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산책] 일상의 낯선 여행

  • 이은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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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9-11-27 08:09  |  수정 2020-09-09 14:40  |  발행일 2019-11-27 제2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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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영인<영남일보 문학상 당선자>

글을 쓰다 돌아가는 길이었다. 창 너머 벌판은 벼가 이미 베어져 휑했고 저 멀리 수풀 사이로 해가 지고 있었다. 수채물감이 번지듯 하늘이 붉게 물들어갔다. 창 너머로 보이는 세상이 낯설었다. 집에 갈 때 항상 지나는 길인데도 마치 여행을 마치고 숙소로 돌아가는 길 같았다. 뭔가 중요한 일을 한 것 같은데 그게 뭔지 잘 모르겠고, 몸은 무거운데 마음은 가볍고, 가득 찬 것 같으면서도 텅 빈 것 같은 쓸쓸한 기분. 그 시절 집으로 돌아가는 길도 그랬다.

중학교 2학년 때 나는 토요일마다 화장실 청소를 했다. 남자만 있는 중학교였다. 그때만 해도 재래식 화장실이어서 건물과 떨어진 곳에 화장실이 있었다. 학생 수가 많았고 건물 안에는 화장실이 없었기 때문에 군대 막사처럼 생긴 화장실은 거대했다. 대변 칸이 쉰 칸 정도 되었던 것 같다. 소변기는 없어서 시멘트로 만든 턱 위에서 벽을 향해 갈기면 바닥으로 흘러내려 중간 중간 있는 구멍으로 빨려 들어가는 구조였다. 내가 살아오면서 본 가장 큰 화장실이었다. 청소당번들이 몇 명이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열 명은 넘었던 것 같은데 토요일 오후에는 아무도 남지 않았다. 평소에 깐깐하던 담임도 점심 먹으러 가기 바빴던지 토요일에는 검사를 하지 않았다. 그런데 담임은 어쩌자고 나에게 청소반장을 시켰던 것일까. 나는 아이들에게 도망가지 말라고 애원하듯 말했지만 언제나 토요일 오후 텅 빈 교정에는 나만 남았다.

혼자서 청소를 했다. 물을 퍼 와서 변기 구멍 주변에 뿌리고 솔질을 하고 소변기의 누런 자국을 지웠다. 처음에는 냄새가 지독해 헛구역질이 나왔지만 세 번째 칸을 청소할 때쯤이면 괜찮았다. 똥이 많이 묻은 변기는 좀처럼 적응이 되지 않았다. 그래서 양동이에 물을 가득 담아 밖에서 왕창 뿌리고 들어갔다.

청소는 보통 서너 시간이 걸렸다. 담임이 토요일 오후에는 청소검사를 하지 않는다는 것도, 다른 누구도 알아주지 않는다는 것도, 월요일 오후가 되면 다시 그 상태가 된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청소를 그만두지 않았다. 남들을 위해서도, 칭찬을 받기 위해서도 아니었다. 그냥 그러고 싶었다.

청소를 끝낸 뒤, 교문까지 텅 빈 운동장을 혼자 가로지르며 걸었다. 단풍나무가 모퉁이에 줄지어 심긴 운동장이었다. 단풍나무 잎 빛깔이 유난히 빨갰고 노을이 층층이 붉었던 날이 어렴풋이 기억난다. 옷에 밴 냄새 때문에 버스를 타지 않고 걸어서 집으로 갔다. 집에 돌아가도 기다리는 사람은 없었고 늦은 점심을 사먹을 돈도 보통은 없었다. 골목길을 지나다 우두커니 하늘을 봤을 때 하늘은 점점 파란빛으로 변하다가 컴컴해졌다. 그러다 나는 여기가 어디지, 하며 두리번거렸다. 마치 먼 곳으로 여행을 다녀온 듯한 낯선 기분에 휩싸였다. 그때 나는 글이 몹시 쓰고 싶었다.

문학을 향유한다는 건 일상에서 낯선 여행을 하는 것이 아닐까.송영인<영남일보 문학상 당선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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