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수남의 되돌아본 향토문단.35] 소설가 최태응

  • 입력 2005-12-01   |  발행일 2005-12-01 제20면   |  수정 2005-12-01
어쩌다 원고료 받으면 향촌동으로
채만식에게 소설 배워…6·25때 대구 정착…작가 지망생들엔'하늘 같이 돋보이는 존재'
[이수남의 되돌아본 향토문단.35] 소설가 최태응
1997년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부인(오른쪽), 딸과 함께.

1930년대 한국 휴머니즘 문학의 기수로 일컬어지는 소설가 최태응은 '문장'에 단편소설 '바보 용칠이' '봄' '항구'로 24세에 등단했다. 16년 황해도 은율에서 태어난 그는 '해방공간'에서 이태준과 채만식을 만난다. 철저한 자유주의자인 채만식에 비해 이태준은 그 무렵 월북의사를 드러냈다. 최태응은 이태준이 그것을 실행에 옮기는 것을 목격한다. 채만식은 36년, 은율까지 내려가 최태응에게 소설지도를 해준 스승이요, 선배요, 형님 같은 존재였으나 6·25 직전 이리에서 폐결핵으로 49세로 병사하고 만다.

광복되던 그 해 10월 월남한 최태응은 50년, 6·25 발발 직후 서울에서 산전수전을 다 겪으며 맨주먹으로 피란와 대구에 정착한다. 당시 그는 30대 후반이었지만 향토의 작가 지망생에겐 '하늘 같이 돋보이는 존재'였다. 그에게는 부인과 딸 셋, 그리고 아들 하나가 있었다. 원고지만으로 생계를 잇는 어려운 삶을 피할 수 없었던 그는 중구 봉산동 소년원 뒤쪽에 있던 서정희의 집에서 살았다.

전란으로 모두가 힘겨워한 그때 서정희는 최태응을 집 본채와는 따로 떨어져 있는 협호(夾戶)에 살게 하면서 무언가 도움을 주려고 했다. 56년 부인과 사별한 그의 생활은 더욱 궁핍해졌다. 어쩌다 원고료가 들어오면 향촌동으로 나들이를 했다. 늘봄·백록다방에서 해지기를 기다렸다가 대폿집으로 향하곤 했다.

자그마한 체구의 채만식은 늘 지팡이를 짚고 다녔다. 키네마(현 한일극장) 건너편 옛 달성군청이 있던 곳의 늘봄다방에 최태응은 늘 자리를 지키듯 앉아 있었다. 작가의 꿈을 가진 윤장근·이규헌·임도순 등은 최태응 주위를 맴돌았다. 당시 매일신문에 장편소설 '낭만의 조각'을 연재하고 있던 최태응은 쓰지 않고는 안 되는 상황이었다. 그는 방바닥에 엎드린 채 원고를 써 나가나 장편을 끝내지 못했다. 몇 차례 신문사로부터 원고 독촉을 받다가 결국 연재 중단이라는 최악의 상황에 닿고 만다.

"만사휴의라는 말이 생각난다. 마치 사표와 같은 글을 써서 내던지고 죽어도 눈감을 수 없는, 내가 죽는다는 것은 얼마나 슬픈 일이냐. 허나 몇 배 더 죽음과는 거리가 먼 아내도 죽고 말았다."

그 무렵 최태응이 쓴 일기의 한 부분이다. 그 시기 그는 평화신문·자유세계·문화세계·문예 등에 닥치는 대로 작품을 발표하며 생계를 이어나갔다. "최태응은 유순한 데다 남달리 정이 많다 보니 따르는 여인도 많았다. 대구에서도 몇 사람의 여인이 주변을 서성거렸다. 그는 모성애 같은 여성본능을 자극하는 데가 있는 사람이었다"고 윤장근은 회상한다.

57년 경북문학가협회가 창립되고 백기만이 회장이 됐다. 사무국장 박훈산은 그 이듬해 격월간으로 하겠다는 포부를 갖고 '문학계(文學界)'를 창간했는데, 최태응은 여기에 단편 '사랑의 힘'을 발표했다. 이 작품은 최태응이 향토에 남긴 마지막 작품이다. "대구에서 잡지 한 권 내기 위하여 모든 것을 참고 견뎌야 하는 고충이 있었다"고 박훈산은 토로했지만, '문학계'는 창간호가 종간호가 되고 말았다.

56년 대구를 떠나 서울에서 생활하던 최태응은 79년 막내딸만 수원에 남겨두고 장남과 장녀, 그리고 차녀가 있는 뉴욕으로 이민간다. 그 이듬해 최태응은 샌프란시스코 변두리로 옮겼고 거기서 이보석씨를 만난다. 환갑을 넘겨 재혼한 그는 "두 식구 사는 데는 불편이 없는 오두막살이나마 하나 장만해 지내고 있다"며 지인들에게 근황을 알리기도 했다.

96년 권영민 서울대 교수가 서울 태학사에서 100여 편의 작품을 담은 '최태응 문학전집'(전3권)을 발간했다. 그리고 그 해 6월 샌프란시스코의 현지 한인신문사가 출판기념회를 마련했다. 17년간 현지에서 문학지도를 해온 최태응은 출판기념회에서 여러 문인들에게 "향도요 등불"이라는 평을 받았다.

"원래 건강이라고는 등 돌리고 살아온 터수에 스스로 돌아봐도 엄청난 연륜에 어처구니가 없는데, 80고개에 이르자 팔 다리가 말을 안 듣고 가다가 견디기 어려운 통증이 일면 한동안씩 중환의 꼴인지라."

98년 5월 임도순에게 전집과 함께 보낸 편지에 이렇게 쓴 최태응은 3개월 뒤 샌프란시스코에서 별세하고 만다.

[이수남의 되돌아본 향토문단.35] 소설가 최태응
최태응이 단편 '사랑의 힘'을 발표한 '문학계' 창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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