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낯선 경험에 깃든 뿌듯한 희망

  • 이재수 (국민연금공단 서대구 지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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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4-04-25 08:04  |  수정 2024-04-25 08:07  |  발행일 2024-04-25 제2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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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수 (국민연금공단 서대구 지사장)

봄이 여름과 가을을 거쳐 겨울로 흐르듯 인간은 탄생과 동시에 소멸을 향해 나아간다. 나이 듦을 외면하거나 죽음을 거부하고 싶지만, 결국은 '불굴의 패배'에 직면한다. 이미 종착지가 정해진 운명! 어찌 살아야 후회와 미련을 조금이나마 덜 남길까? 그건 삶을 풍요롭고 다채롭게 사는 것이다. 끝 모를 호기심으로 매 순간 재미를 찾고 의미를 느끼면서 말이다.

삶은 우연의 연속! 우연은 언제나 뜻밖에 찾아오는데 이번에도 그랬다. 스물두 번째 국회의원 선거관리를 위해 유관기관 참여가 절실하게 필요하다는 공문에서. 거주지와 가까운 투표소에 근무하는 건 매력이지만 열네 시간 근무와 최저임금을 살짝 웃도는 적은 수당은 못내 아쉬웠다. 하지만 흔쾌히 도전했고 낯선 시선으로 즐겁게 근무했다. 퇴직이 일 년 남짓 남았으니 다시는 오지 않을 마지막 기회라 생각하며.

긴장과 바쁨의 열네 시간! 업무 배정과 교육을 거쳐 공정하고 투명한 투표 관리를 위해 엄숙하게 선서했다. 새벽 여섯 시부터 끊임없이 몰아치는 선거인의 행렬로 잠시 숨 고를 틈조차 없었다. 차분하게 차례를 지키고 타인을 배려하는 정중한 태도에서 교양과 품격을 갖춘 선진 시민이라는 뿌듯함이 절로 묻어났다. 신원을 확인하고 투표용지에 기표한 후 투표함에 넣는 모든 절차는 물 흐르듯이 자연스럽게 나아갔다.

맡은 업무는 인물과 정당을 선택하는 두 장의 투표용지에 투표관리관의 직인을 날인하고 일련번호를 절취하여 순서대로 배부하는 것! 컨베이어 벨트가 돌아가듯 지극히 단순한 일을 무려 1천500번가량 반복했다. 젊은 날에 삶의 방향을 잃고 표류하느라 작업장에서 꼬박 한 달을 보내야만 했던 기억이 아련하게 떠올랐고, 온실같이 평온한 지금의 삶에 무한 감사를 느꼈다.

무심하게 스치듯 지나치는 게 아니라 손닿는 거리에서 1천명 이상과 접촉할 수 있는 기회는 흔치 않다. 지구인이 제각각이듯 투표장을 찾는 선거인의 행태 또한 사뭇 달랐다. 그 모든 걸 온전히 지켜봤으니 멋진 경험을 했다. 여명이 밝아 오기 전부터 대기하거나 마감 1분 전에 헐레벌떡 뛰어오거나, 잔뜩 굳은 얼굴에 한 손으로 용지를 받거나, 공손하게 두 손으로 받으며 "감사합니다"라며 격려하거나. 제각각 다른 표정과 자세였지만 어느 누구도 질서를 흩트리거나 평온을 깨지 않았다.

이제 날 선 공방은 끝났다. 승패는 명확히 갈렸다. 승자는 득의양양하게 환호를 내지른다. 패자는 거대한 민심의 물결에 하염없이 고개 숙인다. 모든 끝은 아쉽다. 그러나 완전히 끝난 건 아니다. 선거는 또다시 있고 결과는 언제든지 달라진다. 그러니 진정한 승리는 유권자의 몫이다. "투표는 탄환보다 강하다(The ballot is stronger than the bullet)"는 링컨 대통령의 말처럼.

처음 해 본 사회참여! 비록 낯설고 힘들었지만 소중한 경험이었다. 앞으로 맞닥뜨릴 새털처럼 많은 날들을 무엇으로 채워갈지 그 실마리를 찾은 기분이다. 그리고 대한민국의 미래는 더욱 빛날 것임을 직접 확인했다. 휠체어를 타고 투표권을 행사한 아흔 살 할머니의 밝은 모습에서, 기표소에 같이 들어가자는 어머니의 손짓에도 적당한 거리를 둔 채 차분하게 기다리던 초등학생의 준법정신에서.
이재수 (국민연금공단 서대구 지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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