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 중에도 씨름대회·올림픽 마라톤 예선 열려…훈련캠프로도 각광받아

  • 이춘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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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2-06-29   |  발행일 2012-06-29 제35면   |  수정 2012-06-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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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1년 대구시청 옆 동운정종합경기장에서 수많은 관중이 모인 가운데 씨름경기가 펼쳐지고 있다. 동운정종합경기장은 31년에 세워져 화제였지만 37년 생긴 캠프워커자리의 대명동 운동장에 주도권을 뺏긴다. <경북체육회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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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1년 달성공원 앞에서 열린 핀란드 헬싱키 올림픽(제15회) 마라톤 예선전에서 참가 선수들이 출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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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때 역전경기 장면. 주로 동촌∼청천∼하양 국도변이 많이 이용됐다.


전쟁 때 스포츠도 죽었다?

아니다. 지금보다 더 꽃을 피웠다. 운동이 그땐 하나의 ‘문화’였다.

1910년 어름부터 대구에도 외국에서 수입된 스포츠가 소개된다.

대구 첫 공식야구대회는 1924년 8월18일 계성학교에서 열렸다. 31년 5월 현재 국채보상운동기념공원 자리에 동운정(동인동) 공설운동장을 개축한다. 37년 캠프워커 자리에 대명동 종합경기장이 들어선다. 육상, 야구, 당구장 등이 구비돼 있고, 6천여명의 관중을 수용할 수 있는 전국 최고급이었다. 광복 직후 대구의 명실상부한 운동장은 대명동 공설운동장이었다. 하지만 이듬해 가을부터 새로운 종합운동장 건설 움직임이 보인다. 48년 2월5일 대구 시민운동장 시공식이 거행돼 48년 5월에 완공된다.


베를린·보스턴 영웅
환영 카퍼레이드에
관용차 등 1㎞ 장사진

마라톤 1등 골인 선수,
수많은 관중과 뒤엉켜
테이프 못 끊을 뻔

미군 체육시설 점령
동촌유원지 등서 연습
불만 높자 격려금 줘

51년에도 체전 열려
경북이 종합1위 기염

◆ 운동선수가 연예인보다 더 유명했다

전쟁이 발발하자 미군 등에 의해 이런 경기장 시설이 모두 군사시설로 편입된다.

그래도 시민들은 길거리, 공터 등을 운동 공간으로 활용했다. 50년대초 최고 인기는 단연 씨름과 육상. 툭하면 ‘시민잔치’스타일의 씨름대회가 열렸다. 최대 씨름경기는 광복 이듬해 열린 전조선씨름대회. 달성공원은 경기장 사정이 안 좋아 전매청(KT&G) 공터에서 열렸다. 1만여명의 시민이 운집했다. 출전 선수만 200여명. 결승에선 안덕세와 김상영이 붙어 안덕세가 이긴다. 구미에서 열린 전조선씨름대회는 역대 씨름 사상 최고 화제작. 김천 출신의 이석도와 당시 최고수급이었던 김상영이 붙었는데 무려 6시간 동안 자웅을 겨뤘지만 결국 무승부로 끝난다.

보스턴 마라톤을 제패한 함기룡, 송필윤, 최윤칠 선수가 부산에 이어 대구를 방문해서 시범경기를 벌인다. 부산에서 삼천리호 열차편으로 대구에 도착한 셋은 대구 시내 16개 국민학교 6학년생으로부터 환영을 받는다. 이때 감독은 베를린 마라톤의 영웅인 손기정. 오후에 시가 일주 카퍼레이드를 벌인다. 중앙통에 위치했던 숙소인 태극장을 출발, 중앙파출소~동성로~북성로~서성로~남성로를 돌아 다시 중앙파출소와 중앙통을 거쳐 종합운동장으로 향했다. 대구 관용차가 모두 동원돼 차량 행렬이 무려 1㎞나 장사진을 친다. 이어 선수들은 시민운동장 트랙 7바퀴 반을 도는 3천m 시범경기를 벌인다.

1950년 6월15일 서울운동장에서 자유신문사 주최 제5회 전국 중등학교 야구선수권 대회가 열린다. 기대주는 대구상고. 명투수 최명포를 비롯 문태성, 손상용 등 쟁쟁한 멤버가 기염을 토한다. 감독은 배영암. 물론 결승전에서 동래중을 2대 1로 누르고 17년 만에 정상에 오른다. 대구상고는 경북 대표로 6월21일 열린 학도호국단 체육대회에 출전한다. 또다시 결승전에 오른다. 또 동래중과 패권을 다투려고 했지만, 하필이면 그날 전쟁이 터져 대회는 중단되고 만다.

◆ 헬싱키 올림픽 마라톤 예선전 열려

칠성동 대구시민운동장도 미군 주둔지가 된다. 공평동 체육회 사무실도 군부대에 징발된다. 6·25 때 대한체육회는 부산에 있었다. 하지만 육상은 대구가 베이스캠프였다. 1952년 제15회 핀란드 헬싱키 올림픽 마라톤 예선전도 대구에서 열린다.

그런데 42.195㎞ 마라톤 코스 잡기가 여긴 힘든 게 아니었다.

동촌과 경산 쪽은 군사 시설이 많아 결국 달성공원과 화원까지를 왕복하도록 했다. 예선전에는 전국에서 60명이 몰려왔다. 52년 1월20일 선수들은 달성공원을 출발했다. 달성공원 골인지점은 몰려든 관중으로 일대 혼잡이 빚어졌다. 기마경찰대까지 동원됐다. 나중에는 1등 골인 선수와 관중이 뒤엉키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맨 먼저 골인점에 들어온 전남의 홍종호 선수는 기마 경찰이 타고 있던 말 밑을 기어나가 테이프를 가슴으로 끊지 못하고 손으로 잡는 해프닝이 벌어진다. 2등은 최윤칠이었다. 단거리 대표선수는 엄팔룡이었다. 당시 예선 통과 선수들은 모두 대구에서 훈련을 받는다.

9·28 서울 수복 후 조금씩 얼었던 지역 체육문화도 기지개를 켠다.

피란 온 체육인을 가장 열심히 돌본 사람은 바로 지역 체육계 원로 이경철과 박만태였다. 피란 육상인들의 연습장은 동촌유원지였다. 나중엔 장소가 여의치 않아 화원, 하양, 포항 해변에서도 연습했다. 이때 피란지 육상인에게 선뜻 자기 집을 내준 사람이 바로 이경철이었다.

서윤복을 위시해 함기용, 송길윤, 최윤칠 등 당시 보스턴 마라톤 영웅들이 대구에 모두 내려와 있었다. 51년 봄 무려 50여명의 선수들이 땀 흘리며 연습을 했다. 보스턴마라톤의 영웅 서윤복은 영남중 육상부를 1년 가르쳤다. 영남이 전국 육상계의 다크호스로 등장하게 되는 기폭제가 된다. 지역 육상의 별 엄팔용도 거기서 한 수 배웠다.

◆ 미8군 올림픽 출전단에 700달러 쾌척

지역 체육인들은 미군이 너무 공격적으로 체육시설을 점령하고 있다고 불만이었다.

50년 31회 전국체전에선 경북의 성적이 부진했다. 다들 제대로 된 운동장이 없어 그렇다고 믿었다. 대구시와 합심, 칠성동 종합경기장을 미군으로부터 인수하는데 총력을 기울인다. 덕분에 53년 5월 종합운동장 중 야구장만 미군으로부터 인수받아 선수들의 훈련장소로 활용한다. 이후 55년 2월 시내 공평동 체육회관 확보에 이어, 60년 8월1일이 되어서야 시민운동장을 전부 인수하게 된다.

흥미로운 사실은 건국 후 처음 헬싱키 올림픽에 43명의 소규모 선수단이 파견됐는데 그들의 훈련 장소 역시 대구였다. 이때 미8군 하지 중장이 선수단을 위해 700달러를 격려금으로 전달한다. 그 때문인지 51년 32회 전국체전에서 경북이 1위를 거머쥔다.

◆ 영남 육상부 전국을 제패하다

53년부터 경북 육상 판도가 달라진다.

주도권이 기존 대륜과 계성고 주도에서 영남고쪽으로 이동한다. 서윤복, 유정호 등 장·단거리 1인자에게 코치를 받은 탓이다. 53년 7월 제8회 전국 남녀중고 육상대회가 서울 배재고 운동장에서 열린다. 18명의 선수들은 7월19일 서울행 열차를 탔지만 영등포 역에서 어처구니 없는 일을 당한다. 도하증이 없다는 이유로 헌병들이 입경시키지 않은 것이다. 우여곡절 끝에 대회에 나온 영남고는 상이란 상은 싹쓸이해버린다. 서울의 일부 학생은 지방선수들에게 우승기와 컵을 내줄 수 없다면서 시상식장에서 난동을 부리기도 했다.

그런 영남이었기에 성주군 출신 장거리 유망주 이창훈이 1958년 제3회 도쿄 아시아경기대회 마라톤에서 우승을 차지할 수 있었을 것이다. 53년 8월 대구에선 어처구니 없는 사건이 발생한다.

그날 손기정 베를린 제패 기념 단축 마라톤 대회가 열렸다. 달성공원~동촌을 왕복하는 것이었다. 대구의 영남, 계성, 대륜 , 대구공고, 서울의 양정, 배재고 등이 출전했다. 영남고 1학년이었던 배태화 선수는 폭염 속 우승을 하자마자 의식을 잃고 동산병원으로 긴급히 옮겨졌지만, 결국 의식을 찾지 못한다. 장례는 학교장으로 치러졌고 지역 인사들이 그를 위해 추모비를 세워준다.

▨참고서적=경북체육사(2005년 간)
이춘호기자 leekh@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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