으로는 앉기는커녕 고개조차도 돌리지 않았다. 이맹전의 호가 농사나 지으며 숨어 지낸다는 뜻의 경은(耕隱)이 된 것도 바로 그 내력이었다.

본디 정결한 성품인 데다 마음의 한이 하도 큰 탓에 극한의 청빈한 삶을 이어가기도 했다. 이맹전을 가까이서 모시던 제자가 진심으로 근심했을 정도였다.

“청빈을 넘어 곤궁하고 궁핍하십니다. 집안에 양식거리라고는 없으니 염려가 됩니다. 후일, 자손에게 남겨줄 거라고는 다 낡은 집 하나가 고작이겠습니다.”

그러자 이맹전이 부드럽게 웃으며 답했다.

“물려줄 가업 중에 가난만 한 것이 있던가. 걱정할 거 없다.”

그런 이맹전을 후세 사람들이 일러 ‘생육신’이라 칭하고 서원과 유허비를 세워 그의 뜻을 기렸다. 선산의 월암서원(月巖書院), 함양의 서산서원(西山書院), 영천의 용계서원(龍溪書院), 그리고 구미 형곡동 댓샘 옆의 경은선생유허비각(耕隱先生遺墟碑閣)이 그것이다. 유허비각은 현재 구미시립중앙도서관으로 이전됐다.

#4. 형의 뜻을 좇아 슬픈 임금에게로

이계전은 뒤늦은 깨달음에 속이 쓰렸다. 맏형 이맹전이 선산에 내려가 두문불출한다는 소리를 들었을 때만 해도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청맹과니가 되어 폐인으로 산다는 소리를 들었을 때도 마음은 아팠으나 역시 크게 신경 쓰지 못했다. 하지만 병으로 관직에서 물러난 상태에서 시간을 가지고 하나하나 되짚어 보니 이제야 확실히 알 수 있었다. 형의 행동이 단종에 대한 충정에서 비롯된 몸부림이었다는 것을 말이다.

“어찌하리. 나는 세조(수양대군) 아래서 내내 벼슬살이를 했거늘.”

굵직굵직한 것만 읊어도 승정원좌부승지(承政院左副承旨), 가선대부(嘉善大夫), 공조참판(工曹參判), 형조참판(刑曹參判), 개성부유수(開城府留守), 경기관찰사(京畿觀察使) 등 대단한 관직들이었다. 세조가 죽고 예종이 즉위했을 때는 그간의 공을 인정받아 이조참판(吏曹參判)에 오르기까지 했다. 실로 영화로운 삶이라 할 수 있었다.

“나로서는 나라를 위한다고 한 일이나 안타까운 맘이 드는 건 어쩔 수 없구나. 이를 어찌 뉘우치리.”

이계전은 한참 늦었지만 이제라도 형 이맹전의 뜻을 나누기로 결심했다. 세조조에 벼슬한 자신을 뉘우치고 화천(華川)으로 향했다. 그리고 그곳에 은거하며 영월에 있는 단종의 무덤을 보살피기 시작했다. 그 일은 이계전이 71세로 세상을 뜰 때까지 멈추지 않고 계속됐다.

글=김진규<소설가·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연구위원>

사진=박관영기자 zone5@yeongnam.com

▨ 참고문헌=성리학의 본향 구미의 역사와 인물, 디지털구미문화대전, 조선왕조실록, 국조문과방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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