갯벌이 품은 霧津의 無盡한 맛

  • 이춘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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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7-09-08   |  발행일 2017-09-08 제33면   |  수정 2017-09-08
[이춘호기자의 푸드로드] 전남 순천
김승옥 소설 ‘무진기행’ 배경이 된 순천만
韓 습지1번지로 소설 덕에 안개도 ‘특산품’
“순천음식을 만든 건 8할이 갯벌”이란 말도
짱뚱어탕은 일명 갯벌탕…갯벌음식의 원형
20170908
용산전망대에 서면 무진교에서 출발해 순천만으로 입수하는 S자 모양의 갯강과 주변 갈대, 갯벌의 염생식물, 그리고 주변 섬들이 펼치는 순천만 9경을 동시에 만끽할 수 있다.

시들해진 여름이었다. 30℃를 넘어선 햇볕이지만 그 기세는 꽤 무뎌져 버렸다. 그새 탱글하게 여물고 있는 삽상한 가을바람이 조금씩 전면으로 나서고 있다. 대구를 떠난 지 3시간여 만에 ‘한국 습지 1번지’로 불리는 전남 순천만의 생태공원 주차장에 도착했다. 햇살은 따갑지만 바람결은 무척 서늘했다. 제습된 바람의 결이 꼭 바스락거리는 ‘셀로판지’ 촉감 같다.

무진(霧津). 순천으로 가는 내내 ‘무진’이란 단어를 묵주처럼 돌렸다. 무진, ‘안개나루’라는 뜻. 실재하는 지명이 아니다. 황석영의 소설 ‘삼포가는길’, 곽재구 시인의 신춘문예 당선시인 ‘사평역에서’에 등장하는 삼포와 사평역처럼 작가의 상상에 의해 태어났다.

순천 음식의 오늘을 만든 건 8할이 바람이 아니라 ‘갯벌’이다. 순천의 핏속에는 갯벌 냄새가 고여 있다. 육지쪽에선 잘 모르는 향이다. 그게 손맛으로 연결된다. 순천은 ‘대한민국 갯벌음식’ 원형의 한 자락을 담고 있다. 그 원형 중 하나가 ‘갯벌탕’으로 불리기도 하는 ‘짱뚱어탕’이다. 장흥 등 다른 갯벌권에선 순천만큼 짱뚱어탕에 혹하지 않는다. 전남 신안군 증도면 방축리에 470m ‘짱뚱어다리’가 있지만 짱뚱어탕은 어느 날부터 순천의 탕이 되고 말았다. 이 탕의 원형에 가 닿기 위해선 동절기마다 ‘점령군’처럼 나타나 갯벌을 하얗게 감금해 버리는 무진의 연대기를 파헤쳐야만 된다.

순천이 고향인 소설가 김승옥(75). 그가 1964년 종합잡지 ‘사상계’에 발표한 단편소설 ‘무진기행’ 때문에 무진이 태어난다. 당시 문학청년에게 무진기행은 ‘바이블’과 같았다. 새로운 문체를 예고한 기념비적 작품이었다. ‘무진에 명산물이 없는 게 아니다. 나는 그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 그것은 안개다.’

그 소설에 등장한 안개는 부인할 수 없는 순천의 ‘특산품’이었다. 토박이들은 ‘갯가음식’이 뭔가를 안다. 잠시 스쳐지나가는 관광객들은 그 비밀을 알 도리가 없다. 이제 그 개체수가 얼마 남지 않은 갯가 토박이들은 관광객들에게 “요즘 정체불명의 체인형 신메뉴는 갯벌 품은 안개가 안 묻어 영 맛이 아니다”면서 투덜댄다. 전어 밤젓, 토하젓, 갓김치 등에서 전해지는 그 농익은 맛을 전라도에선 ‘개미’라 한다.

여수에서 서진한 갯벌군단은 여수만~순천만~보성만~도암만~증도의 염전권~함평만~곰소만~비인만~천수만~가로림만~아산만~소래포구를 품은 경기만까지 이어진다. 예전 전라도에선 갯벌도 음식의 한 종류에 포함시켰다. 갯벌은 크게 ‘펄갯벌’ ‘모래갯벌’ 그리고 펄과 모래가 섞인 ‘혼합갯벌’로 분류된다. 서해안권은 혼합갯벌, 순천만은 펄갯벌이다. 꼬막 등은 모래갯벌권에서 많이 잡힌다.

갯벌을 더욱 기름지게 하는 게 안개다. 봄·여름·초가을까지는 무심하던 갯벌의 해풍은 동절기로 접어들면서 무진장한 안개를 기수역에 쏟아놓는다. 전국 갯벌권에 이런저런 안개가 돋지만 순천만 초입에서 돋아나는 안개는 그 기세가 엄청나다.

무진은 순천 푸드투어의 첫 단추. 소설 속 무진은 이제 순천만 갈대투어의 출발점인 ‘무진교’로 태어났다. 그 다리는 탈속의 다리다. 건너보면 그 말이 무슨 뜻인가 실감할 것이다. 무진교 이전에는 이승, 무진교를 건너가면 저승의 시간처럼 까무룩해지는 걸 경험하게 된다. 무진교 앞에는 순천만을 S자로 ‘구불러 가는’ 갯강을 실감할 수 있는 유람선 선착장이 있다.

갈대밭만 무성했다면 순천만은 그렇게 크게 어필되지는 않았을 것 같다. 그 갈대밭 속으로 강이 흐르기 때문에 독특한 미학을 간직할 수 있었다. 갯벌 중 습기가 부족한 구역부터 갈대가 잡아먹는다. 예전 순천만에는 해수가 많이 들락거렸는데 이젠 그렇지 않아 갈수록 갈대밭에 뒤덮혀가고 있는 형국이다.

순천만으로 이어지는 강은 모두 3개(동천·이사천·해룡천). 이들 강은 총면적 22.21㎢의 순천만을 만들었다. 순천만의 10분 1 구역은 갈대군락지. 10월 중순부터 11월 초 갈대밭은 만개한 꽃으로 인해 은물결이지만 아직은 짙은 녹색톤이다. 갈대꽃도 가을햇살과 수정해야 비로소 개화된다. 갈대꽃이 눈꽃처럼 흩날릴 때 또 한 명물이 북에서 온다. 러시아권 흑두루미가 순천만으로 월동여행을 오는 것이다. 2008년부터 개체수를 측정하는 모니터링 요원이 조직된 모양이다. 지난해는 1천725마리가 월동했다고 한다.

오후 5시를 넘어섰다. 햇살의 광량이 확 줄어든다. 주위는 완전 가을톤. 어둑해지는 순천만 전경을 감상하기 위해 1.7㎞ 나무데크를 지나 용산전망대로 갔다.
글·사진=이춘호기자 leekh@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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