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춘호 기자의 푸드 블로그] 오너셰프를 찾아서 - ‘돌고래’ 매운탕집 대표 이상숙씨

  • 이춘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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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4-07-04   |  발행일 2014-07-04 제41면   |  수정 2014-07-04
화가를 꿈꾸던 그녀, 붓 대신 매운탕 국자를 든 까닭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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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가의 꿈을 접고 달성군 옥포면 기세리 옥연지 옆에서 30여년 세월 지속됐던 돌고래 매운탕 가업을 9년전부터 잇기 시작한 이상숙 대표. 지난해 옥연지에 새로운 길이 나는 바람에 반송리로 이전한 돌고래의 새로운 출발을 위해 메뉴 리모델링에 착수했다.

한국발 강촌 매운탕집의 역사는 사실 끝이 났다.

그 시절 매운탕집은 모든 식재료를 가능한 한 주인이 직접 해결했다. ‘자기표 맛’이 있었다. 경상도 매운탕은 ‘고추장맛’, 전라도 매운탕은 ‘된장맛’이 지배적이었다. 어느 날부터 강이 오염돼 사람들은 더 이상 강에서 직접 잡은 고기를 멀리했다. 양식장이 득세할 수밖에 없었다. 시대에 부응하기 위해 강촌 매운탕집도 자체 수족관을 갖게 된다. 식자재상을 통하면 사철 싱싱한 식재료를 공급받을 수 있었다.

1990년대 초 대구시 달성군 다사읍 부곡리 대구도시철도 2호선 마지막 역인 문양역 근처에서 한국 매운탕 역사를 바꿔놓는 매운탕집이 탄생한다.

손중헌 논메기매운탕이다. 90년대 들면서 도심 곳곳에 메기매운탕 명가가 생겨난다. 예전에는 잉어와 붕어가 인기였지만 메기매운탕으로부터 습격을 당한다. 마을 토박이 손씨가 우연한 기회로 논메기매운탕을 개발하게 된다. 농가소득을 찾다가 메기 양식장을 차린 것. 유료낚시터에서 건져 올린 메기로 요리를 했다. 손씨는 매운탕 요리가 뭔지도 몰랐다. 그냥 촌스럽게 메기탕을 끓였는데도 낚시꾼들 사이에서 입소문이 난다. 나중에 영업 허가를 내 간판을 걸고 메기매운탕 영업을 시작한다. 현재 논메기매운탕마을 문산번영회도 생겼다. 부곡·문양리에 무려 30여개의 논메기매운탕집이 산재해 있다. 문양역 앞 청국메기매운탕 주인 최진곤씨는 90년대 초 지역에서 처음으로 전라도 양식 메기를 대구·경북에 유통시킨다.

70년대 이전까지는 강창이 대구 매운탕1번지. 70년에 강창교가 생기고 물이 오염되면서 매운탕 거점은 강 건너 달성군 다사읍 강정으로 옮겨간다. 금호·경산·다사·대동·대구·낙동식당, 부동댁 등이 전성기를 맞는다. 물론 화원유원지와 옥포 용연사 아래 옥연지 주변에도 매운탕집이 즐비하게 들어선다. 이 밖에 청천·동촌의 매운탕도 유명했다. 80년대 초중반 남구 대명동 즉결재판소 근처의 향어회 타운이 향어 붐을 80년대 말까지 끌고 간다.


◆ 옥연지 옆 매운탕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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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2년 달성군 옥포면 기세리 옥연지 옆에서 오픈한 돌고래 매운탕. 옥연지 둑 높이기 국책사업으로 인해 지난해 철거되고 근처 반송리로 이전했다. 사진은 철거 전 돌고래 입구 전경.

달성군 옥포면 기세리 옥연지.

일제 때 조성된 이 저수지는 벚꽃길과 용연사 등으로 인해 대구 인근에 숨어 있는 드라이브 코스로 손꼽혔다. 특히 그 저수지에는 도서방, 옥포식당, 돌고래, 강창, 별천지, 만리장성, 물가식당 등 7개의 유명 매운탕집이 운집해 있었다. 하지만 2010년 12월 매운탕촌에 ‘비보(悲報)’가 날아든다. 한국농어촌공사의 옥연지 둑높이기 국책사업 때문에 매운탕집이 이사를 가야만 했다.

돌고래 매운탕집 딸인 이상숙씨(46).

그녀는 원래 매운탕으로부터 가능한 한 멀리 도망가려고 했다. 유명한 화가가 되기 위해 대구대 회화과에 입학했다.

“운명이라는 게 참 묘해요. 저는 어렸을 때부터 매운탕집 딸이란 소리가 그렇게 듣기 싫었어요. 대학에 들어가면서 매운탕과도 인연이 멀어지는 줄 알았는데 결국 어머니의 대를 이어 2대 매운탕집 사장이 되고 말았어요.”


“어렸을 땐 ‘매운탕집 딸’
소리 너무 듣기 싫었죠”
나이 들며 운명이라 여겨
어머니 완고한 반대에도
식당 이어받아 새로운 도전
조미료 밴 ‘옛날 맛’ 대신
오랜 연구끝 굵은 소금 볶아
매운탕 본래 맛 되살려


옥연지 매운탕촌은 60년 어름 형성된다. 초창기엔 못에서 직접 그물로 고기를 잡아 탕을 끓여 팔았다. 80~90년대는 호황을 누렸다. 그런데 2000년대 전후 대구 도심 곳곳에 다양한 먹을거리가 생기면서 극도의 불황기를 맞기 시작한다. 하지만 82년 문을 연 그녀의 어머니(이정임)는 천직을 버리지 못했다. 특히 돌고래는 풍광이 빼어나게 좋았다. 하절기엔 거기서 윈드서핑까지 가능해 사진작가들에게 사랑받는 포토존이 되기도 했다. 후발주자였지만 2000년 이후 옥연지 매운탕촌에서 선두주자가 된다.

2013년 10월30일 돌고래도 문을 닫는다. 기세리에서 근처 반송리 59-2번지로 이전한다. 50년 넘은 매운탕촌은 숱한 사연을 남기면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말았다. 현재 옥연지 옆에는 길 건너에 자리한 옥포식당만 그 시절을 추억하고 있다.


◆ 매운탕 끓이는 미술학도

“이전은 어떤 면에서는 많은 장점을 안고 시작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 많은 고충이 따랐습니다.”

어머니는 몇 날 돌고래의 미래에 대해 고민을 한다. 식당을 접을까, 아니면 힘들어도 계속할 것인가. 어머니는 ‘여성이 감당하기 힘든 이 식당을 딸에게 물려줘선 안된다’고 결심한다. 하지만 딸의 생각은 청년기와는 달리 거꾸로 돌아가고 있었다. 어릴 때 생각과 달리 어머니가 평생 매운탕을 팔아 자신을 양육하고 대학까지 보낸 그 일을 가장 싫어하면서도 동시에 운명적으로 사랑할 수밖에 없었다. 애정과 증오가 함께 녹아들어가 있었다. 2005년부터 이씨는 어머니를 옆에서 돕는다.

“어머니가 생각하는 매운탕 맛과 제가 생각하는 것이 너무 달랐어요. 어머니는 맛을 내기 위해 자꾸 화학조미료에 의존했어요. 저는 제발 조미료를 넣지 말라고 당부했어요. 어머니는 그걸 안 넣으면 아무런 맛도 나지 않는다면서 조금이라도 넣으라고 했어요. 저는 어머니 앞에서는 그렇게 한다고 해놓고 실제로는 안 넣은 경우도 많아요. 매일매일이 전쟁이었어요. 어머니 옆에서 이것저것 많은 걸 배웠어요. 도와준다고 해놓고 실은 제가 매운탕에 최면이 걸리고 있었던가봐요.”

어머니는 딸이 매운탕집을 이어받는 것에 결사반대였다. ‘유명한 화가가 되어야지, 무슨 매운탕집 사장이야.’

하지만 결심이 선 딸은 이미 시위를 떠난 화살이었다.

허허벌판에 새로운 식당을 지었다.

고생 한 번 안 해봤을 것 같은 해맑은 그녀의 자태를 보면서 다들 이전할 돌고래의 앞날을 걱정하기 일쑤였다.

“장사하는 게 어렵다고 하지만 새로 집 짓는 것에 비하면 조족지혈이더군요. 기존 세입자와의 갈등, 새로 이전할 식당에 대한 지인들의 지나친 참견, 맘대로 굴러가지 않는 실내 인테리어 등 하루에도 몇 번 식당을 그만둘까 싶더라고요.”

어떤 주민은 돌고래 상호가 너무 촌스럽다며 고치라고 권유했다. 하지만 그녀는 예전 상호에 자긍심을 갖고 옛 간판을 그대로 사용했다. 돌고래 로고도 만들고 상표등록까지 해뒀다.

‘매운탕 잘 끓이는 것도 결국 그림 잘 그리기와 진배없다’고 믿는다. 맘이 편했다. 비로소 각종 어려움이 ‘색다른 경험’으로 다가섰다. 이젠 맛 하나로 승부가 나는 세상이 아니다.

자주 그런 기도를 한다. ‘손님 많게 해 주세요’란 기도 대신 ‘좋은 사람과 행복과 따뜻한 마음이 가득한 식당이 되게 해주세요’라고 기도한다. 양념과 조미료보다 더 중요한 것이 사장과 직원의 ‘친절미소’라고 생각했다.

가족단위 손님을 위해 족구장도 만들었다. 돌고래의 전통이 주위의 빼어난 자연과 어우러지게 하려면 족히 5년 이상의 시간이 걸릴 것 같았다. 어머니는 솔직히 입맛만 즐겁게 하려고 했다. 하지만 세상은 달랐다. 이씨는 제2대 사장으로 달라진 세상에 맞는 마케팅전략을 구사한다. 입은 물론이고 눈과 맘까지 즐겁게 해야 한다는 주의다.


◆ 나만의 매운탕 맛 찾아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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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추장 양념으로 요리한 장어구이.

그녀는 어머니의 매운탕 맛을 혁신했다.

‘선인도 시대를 따라야 한다’고 했다. 이젠 과도한 화학조미료맛은 반드시 퇴출될 것이라고 믿었다. 매운탕 맛의 본질이 감칠맛이 아니고 담백함과 ‘흙내음(土香)’이 전면으로 나와야 된다고 봤다. 예전에는 칼칼하게 맵고 적당히 짠맛이 나면 잘 팔렸다. 이젠 그런 세대는 사라지고 있다. 앞으로 단골층은 다른 맛을 원할 것이다. 그래서 매운탕과 장어 요리에 이어 항암효과가 남다른 잎새버섯이 들어간 잎새한방백숙도 개발했다.

그녀가 생각하기에 아직 매운탕 맛은 계속 진화시켜야 된다고 본다.

“메기의 기름기가 철마다 다르기 때문에 기름기가 많아지는 철에는 소스를 가볍고 담백하게, 기름기가 부족한 시기에는 조금 무겁게 간을 조정해야 됩니다. 단골이 이구동성으로 외치는 ‘옛날맛’은 사실 화학조미료에 길들여진 맛이라고 봅니다. 옥연지뿐만 아니라 전국 대다수 매운탕은 이미 선택의 여지 없이 화학조미료가 전제로 된 감칠맛 매운탕 맛입니다. 저는 그것에 반기를 들고 싶어요.”

어머니는 매운탕 특유의 떫은맛을 잡기 위해 화학조미료를 즐겨 사용했다. 그녀는 조미료 없이 그 맛을 잡기 위해 여러 가지 시험을 해봤다. 굵은 소금을 볶아서 사용해 본 결과 화학조미료 없이 떫은맛을 잡을 수 있었다. 그 이후부터 굵은 소금을 볶아서 모든 음식에 사용하고 있다. 기본맛과 비린내는 토종된장으로 잡으며, 매운탕 매운맛의 특성상 고춧가루만 많이 넣으면 텁텁할 수 있어 육수를 만들 때 청양고추, 마른새우, 밴댕이, 멸치, 표고버섯 등도 사용한다.

기자도 그 국물을 한 점 떠 먹어봤다.

경상도 매운탕이 아니란 판단이 들었다. 뭐랄까, 전주시 한옥마을 옆 한벽루 매운탕촌의 오모가리(뚝배기)탕에서 느껴지는, 된장을 베이스로 한 토장국 같은 맑으면서도 묵직한 탕이었다. 일반 냄비 대신 뚝배기를 사용하면 더 진국일 것 같았다. 조금 더 라인을 다듬으면 제대로 된 경상도 버전의 전라도 뚝배기매운탕이 탄생할 것 같았다.

장어구이도 천편일률적인 간장소스 양념에서 벗어났다. 그녀는 과감하게 고추장양념으로 선회했다. 직접 담근 고추장을 1년 이상 숙성시켜 사용한다.

요즘 쿨한 젊은이들이 약속이나 한 것처럼 커피숍 오픈에 열을 올리고 있다. 그런 점에서 그녀의 결심은 자못 ‘독립군적’이다. (053)616-5577 옥포면 반송리 59-2

이춘호기자 leekh@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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