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도發 고려대장경 낙동강 거쳐 개포나루 통해 해인사까지 옮겨져

  • 박진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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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4-06-20   |  발행일 2014-06-20 제35면   |  수정 2014-06-20
● 관광지로 탈바꿈한 사문진
강화도發 고려대장경 낙동강 거쳐 개포나루 통해 해인사까지 옮겨져
고령군 개진면의 개경포공원에 들어설 팔만대장경 이운 조형물.
강화도發 고려대장경 낙동강 거쳐 개포나루 통해 해인사까지 옮겨져
고령군 개진면 오사리 개경정에서 바라본 낙동강. 바로 아래 개경포가 있다.
강화도發 고려대장경 낙동강 거쳐 개포나루 통해 해인사까지 옮겨져
고령군이 개경포주막촌 복원공사를 하고 있다. 6월말까지 완공예정이다.
강화도發 고려대장경 낙동강 거쳐 개포나루 통해 해인사까지 옮겨져
고령군 다산면 옛 노강나루터 야산에 있는 노강서원.


달성과 고령을 낀 낙동강 연안에는 약 20개의 나루터가 있었다. 이 가운데 개(경)포나루와 노강나루, 사문진주막촌을 찾았다. 현재 달성군과 고령군은 경쟁적으로 ‘강안문화’를 살리기 위해 나루터복원 등 수변관광지조성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개(경)포나루

고령군 개진면(開津面)은 ‘나루를 연다’는 개진(開津)에서 유래한다. 개진은 개포와 진촌의 첫 글자를 따서 부른 이름이다. 현재 개진면 오사1리에 위치한 개경포(開經浦)는 일명 개포나루로도 불린다. 맞은편은 대구시 달성군 구지면 도동리다. 달성~고령 낙동강의 커다란 물돌이 한 가운데 위치한 개경포구는 선사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낙동강 중·하류 수로교통의 요지였으며, 소금과 곡식을 비롯한 각종 물산의 집산지였다.

개경포는 대가야, 신라시대에는 가혜진 또는 가시혜진으로 불리다 이후 개산포 또는 개산강으로 불렸다. 개경포라는 이름은 여말선초, 강화도에서 낙동강을 거쳐 개포나루를 통해 열뫼재~고령읍~야로~해인사까지 고려대장경(팔만대장경)이 옮겨진 것에서 유래한다. 그래서 ‘장경나루’라고도 불린다. 당시 경판의 이운과 관련해 육로와 해로 등 두 가지의 이동설이 있으나 개경포를 거쳤다는 데는 이설이 없다. 해동지도와 여지도서 등에는 고령관아에서 동쪽으로 20리 떨어진 개산포에 강창(江倉)이 있었다고 기록돼 있다. 강창은 곡식창고다. 오사리 앞 제석산을 약 10분 오르면 개경정이라는 정자가 있어 멀리 낙동강과 달성공단까지 훤히 내려다볼 수 있다.

일제강점기 개경포는 ‘경(經)’자를 빼고 그냥 개포로 불렸다. 조선시대 개경포에는 200여호의 집과 30여개의 객주가 즐비하게 늘어서 도진촌을 이뤘다고 한다. 임진왜란 때는 고령 출신 의병장 김면이 이곳에서 왜선 2척을 불태우고 왜구 80여명을 섬멸했다는 기록이 있다. 임진왜란이 끝난 뒤 김면을 비롯한 한강 정구, 옥산 이기춘 등 낙강칠현(洛江七賢)은 낙동강에서 뱃놀이를 하며 시를 읊기도 했다. 개경포는 1970년대까지 대구 달성, 현풍, 구지 지역으로 통하는 나루였으나 도로와 다리가 생기면서 쇠락해져 나루로서의 기능을 잃었다. 80년대 초까지만 해도 나룻배 10여척이 고기잡이로 생계를 이어갔지만 강변에 제방이 생기고, 수질이 나빠지면서부터 고기잡이배는 대부분 사라졌다. 이에 고령군은 2001년 옛 개경포구 앞에 기념공원을 만들었다. 지난해 6월부터는 20억원을 들여 낙동강 신나루 문화벨트조성사업을 추진해 나루터를 복원하고 있다.

지난 15일, 공사장 인부들이 6월말까지 주막촌, 팔만대장경 이운 관련 조형물, 나룻배 등을 설치하느라 비지땀을 흘리고 있었다. 번성했던 개경포구는 이제 수변관광지로 변모하고 있는 중이다. 하지만 옛 선착장은 갈대와 수생식물로 뒤덮여 자취조차 찾을 수 없었다. 옛 개경포 나루에서 낚시를 하던 김영식씨(60)는 “4대강 사업 이전만 해도 갈수기 때 이곳 낙동강은 바닥을 드러냈다”면서 “지금은 사시사철 수량이 풍부해 경관도 좋고, 물고기도 잘 낚인다”고 만족해했다.

◆노강나루

노강나루는 노강진나루, 아랫놉락나루, 하로다나루, 송곡나루로도 불렸다. 위치는 고령군 다산면 송곡리에 있다. 사문진나루터에서 약 5㎞ 남쪽에 위치한다. 맞은편은 달성군 논공과 옥포 일대다. 현재 나루터는 사라졌지만 야산 중턱에 노강서원이 있다. 노강서원에서 강을 건너 바라보면 달성군청 청사가 뚜렷하게 보인다. 조선시대 노강진은 고령~옥포를 왕래하는 주요 나루터로, 곡류와 소금 등을 운반하는 중간기착지였다.

노강진과 노다마을은 조선중기 서인의 영수 우암 송시열과 관계가 깊다. 송시열이 장희빈의 소생인 숙종의 장남 윤(경종)의 왕세자 책봉을 반대하다 제주도로 귀양을 가게 됐는데 이때 낙동강수로를 이용했다. 송시열이 귀양 도중 노강진에 내려 휴식을 취하다 노인들이 많은 것을 보고 마을이름을 ‘노다(老多)마을’이라고 했다고 한다. 현재 윗동네를 상로다, 아랫동네를 하로다로 부른다. 송시열이 이곳에 잠시 머물렀다는 사실에 근거해 영조 때 고령 지역의 유림이 서원을 건립했다. 서원은 송시열을 주향하고, 권상하, 한원진, 윤봉구 송환기를 배향하다 대원군의 서원철폐령 때 훼철됐다. 광복 후 복원했으나 6·25전쟁으로 파손된 것을 다시 보수해 지금에 이른다. 서원 대청마루에 ‘산앙재(山仰齋)’란 현판이 있다.
글·사진=박진관기자 pajika@yeongnam.com
<협찬> (주)지오씨엔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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