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大邱스토리

  • 이춘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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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2-06-29   |  발행일 2012-06-29 제33면   |  수정 2012-06-29
북성로, 시간의 역설…‘2012’보다 더 화려한 ‘1952’
戰時수도 이곳에선
도대체 무슨 일이…
20120629
1952년 대구 북성로 동쪽 입구 전경. 일제 때는 은방울꽃 가로등이 놓여 있을 정도로 대구 최고의 번화가였고 엘리베이터가 운행되는 미나카이 백화점이 입구 왼쪽에 자리잡고 있었다. 지금은 대구백화점 동남쪽이 번화가이지만 그때는 대구역 앞이 가장 번창했다. 현재 이 지역이 워낙 낙후돼(아래 사진), 피란지 북성로 풍광이 지금보다 더 활발한 분위기를 보여주고 있다.

4만5천여명.

1950년 8월4일 우리 국군의 숫자다 . 대구스타디움(6만6천422명 수용) 스탠드를 다 채우지 못한다. 미군 4만7천여명, 북한군 8만여명을 합쳐도 3개의 매머드 종합경기장만 있으면 당시 ‘6·25 무대’에 출연한 아·적군을 모두 집결시킬 수 있다는 계산이 나온다.

피식, 갑자기 웃음이 나온다. 일견 ‘거창해’ 보이던 6·25가 조금은 맥빠져 보인다. 6·25는 전사(戰士)의 무대는 아닌 듯 하다. 어쩌면 열강들이 당시 최강의 신무기를 한반도에서 성능실험해 본 건지도 모르겠다.

북한과 달리 남한은 군사 인프라가 전무하다시피했다. 군인보다 경찰의 화력이 더 월등했다. 경찰은 칼빈과 M1 소총을 가졌지만, 군인에게 그건 언감생심.

병무행정도 전무했다. 사병이 직접 거리에 나가서 장정을 잡아왔다. 만 20~35세 장정은 전장으로 잡혀갔다. 나이든 사람도 보국대에 끌려갔다.

흥미롭게도 북한 인민군과 국군이 사용한 보국대의 한자어가 다르다. 인민군이 사용한 보국의 ‘보(報)’자는 한국군이 사용한 보(保)와는 뜻이 완전 달랐다. 인민군은 김일성 수령에 ‘보은(報恩)’하기 위해, 한국군의 보국대는 국가를 ‘보호(保護)’하기 위해 전장으로 나간 것이다.

8월1일 육본은 대구에서 육군중앙훈련소(제1훈련소)를 창설해 신병보충 인프라를 급조한다. 대한민국 대다수 남성들이 거쳐간 연무대 논산훈련소(99년부터 육군훈련소로 개칭)는 제2훈련소로 51년 11월에 생겨난다.

동족상잔의 이 전쟁은 하늘이 만든 불행이 아니라 ‘이념이 만든 불행’.

상실감이 안겨다 준
역설적인 평화로움은
낭만이란 이름으로

그 도시를 활보하고…
피란은 비극이었지만
문화, 예술, 체육은
화려한 희극이 되었다


그래서 해독제를 쉬 찾을 수 없었다. 그 전쟁으로 인해 남과 북이 대립하는 것 이상의 앙칼지고 섬뜩한 이념적 대립을 우리는 아직도 자국민끼리 벌이고 있다. ‘6·25가 과연 끝났을까’라는 의구심이 든다.

6·25를 생각하면 자꾸 ‘태국의 닭싸움 광경’이 떠오른다. 자연스러운 분노가 아니라 누군가가 조장해 놓은 분노의 구조속에 갇혀 사생결단하고 있다는 걸 닭들은 좀처럼 깨닫지 못한다. 우리도 마찬가지. 좌·우익의 대표 구단주들이 남한과 북한이라는 두 마리의 싸움닭을 한반도란 전장에 집어넣고 사투를 벌이도록 했다. 급기야 흥분한 구단주가 직접 장기판 앞에 앉아버린다.

하지만 전쟁은 빈익빈 부익부를 거의 제로 베이스 수준으로 끌어내려준다. 다 가난하다는 것, 그게 되레 안정감을 가져다 준다. 워낙 큰 슬픔이 일상을 집어삼키고 있기 때문에 오히려 상실이 주는 ‘역설적 평화로움’이 낭만이란 이름으로 돌아다닌다.

대구는 8월18일 새벽 박격포탄이 대구역 부근에 여러 발 떨어진 것 말고는 전혀 피해를 입지 않았다. 피란민들의 일상은 ‘비극’이었지만 초토에서 꽃처럼 피어났던 문화예술만은 ‘희극’이었다. 국립극장은 물론 대다수 대한민국 최고의 문화예술인들이 대구에 내려와 있었다. 섬유산업의 75%를 대구가 독점하고 있었고, 제조업의 첫 단추도 대구에서 끼워진다.

이 와중에 학교, 운동장, 병원, 백화점, 공원 등 100여군데의 각종 시설물은 미군에 의해 군사시설로 접수된다. 군수물자는 막바로 대구경제의 축으로 작동을 한다. 이 흐름은 1970년 경부고속도로가 생겨 서문시장 상권이 서울 동·남대문 상권에 뺏기기 전까지 20여년간 지속된다. 서울이 정상적으로 복구되기 전 50년대 대한민국의 수도는 누가 뭐래도 ‘대구’였다. 하지만 지금은….

이번주에는 6·25당시 대구에 어떤 군사시설이 들어섰는지 알아봤다. 특히 그동안 사각지대에 파묻혀 있었던 6·25 시절 대구의 스포츠 야사도 정리해봤다.
이춘호기자 leekh@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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