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여행] 경남 함양 지리산 가는 길, 지안재와 오도재…돌고 도는 고갯길…인생길 닮았구나

  • 류혜숙 여행칼럼니스트
  • |
  • 입력 2024-05-03 07:53  |  수정 2024-05-03 07:54  |  발행일 2024-05-03 제15면
명징하게 구속된 속도를
의식적으로 지키고 있다. 어린이가
보이지 않는 어린이 보호구역에서,
차량이 뜸한 시골길에서도. 몇몇 차들이
바쁜 아침처럼 꽁무니를 보이며
쌩하니 멀어지면 속도계를 본다.
내가 너무 느린가. 그러다 난데없는
커다란 오토바이가 나를 앞지른다.
헬멧 아래 삐져나온 백발의 머리칼이
긴 강물 같은 잔상을 남긴다.
그 하얀 물결 따라 함양읍 구룡리 옥녀봉
아래에서 '지리산 가는 길'로 들어선다.
들판을 가로지르는 직선 길을 지나
팔령천을 건너고 조동마을을 스쳐
이제 꼬부랑길을 천천히 오른다.
저 앞에서 굽이마다 아슬아슬 기울어지는 오토바이는 이리 기울고 저리 기울지만
넘어지지 않고, 멈추지도 않고,
고갯마루를 넘어 사라진다.
남겨진 고갯마루에 사람들이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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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섯 번 반을 굽이돌아 해발 370m의 고갯마루에 오르는 지안재. 함양읍에서 지리산 방향으로 가는 가장 빠른 길로 2004년에 개통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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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제일문 앞에서 함양방향을 바라본다. 청단풍과 홍단풍이 계절을 뒤죽박죽 엉켜놓은 산길이 펼쳐진다.
◆지안재

느리게 여섯 번 반을 굽이돌아 고갯마루에 올라 멈춘다. 고개는 지안재다. 함양읍에서 지리산 방향으로 가는 가장 빠른 길로 2004년에 개통됐다. 워낙 경사가 급한 산길이라 안전을 위해 구불구불 완만하게 돌아가는 도로를 낸 것이 지금의 지안재 모습이다. 재 아래 조동(棗洞)마을은 대추나무가 많다고 대추지 마을이라고도 하는데 팔령천을 사이에 두고 제한(蹄閒)마을과 조동마을로 이루어져 있다. 지안재는 제한치(蹄閑峙)에서 유래된 이름인데 가파른 고갯길에 '말발굽도 쉬어간다'는 뜻이다.

제한은 조동마을의 자연부락으로 옛날 역(驛)이 있었던 곳이다. 제한역은 조선 세종 때인 1438년 실록에 처음 등장한다. '경상도 함양의 새 역은 '제한'이라 칭한다'라는 기록이다. 동쪽의 사근역(沙斤驛)과 서쪽의 인월역(引月驛)은 고려 때부터 있었다. 아마 제한역은 두 역 사이에서 임시로 쉬어가는 역할을 하다 세종 때 정식 역이 된 것이 아닌가 싶다. 역 주변에는 역참 관원들에게 딸린 식솔과 물자공급 등을 위한 촌락이 형성되어 제한촌이라 했다. 제한촌의 뒤에 있는 고개가 제한치다. 제한은 시간이 흐르면서 부르기 쉬운 지안으로 바뀌었다고 여겨진다. 역명은 대개 지명을 따르는데 이곳만은 거꾸로 역 이름에서 지명이 유래했다고 한다. 즉 역로는 제한역에서 지안재가 아니라 팔령천을 따라 팔랑치 너머 인월역으로 이어졌다. 그러니 지안재에서 말발굽을 쉬어갈 일은 없었을 것이다.

그래도 누군가는 꾸역꾸역 수풀을 헤치며 가파른 고개를 올라 고갯마루에서 잠시 숨을 골랐을지도 모른다. 거듭거듭 그리하여 오솔길이 생겨났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마침내 지금의 길이 났을지도 모른다. 길이 닦인 지 벌써 20년, 이제는 많은 사람들이 이곳에 멈추어 쉬어 간다. 지안재는 오도재 아래의 작은 고개다. 다른 지역에서는 '지안재'라 따로 구분해서 부른다는데 함양 쪽에서는 그냥 통칭 '오도재'라 부른다. 나는 함양사람도 아닌데 2007년 처음 이 고개를 넘고는 십수 년을 오도재라 했다. 이후 '지리산 가는 길' 따라 지안재를 넘고 오도재를 넘은 것이 족히 예닐곱 번이건만 지안재의 모습은 잊지 못하면서 이름은 자꾸만 잊었다.

◆오도재

사방으로 바짝 좁혀진 골짜기로 든다. 청단풍과 홍단풍이 계절을 뒤죽박죽 엉켜놓은 산길을 따라 더욱 높은 오도재로 향한다. 오도재는 삼봉산과 법화산 사이, 능선의 고도가 낮아지는 잘록한 안부(鞍部)에 있다. 함양에서 칠선계곡과 백무동계곡, 그리고 지리산으로 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넘어야 하는 고개다. 옛날 지리산골 마천사람들은 함양장날마다 나뭇짐을 짊어지고 이 고개를 넘었다. 벽소령과 장터목을 거쳐 온 남해와 하동 등지의 소금과 해산물도 이 고개를 넘어 내륙지방으로 운송되었다. 잿마루에 '지리산제일문'이 우뚝 서 있다. 현판은 함양 출신의 명필가 정주상 선생의 글씨라 한다. 문 아래에 함양 방향을 조망하는 전망대와 매점, 화장실 등이 조성되어 있다.

전망대 입구에 청매(靑梅) 인오(印悟)조사의 시비가 있다. '깨달음은 깨닫는 것도 깨닫지 않는 것도 아니니/ 깨달음 자체가 깨달음 없이 깨달음을 깨닫는 것이네/ 깨달음을 깨닫는다는 것은 깨달음을 깨닫는 것이 아니니/ 어찌 홀로 참깨달음이라 이름하리요.' 깨달을 각(覺)이 12번 나오는 그 유명한 '12각시'다. 인오조사는 서산대사의 제자로 임진왜란 때 승군을 이끈 분이다. 그는 마천면 삼정리의 영원사(靈源寺) 도솔암에서 수도하였는데, 틈틈이 산죽으로 조리를 만들고 소나무의 관솔을 모아 함양 장터에 내다 팔았다고 한다. 물건값은 주는 대로 받았고 팔리지 않은 물건은 그대로 장터에 두어 누구든 요긴하게 쓰도록 배려했다고 전한다. 그렇게 이 고개를 넘어 장터를 오가던 어느 날 그는 큰 깨달음을 얻었다고 한다. 오도재의 오도(悟道)는 '도를 깨우치다'라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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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제일문. 지리산으로 가는 관문으로 2006년에 준공됐다. 오른쪽 시비에 인오조사의 '12각시'가 새겨져 있다.
'지리산제일문' 옆 숲속에 산신각이 있다. 두 여인이 앉아 치성을 드리는데 아름다운 수목들 사이로 볕뉘가 어른대어 어쩐지 가슴이 미어진다. 가야국의 마지막 임금인 구형왕은 532년 신라가 침공하자 선량한 백성을 전쟁의 제물로 삼을 수 없다 하여 나라를 신라에 양국하고 9만 대군과 함께 길을 떠났다. 그가 잠시 머문 곳이 조동마을 아래 구만동이고, 대궐터를 잡은 곳이 오도재 넘어 추동이다. 그리고 다시 보다 깊은 칠선계곡으로 피란한다. 구형왕의 왕후인 계화부인은 오도재에 올라 제단을 쌓고 망국의 한과 선왕들의 명복을 빌었다고 한다. 이후 성황당이 생겼고, 지나는 길손들이 기도하고, 주민과 무당들이 지리산 천왕신을 모시고 제를 지냈다. 그 자리에 지금 산신각이 있다. 그녀들의 비손 위에 나의 기도를 슬쩍 얹고는 발걸음도 살금살금 숲을 빠져나온다.

여섯번 반 굽이도는 지안재 도로 2004년 개통
오도재 잿마루에 관문 '지리산제일문' 들어서
조선 청매인오 선사 고개 넘나들다 큰 깨달음
'지리산조망공원' 웅장한 지리산 능선 한눈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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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형왕의 왕후인 계화부인이 제단을 쌓고 기원하던 자리에 산신각이 있다. 길손들이 기도하고 주민과 무당들이 지리산 천왕신을 모시고 제를 지냈던 자리이기도 하다.
오도재를 넘어 조금 내려가면 '지리산조망공원'이다. 지리산 산신인 마고할미가 천왕봉을 머리에 얹고 오도카니 앉아 있다. 그녀 너머로 지리산의 능선이 한눈에 담긴다. 조 아래가 추동, 저 아래가 마천, 천왕봉 너머는 하동과 구례다. 김종직과 정여창과 김일손과 유호인 등이 이 고개에 멈추어 지리산을 노래했다. 서산대사와 사명대사와 청매선사 등 승군이 이 고개에 머물렀다. 이 고개의 동쪽 산청 땅에 구형왕의 무덤이 있다. 그의 셋째 아들은 무력, 무력의 손자는 김유신이다. 어느 날은 안개였고 어느 날은 비였고 어느 날은 멈추었고 어느 날은 스쳤다. '지리산 가는 길'은 맥락 없이 자꾸만 이어지는 이름들의 길이다. 자꾸만 떠오르는 시간들의 길이다. 일상으로 돌아가면 또 감쪽같이 잊어버릴 이름들이다. 일상으로 돌아가면 가끔 생각날 시간들이다.

글·사진=류혜숙 여행칼럼니스트 archigoom@naver.com

■ 여행 Tip

12번 대구광주고속도로 함양IC에서 내려 톨게이트 앞 교차로에서 우회전해 함양 방향으로 간다. 주차장사거리에서 24번국도 남원 방향, 난평삼거리에서 지리산, 남원, 마천 방향으로 가다 '지리산 가는 길' 이정표 따라 좌회전해 1023번 지방도를 타고 가면 지안재 넘어 오도재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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