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나은 세상] 캡틴의 운명

  • 우광훈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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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4-04-25 06:57  |  수정 2024-04-25 06:59  |  발행일 2024-04-25 제22면
딸과 떠난 日여행 마지막날
서로의 상처 치유한 그순간
'원피스' 주제가 흘러나왔다
올드캡틴 퇴장과 새캡틴의
등장 알리는 경이로운 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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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광훈 소설가

4월 초, 대학을 갓 졸업한 큰딸과 함께 일본을 다녀왔다. 교토와 나라, 오사카를 거쳐 다시 대구로 돌아오는 일주일간의 여행이었다. 15년 전에 경험했던 첫 일본 가족여행을 그대로 재현해 보고픈 마음과 벚꽃의 나라에서 따스한 봄을 만끽하고픈 욕심이 혼재되어 있었다.

예전, 모든 가족여행의 '캡틴'은 나였다. 여행 일정이 확정되면 곧바로 호텔과 항공권을 예약하고, 구글 지도를 참고해 교통편과 여행 동선을 정했으며, 다양한 여행서적들을 참고해 나만의 여행가이드북을 만들었다. 그렇게 몇 달을 신경쓰다 보니 여행 당일이 되면 난 항상 녹초가 되기 일쑤였고, 결국 여행지에서 몸살이 나 여행을 제대로 즐기지 못하곤 했다. 하지만 이번엔 달랐다. 난 단지 후원자에 불과했고, 내 딸이 '캡틴'이었다. 어리고 경험 없는 캡틴이어서 그런지 때론 불안했지만 예전과 같은 지난한 준비과정이 생략되어 난 참으로 편하고 여유로웠다. 난 딸의 계획에 무조건 오케이 사인을 보냈고, 필요한 돈을 송금해주었으며, 그렇게 단체여행을 떠나는 관광객처럼 느긋한 마음으로 출발날짜만을 기다렸다. 그것은 지혜로운 아내의 권유이기도 했고, 딸의 성장을 지켜보고픈 나의 소박한 바람이기도 했다.

여행 내내 큰딸을 졸졸 따라다녔다. 호텔 체크인을 할 때에도, 교통패스를 끊을 때에도, 트래블 카드로 현금을 인출할 때에도 난 항상 딸 뒤에 있었다. 허리가 좋지 않은 관계로 지하철과 기차로 이동할 때에는 매번 서 있어야 했지만 너무나 행복하고 만족스러운 여행이었다. 본토초를 비롯한 예스러운 골목길은 지극히 아름다웠고, 나라코엔 사슴들의 전병에 대한 욕심은 여전했으며, 도톤보리의 상징 글리코상은 한결같은 동작과 에너지로 우리를 반겨주었다. 15년 전, 그 느낌 그대로라고 해도 될 만큼 여행지는 크게 변한 것이 없었다. 굳이 달라진 것을 찾는다면 지금 내 옆에 아내가 없다는 것, 직장관계로 함께하지 못한 것이 너무 아쉽고 미안했다.

여행의 마지막 일정은 오사카 남바였는데 도톤보리 강가에 앉아 유람선이 오가는 풍경을 바라보며 딸과 함께 모둠꼬치를 안주 삼아 맥주를 마셨다. 솔직히 큰딸과 난 예전부터 많은 트러블이 있었다. 진로에 대한 사소한 견해 차이가 거친 언쟁으로 발전하기도 했고, 때론 돌이킬 수 없는 감정싸움으로 확전되어 가출이라는 초유의 사태가 발생하기도 했다. 우린 술의 힘을 빌려 그 당시 서로의 과오에 대해 사과했고, 그렇게 이해와 격려의 말로 미처 아물지 못한 상처를 치유했다. 아직은 이른 저녁이었지만 딸과 함께 마시는 술은 그 무엇보다도 달콤 쌉싸름했다.

딸에게 막잔을 따르려는데, 망가(Manga)의 나라답게 일본 애니메이션 '원피스'의 주제가가 맞은편 대형 상가에서 흘러나왔다. 순간, 그 애니메이션의 주인공인 루피와 해적 샹크스의 얼굴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루피를 구하려다 바다괴물에게 한쪽 팔을 잃게 된 샹크스가 이스트 블루 풍차마을을 떠나기 전 자신의 보물인 밀짚모자를 루피에게 건네주는 장면 말이다. 샹크스에 대한 미안함을 감춘 채 '언젠가는 꼭 해적왕이 될 거야'라고 외치는 루피를 향해 그는 더없이 진지한 표정으로 이렇게 말한다.

"그럼, 이 모자를 너에게 맡기마. 내 소중한 모자니 꼭 돌려주어야만 해. 물론 의젓한 해적이 되어서 말이다!"

그래, 이 말은 화려한 네온사인으로 물든 그 강가에서 내가 '날 닮은 딸에게' 꼭 건네고 싶었던 말이었고, 마지막 술잔이 오갔던 그 찰나와도 같은 시간은 올드한 캡틴의 퇴장과 새로운 캡틴의 등장을 알리는 진정 경이로운 삶의 한순간이었다.
우광훈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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