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람] 김상용 화가

  • 김수영 이지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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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9-06-14   |  발행일 2019-06-14 제41면   |  수정 2019-06-14
“몸 불편해 맘껏 뛰놀지 못한 기억
해질 무렵 바다에서 느낀 생명력
푸른빛 어둠속 희망·에너지 담아”
20190614
푸른빛의 어둠으로 그만의 화풍을 만들고 있는 김상용 화가. 그의 뒤로 최근 작업 중인 작품이 보인다.

김상용 화가의 바닷가 풍경을 그린 작품들을 보면 문득 모네의 ‘인상- 해돋이’란 작품이 떠오른다. 해가 막 떠오르는 풍경을 담은 이 작품은 모네가 고향집에서 내려다본 항구를 보고 느낀 즉흥적인 인상을 그린 작품으로 그 표현기법은 단순하다. 하지만 사물의 뚜렷한 형상을 구체적으로 담아내기보다는 색채를 통해 자신이 바라본 풍경의 느낌을 전하고 있는데 이 작품은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시도였다. 그래서 인상주의와 인상파라는 이름을 만들어낸 작품으로 평가하는 이들이 많다.

김상용의 어둠이 가득한 바닷가 풍경을 보면서 모네의 이 작품을 떠올린 이유는 아마 그가 어둠을 표현하는 그 강렬한 색감 때문인 듯하다. 바닷가의 이런저런 삶의 풍경이 그의 화폭에 담겨 있으나 늘 기자의 시선은 그 어둠에 먼저 닿았다. 푸른빛이 감도는 그 어두움에서 왠지 모를 애잔함이 느껴졌다. 아마 그의 치열했던 삶을 조금이나마 알았기 때문이 아닐까.

20190614
‘강구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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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e 2016’

▶어떻게 그림을 시작하게 되었는지요.

“초등학교 때 담임선생님이 포스터대회에 나가보라고 추천했는데 거기서 상을 받은 것이 화가로서의 인생을 결정한 것 같습니다. 중학교 때까지 그림을 열심히 그리다가 고등학교 때는 미술이 아닌 공부를 하려고 했으나 결국 미술대학쪽으로 마음이 기울게 되었지요. 그림을 그릴 때가 그 어느 때보다 행복했으니까요. 몸이 불편한 것이 오히려 그림을 그리는 데 도움을 주었지요. 화가가 될 운명이었나 봅니다.”

▶몸이 불편해 어릴 적에 멀리 가지 못하고 집 부근에서 맴돌던 것이 작업하는데 영향을 미쳤다고 하셨는데요. 그때 본 풍경이 바닷가 풍경의 모태가 되었다는 의미인지요.

“생후 6개월쯤 소아마비가 와서 어린 시절에 다른 아이들처럼 마음껏 뛰어놀지를 못했습니다. 부산 영도가 고향인데 대문 밖만 나서면 바닷가 풍경이 한눈에 들어왔지요. 집 부근에 조선소가 있어서 바다와 함께 늘 배를 봤습니다. 이런 것들이 현재의 바닷가 풍경을 그리는 데 큰 영향을 준 것 같습니다.”

▶특히 배를 좋아한다고 하셨습니다. 그 이유가 있는지요.

“늘 배를 보다보니 배를 많이 연구하게 되었습니다. 배는 사람과 비슷합니다. 아주 섬세해서 조금이라도 균형이 맞지 않으면 완성이 되지를 않지요. 배는 환경에 따라서 모양도 다릅니다. 바다가 얕고 갯벌이 있는 서해는 배가 납작합니다. 수심이 깊은 동해는 배가 날씬하지요. 제가 태어난 영도는 그 중간쯤이라 그렇게 납작하지도, 그렇게 날씬하지도 않습니다. 중용의 멋을 지닌다고나 할까요. 상당히 매력적인 형상입니다. 그런 배의 모습이 저의 감성을 더욱 자극했는지 모르겠습니다.”


생후 6개월 무렵에 찾아온 소아마비
고향 부산 대문 밖엔 영도 바다 풍경
항상 바라보던 배, 감성 자극했을지도

늘 지지해주는 어머니·중학교 은사님
학창시절 밝게 지낼수 있었던 원동력
긍정적 삶의 시선‘밝은 푸른빛 어둠’
수채화 표현 끊임없는 연구·차별화
20번 이상 덧칠, 깊은 무게감 다가와

살아있는 느낌 주는 현장스케치 선호
노동자 표정, 거친 손 담는 작업 구상
녹록지 않은 전업작가, 아내 지지덕분



▶바다와 배라는 내용은 물론 푸른빛의 색감도 상당히 인상적입니다.

“바다풍경 중에 어둠이 내려앉은 풍경을 특히 좋아합니다. 해뜰 무렵이나 해질 무렵의 풍경이지요. 그 시간은 어둠으로 인해 무언가 생기기도 하고 사라지기도 하는 변화의 시간입니다. 정체되어 있지 않은, 살아있는 생명력을 느끼게 하는 시간이라 할 수 있지요. 변화와 함께 하는 어둠은 일반인들이 가지는 부정적 의미의 어둠과는 또 다른 무언가가 있습니다. 그것을 담아내고 싶었는데 그 어두움을 푸른빛으로 처리했습니다. 저는 푸른빛에서 긍정, 희망, 미래 등의 이미지를 느낍니다. 예전에는 어둠을 검은빛이 도는 푸른색으로 표현했지만 점점 밝은빛의 푸른색으로 변하고 있습니다. 나이가 들수록 삶을 바라보는 저의 시선이 긍정적이고 밝아진 때문이기도 하겠지요.”

▶늘 웃는 모습에서 주위를 환하게 하는 에너지가 느껴집니다.

“흔히 몸이 불편하면 심리적으로 많이 위축될 것이라 생각하는데 저는 청소년기에도 소아마비로 인한 콤플렉스가 거의 없었습니다. 어머니와 중학교 때 은사님이 큰 도움을 주었습니다. 어머니는 늘 제가 하는 일에 지지를 해주었습니다. 그림을 그리고 싶다고 할 때도 전폭적으로 밀어주셨습니다. 그래서 늘 자신감이 넘쳤고 젊은 시절 그 자신감이 저를 약간 오만해지도록 만들기도 했지요. 하지만 지금은 그것을 젊은 시절의 치기라 생각할 정도로 심적 여유를 가지고 있습니다. 중학교 때 은사님도 제가 위축되지 않고 제 길을 가도록 용기를 주신 분이었습니다. 몸이 불편해 집과 학교 안에서만 생활하던 저를 밖으로 이끌어내주신 분이었습니다. 소풍 등 야외활동을 할 때 저를 제일 앞에 세워서 가도록 했지요. 은사님의 여동생이 소아마비였기 때문에 저에게 더욱 애정을 쏟아주셨는데 그것이 큰 힘이 되었습니다.”

▶오랫동안 수채화를 고집해오고 있습니다. 수채화 공부를 위해 러시아 국립 레핀미술대학에 유학까지 떠나셨는데요.

“흔히 수채화를 그림의 기초라 생각하고 유화를 그리기 전에 밟아야 되는 단계쯤으로 생각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그림의 기초인 동시에 유화와 똑같이 완성된 미술의 한 장르입니다. 수채화에 대한 잘못된 생각으로 인해 수채화를 그리는 작가들이 별로 없고 미술시장에서 판매 또한 미미한 것이 사실입니다. 이런 편견을 없애기 위해 지금도 끊임없이 표현기법 등에서 연구를 통해 차별화를 꾀하려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1990년대 말 러시아로 유학을 떠났는데 1년 반 정도 공부하다가 이런저런 상황이 좋지 않아 학교를 마무리하지 못한 것이 아직까지 아쉬움으로 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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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촌 해맞이다리’

김 작가는 고향인 부산에서 학창시절을 보내다가 대학 때 대구로 왔다. 계명대에서 2년 정도 공부하다 대구대로 옮겼으며 대구대 졸업 후 러시아로 유학을 떠났다.

▶작품에 김 작가만의 색깔이 있습니다. 작품에서 왠지 모를 애잔함을 느끼게 하는 것 같습니다.

“흔히 수채화는 맑고 경쾌한 느낌을 주어 가볍다는 생각이 드는데, 깊은 무게감을 주는 색을 만들고 싶었습니다. 보통 20번 이상 물감을 덧칠합니다. 그렇게 붓질을 하다보면 붓이 너무 많이 닳아서 감당이 되지 않을 정도가 되지요. 여기에 지점토, 목탄 등을 적절히 섞어 사용합니다. 특히 목탄은 수묵 같은 느낌을 주어서 일반 수채화와는 다른 이미지를 만들어냅니다.”

▶현장스케치를 잘하는 작가로 알려져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현장스케치를 좋아합니다. 화실을 나서서 어디를 가더라도 그 풍경이 인상적이면 스케치를 하는 것이 몸에 배어있습니다. 요즘 젊은 친구들이 사진을 보고 그림을 많이 그리는데 현장스케치만의 매력이 있습니다. 바로 살아있는 느낌을 준다는 것입니다. 수채화에서 공기의 흐름을 표현하는 것이 그림의 생명력인데 이것은 현장스케치를 통해서 가장 잘 느낄 수 있습니다.”

▶누드와 인물을 소재로 한 작업도 다양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1990년대 초까지만 해도 풍경화를 주로 그렸습니다. 그때 누군가가 풍경화만 그린다며 비아냥거리는 것을 보고는 모델을 구해 누드화와 인물화에 집중했습니다. 이렇게 새로운 시도를 하다보니 어릴 적 고향 집 근처에 있던 부둣가와 홍등가의 풍경들이 자연스럽게 매치가 되더군요. 그들의 삶의 모습이 그림에 투영된 듯합니다.”

▶현재는 수채화에 좀 더 집중하고 있지만 앞으로는 인물화에 천착하고 싶다고 하셨습니다.

“저는 바다를 그린 풍경화를 통해 새벽을 여는 노동자들과 그들의 삶, 그 속에서 피어나는 희망을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현재의 그림이 인물보다는 풍경에 초점을 두고 있지만 결국은 인물로 집중될 것이라 생각합니다. 인물의 표정과 함께 노동자들의 거친 손을 저만의 색깔로 담아내고 싶습니다. 빈센트 반 고흐의 ‘감자 먹는 사람들’처럼 노동자들의 표정과 성스러운 노동을 하는 손을 제대로 담아내고 싶은 게 바람입니다.”

▶오랫동안 전업작가로 활동했습니다. 전업작가로 살아간다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1990년대 초 대구대 미술교육원에 직원으로 1년 반 정도 근무한 것 이외에는 늘 전업작가로 살아왔습니다. 경제적으로 그리 넉넉하지 않은데도 전업작가로 살면서 작업하고 싶은 대로 마음껏 작업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아내(박경숙)의 도움이 컸습니다. 결혼 후 한 번도 생활비를 준 적이 없는데 아내는 불평 한번 하지 않았습니다. 교사인 아내의 전폭적인 지지가 없었다면 전업작가로 살아간다는 것이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아내가 좋은 비평가 역할도 해주고 있다고 하셨는데요.

“제 작업을 곁에서 지켜봐주고 있는 아내는 제 작품이 2% 부족하다고 합니다. 저도 그 말에 동의합니다. 부족함을 채우려 노력하고 있지만 쉽게 채워지지가 않습니다. 그래서 늘 초심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완성을 위해서 가야할 길이 아직 멉니다. 그것이 저를 지금까지 버티게 하는 힘이기도 합니다. 끝까지 겸손하면서 노력하는 작가의 길을 가겠습니다.”

글=김수영기자 sykim@yeongnam.com
사진=이지용기자 sajahu@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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