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남시론] 100년의 시간을 날아온 '물새발자국'

  • 이은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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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4-05-09 06:53  |  수정 2024-05-09 06:55  |  발행일 2024-05-09 제2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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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은경 한국스토리텔링 연구원장

지난 3월 '문학의 도시' 대구의 저력이 다시 한번 '발굴'됐다. 월북으로 잊힌 아동문학가 윤복진의 작품들이 처음으로 대중에 공개된 것이다. '동요의 귀환, 윤복진 기증 유물 특별전'에서다. 존재감 없던 지자체의 모처럼의 활약상도 놀랍고, 한낱 이데올로기 때문에 사장되었던 위대한 작품의 발굴도 기쁘다. 아울러 희미해진 분단의 아픔이 아직 진행 중이라는 사실이 슬프기도 하고. 만감이 교차하는 이 소식이 널리, 오래 퍼지기를 바라면서 몇 자 기록한다.

'해 저문 바닷가에 물새 발자욱/ 지나가던 실바람이 어루만져요/ 그 발자욱 예쁘다 어루만져요/ 하이얀 모래밭에 물새 발자국/ 바닷물이 사아르르 어루만져요/ 그 발자욱 귀엽다 어루만져요'(윤복진, 물새발자국)

주옥 같은 동요를 만들었던 윤복진은 6·25전쟁 중에 월북했다. 4대 독자였던 그는 월북하면서 고향 대구에 부모와 아내, 세 딸을 남겼다. 가족들은 평생 이사를 하지 않았고, 늘 대문을 열어놓고 지냈다. 그가 남긴 잡동사니 같은 손때 묻은 자료를 보면서 그리움을 삭이고 슬픔을 달랬다. 시절이 뒤숭숭할 때면 혹여 문제라도 될까 아궁이에 쓸어 넣었고, 그러고도 남은 유품을 고이 간직하고 있었다. 자칫 불쏘시개가 될 뻔했던 것들의 운명을 바꿔놓은 것은 대구시 문화유산과 담당자들이었다. 그 의미와 가치를 알아본 대구시 문화유산과 담당자들은 유족이 외롭고 힘들게 지켜온 유품의 가치를 세상과 공유하고 그 역사적 의미를 보여주고자 2년 넘는 시간 동안 헌신적인 노력과 열정으로 그들을 설득하고 기다렸다.

이게 뭐 대단한 일이냐고? 관점에 따라 다르겠지만, 사람은 빵으로만 살 수 없다. 유희만으로도 살 수 없다. 삶을 주도하는 뭔가가 있다. 정체성과 지향성은 그 사회나 사람들에게 중요한 좌표를 제공한다. 켜켜이 쌓이는 역사와 천재들의 위대한 업적은 세상살이의 기반이 된다. 특히 지역을 바탕으로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지역을 좀 더 의미 있고 가치 있게 만들 그 무언가를 끊임없이 만들어내야 한다.

유족이 긴 세월 아버지를 대신해 간직한 유품을 내놓는 일은 쉽지 않은 결정이었을 게다. 행여 상업적인 목적으로 이용당하지는 않을까, 아버지의 활동이 제대로 평가받을 수 있을까, 걱정과 의심을 거두지 못했을 것이다. 유족들이 기증한 350여 점의 자료 덕분에 우리나라 동요사와 6·25전쟁 당시 문화수도 대구에 대한 역사적 퍼즐도 한층 더 분명하게 맞춰지게 됐다. 놀라운 성과가 아닐 수 없다.

유족의 표현을 빌리면 "다 없어지고 찌꺼기만 남은 것들"이지만 그 의미는 놀랍다. '동요곡보집'은 1920년대 작사·작곡가의 작품 35곡이 수록됐는데, 처음으로 그 내용이 공개됐다. 그가 쓴 동요집 '중중때때중'과 '양양범버궁'은 존재는 알려져 있으나 책은 어디 있는지 알 수 없다. 다만 작곡집 '돌아오는 배'에 일부 수록되어 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을 뿐이었다. 오랜 세월 실물 여부조차 확인하지 못했던 작곡집 '돌아오는 배'도 이번에 세상에 공개됐다. 오는 11일에는 대구시 문화예술아카이브 공동기획으로 대구시립소년소녀합창단의 합창 공연도 예정되어 있다.'돌아오는 배'에 수록된, 윤복진이 가사를 쓰고 박태준이 작곡한 동요를 편곡해 최초로 발표하는 자리다. 어린이들의 꾀꼬리 같은 목소리로 100년의 시공간을 넘어 다시 불릴 윤복진의 물새발자국이 기대된다.

이은경 한국스토리텔링 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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