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남희의 그림 에세이] 김홍도 ‘취중송사’(醉中訟事)

  • 뉴미디어부
  • |
  • 입력 2019-01-18   |  발행일 2019-01-18 제39면   |  수정 2019-03-20
카메오로 출연한 돼지, 기해년 벽두에 활력 불어넣다
20190118
김홍도, ‘취중송사’(부분), 1778년, 비단에 담채, 90.9X42.7㎝,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20190118

현실보다는 꿈에서 만나길 바란다. 평생 못 만날 수도 있지만 오물을 뒤집어쓰고 나타나면 더 좋다. 재물의 상징인 돼지꿈 말이다. 꿈에서는 환대의 대상이지만 현실에서는 ‘비호감 1순위’가 돼지이기도 하다.

야생의 멧돼지가 인간과 동고동락하면서 온순하게 길들여졌다고 한다. 성실하고 영리해서 인간을 잘 따른다. 옛날부터 귀한 존재였다. 고구려 고분벽화에도 등장하는 유서 깊은 동물이다.

그럼에도 그림의 주인공으로는 환영받지 못했다. 민화의 12지신도나 동물을 그린 민화의 백수도 병풍, 수렵도 병풍, 기산 김준근의 풍속도 등에 간간이 나타난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단원(檀園) 김홍도(金弘道, 1745~1806?)가 그린 병풍에 돼지가 등장한다는 사실이다. 8폭 병풍 ‘행려풍속도’ 중 제2폭 ‘취중송사(醉中訟事)’에는 세 마리의 돼지가 나온다. 이 그림은 원경에 돼지가 마을을 활보하고 있는 희귀한 작품이다.

올해는 기해년(己亥年) 황금 돼지의 해다. 돼지는 12지(十二支) 중 열두 번째인 동물로 신성하고 복을 상징한다. 하늘에 제사를 거행할 때 바치는 제수(祭需)로 쓰였다. 길상(吉祥)의 주인공인 돼지는 상인들에게 더 인기가 있다. 굿이나 고사를 지낼 때 한 자리를 차지한다. 신화나 설화에 등장하지만 현실에서는 기대 이하의 대접을 받는다. 지저분하거나 게으르면 돼지에 비유하는 식이다. 돼지는 인간에게 모든 것을 바치고 생을 마감하는 존재다.

김홍도는 조선시대 후기를 대표하는 화가로, ‘그림신선(畵仙)’이라 불렸다. 정조(1752~1800)의 사랑을 독차지할 만큼 그림 재주는 탁월했다. 우리에게 풍속화로 더 잘 알려져 있지만 신선도로 데뷔했다. 산수화, 화조화, 고사인물화, 초상화는 물론 불화, 삽화 등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종류의 그림을 그렸다. 특히 그의 풍속화는 서민의 시선으로 서민의 정서를 담은 것이 특징이다.

단원은 진경시대를 연 표암(豹菴) 강세황(姜世晃, 1713~1791)에게 그림을 배웠다. 강세황은 단원을 두고 ‘무소불능의 신필’ ‘근대의 명수’라며,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제자의 작품에 화제를 써주며 사제 간의 화의를 돈독하게 다졌다.

‘취중송사’는 김홍도가 1778년 34세에 그린 작품이다. 이 작품은 길에서 시비를 가리는 ‘거리의 판결’ 장면을 담고 있다. 마침 고을 원님이 거나하게 술을 걸치고 가마를 타고 가는 중이다. 그런데 조용하던 거리가 소란스럽다. 갑자기 나타난 두 사람이 길바닥에 무릎을 꿇고 있다. 억울한 일이 있는 모양이다.

자초지종을 들은 원님이 생각에 잠겼다. 화면 아래 오른쪽에는 두 사람의 관리가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다. 형리는 엎드려 이야기를 받아 적느라 정신이 없다. 원님은 낮술을 했지만 바른 판결을 내리기 위해 정신을 가다듬는다. 옆에는 기녀가 긴 담뱃대를 들고 구경 중이다.

긴장된 순간이다. 모두들 원님의 판결에 집중한다. 이상하다. 심각한 상황인데도 묘하게 웃음이 번진다. 원경에 배치된 돼지 때문이다. 그림의 내용으로 봐서 돼지는 없어도 된다. 돼지가 없으면 감상자는 오히려 재판에 집중할 수 있다. 그런데 돼지를 출연시켰다. 왜 그랬을까.

김홍도의 다른 작품 ‘씨름도’에 그 답이 있다. 한창 씨름 중인 선수들을 향해 관중의 시선이 화살처럼 꽂혀 있는 가운데 엿장수 소년은 씨름에는 관심 없다는 듯이 관중을 보고 있다. 순간 팽팽한 긴장감이 해소되면서 여유가 생긴다. 돼지도 엿장수 소년과 마찬가지 역할을 한다. 두 사람이 억울함을 호소하고 그것에 관해 판결을 내리려는 순간, 감상자는 돼지를 발견하고 이 묘한 상황에 돌연 웃음을 머금게 된다. 그림이 깊어지고, 감상이 쫄깃해진다.

구도는 대각선으로 잡았다. 앞쪽에 꿇어앉은 두 사람이 있고, 대각선의 중앙에 원님 일행이, 그리고 뒤쪽에 돼지가 있다. 원님을 중심으로 두 사람과 돼지가 앞뒤에 배치된 격이다. 이 그림에 행운을 선사하는 것은 돼지다. 드라마로 치면 없어서는 안 될 배역이다. 감상자의 시선을 훔쳐서 잔잔한 미소를 선사하는 개그맨 같다. 김홍도는 이처럼 의외의 소재로 번뜩이는 해학성을 발휘했다.

화면 위쪽에는 강세황이 화제를 썼다. “시골 사람이 나서서 진정을 올리고 형리가 판결문을 쓰는데 술 취한 가운데 부르고 쓰느라 오판이나 없을는지.”

새해 들어 화초에 물을 주다가 저절로 탄성이 터졌다. 붉은 선인장 꽃이 겨울을 밝히더니 난에서 꽃대가 얼굴을 내밀었다. 몇 년간 꽃을 피우지 않던 난초였다. 정신이 환해졌다.

김홍도의 ‘취중송사’에 행운의 돼지가 있다면, 우리 집에는 행운의 난초가 있다. 돼지해를 맞아 마음의 매무새를 가다듬는다.

화가 2572kim@naver.com

영남일보(www.yeongnam.com),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위클리포유인기뉴스

영남일보TV





영남일보TV

더보기




많이 본 뉴스

  • 최신
  • 주간
  •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