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혜숙의 여행스케치] 영천의 ‘무릉도원’ 임고면 선원리

  • 류혜숙 객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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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4-11-14   |  발행일 2014-11-14 제38면   |  수정 2014-11-14
들리시나요? 갈대밭이 연주하는 비파소리가
[류혜숙의 여행스케치]  영천의 ‘무릉도원’ 임고면 선원리
선원교에서 본 자호천의 갈대밭. 임고면 일대의 자호천변은 모두 갈대밭으로 장관을 이룬다.
[류혜숙의 여행스케치]  영천의 ‘무릉도원’ 임고면 선원리
선원마을 초입의 언덕에 자리한 함계정사. 왼쪽의 큰 은행나무 앞에 송원재가 위치한다.
[류혜숙의 여행스케치]  영천의 ‘무릉도원’ 임고면 선원리
환구 세덕사. 호수 정세아와 그의 아들 백암 정의번을 모신 사당이다.
[류혜숙의 여행스케치]  영천의 ‘무릉도원’ 임고면 선원리
선원동철불좌상. 고려 초기의 것으로 추정되며, 보물 제513호로 지정되어 있다.


자호천의 시작은 보현산이다. 천은 남쪽으로 내려와 커다란 영천호를 이루고 다시 남하한다. 중류의 끝 즈음, 또는 하류의 시작 즈음, 작은 물줄기인 선원천이 스윽 자호천으로 스며들어 함께 금호강을 향해 간다. 그즈음의 자호천은 물보다 갈대가 많다. ‘갈대의 강’ 금호강의 본모습을 보는 듯하다. 물길을 사이에 두고 왼쪽엔 너른 밭이, 오른쪽엔 나지막한 산으로 호위된 마을이 자리한다. 산수는 선경이요, 마을은 선향(仙鄕)이니, 옛사람은 이곳을 무릉도원이라 하여 ‘선원(仙源)’이라 불렀다.


◆ 영천의 무릉도원, 선원1리 선원마을

마을의 배면에는 학산이 둘러서 있고 산자락엔 송림이 울창하다. 마을의 바로 앞에는 선원천이 흐르고, 그 남쪽에 자호천이 나란하다. 주변은 온통 사과밭이고 복숭아밭이다. 원래 이름은 송내(松內)였다. 송내를 선원이라 부른 이는 조선 인조 때 사람 정호례다. 그는 포은 정몽주의 방손이고 호수 정세아의 장손이며 병자호란 때 인조의 수레를 호위해 남한산성으로 들어간 무관이었다. 그 후 여러 번 관직에 제수되었으나 사직과 사양을 거듭하여 고향으로 돌아온 이였다. 정호례의 입향 이후 지금까지 마을은 영일정씨가 주성인 집성촌이다.



정호례의 손자인 함계 정석달은 학문은 깊었으나 벼슬에 나가지 않고 평생 공부에 매진한 인물이다. 그는 마을에 강학을 위한 정자를 지으려 했다. 숙종 28년인 1702년, 그가 적은 자금으로 우선 지은 것이 안락재였다. 결국 그의 바람은 손자인 죽비 정일찬에 의해 1779년에 이루어진다. 그것이 마을 입구의 언덕 위에 자리한 함계정사다.



건물이 자리한 언덕은 작은 벼랑이다. 옛날에는 그 아래에 소소한 물줄기가 흘렀다 한다. 지금은 언덕길 옆의 조그마한 물웅덩이가 옛 모습을 찾게 한다. 함계정사의 위쪽에는 송원재가 있다. 숙종 때 통덕랑에 오른 정중보를 기려 후손들이 건립한 재실이다. 자물쇠가 잠겨 있지만 담장 너머로 바라보는 데 어려움이 없다. 송원재 앞에는 은행나무 한 그루가 하늘을 찌를 듯 서 있다. 노란 은행잎이 고샅길을 뒤덮어 잠시 걷는 길은 더없이 고즈넉하고, 시야는 확 트여 가슴이 시원하다.



◆ 고택으로 가득한 선원마을

마을길을 따라 들어가면 왼쪽에 담장 높고 으리으리한 한옥이 있다. 1863년에 건립된 송고헌 고택이다. 지금은 도곡 정점교 선생이 다완을 굽는 ‘도곡요’다. 그 옆에는 일제강점기 때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는 정동우 가옥이 자리한다. 빈집으로 방치되어 있었다는데 대문간이 어수선하여 들여다보니 보수공사 중이다. 오른쪽 언덕 위에는 학파정(鶴坡亭)이 서있다.(디지털영천문화대전에 표기된 ‘학파정(學坡亭)’은 잘못된 것이다.) 고종 때의 학자인 학파 정치구가 세운 것으로, 방치되어 괴괴해 보이지만 찬찬히 뜯어보면 흠난 곳이 없다. 주변만 잘 정리하면 그 모습이 참으로 고아할 것이다.



마을의 가장 안쪽에는 종가인 정용준씨 가옥이 있다. 1725년 조선 영조 때 지어진 것으로 본채와 정자, 연못이 어우러져 있다. 이병헌과 수애가 주연을 맡았던 2006년 영화 ‘그해 여름’에 등장하면서 유명해졌다. 종가와 가까운 곳에 송림인 ‘도래솔’이 있고, 숲 속에 선조들의 묘소가 있다. 종가 아래로는 괴헌고택, 정기인씨 가옥, 정경식씨 가옥, 동연정 등 고택과 근대한옥, 정자와 재실이 가득하다. 6·25전쟁과 태풍 등으로 많은 집들이 소실되었고 근래에는 곳곳에 양옥이 들어섰다. 그러나 마을 전체에 스며있는 고색은 처사들의 은거지와 같은 느낌을 준다. 사과를 따는 아저씨도, 마른 들깨 단을 지고 가는 할머니도, 버선발로 낟알을 펼치는 아줌마도, 모두 심신을 닦는 처사들로 보인다. 지금이 조선시대였다면, 마을은 성리학적 이상향을 목표로 한 마스터플랜으로 보였을 것이다.



◆ 선원2리 대환마을

선원마을의 서쪽에 선원2리인 대환마을이 자리한다. 뒷산이 마을을 고리모양으로 감고 있어서 환고(還皐) 또는 대환(大還)이라 한다. 영천에서 살기 좋은 세 곳이 ‘일 자천, 이 환고, 삼 평호’인데, 대환이 바로 이곳이다. 마을 앞 큰길에서 한눈에 쏙 들어오는 아담한 마을이지만 도도한 풍취가 감돈다.

마을의 중앙에는 환구 세덕사가 자리한다. 세덕사는 임진왜란 때 영천 의병장이었던 호수 정세아와 그의 아들 백암 정의번을 모신 사당이다. 맞은편에는 정의번과 그의 아들 정호례를 추모하여 세운 충이당(忠怡堂)이 있고, 충이당 아래에는 조선 후기 유학자인 학고 정일진과 그의 아들 교와 정하준을 추모하는 환고정사가 있다. 세덕사 아래에는 환구서원이 최근에 건립되었다.



마을의 가장 안쪽에는 절집 선정사가 있다. 3칸 규모의 대웅전은 최근의 것으로 보인다. 원래 이 마을에는 고려시대 굉귀사라는 큰 절이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임란으로 절집은 불타고 모시던 철불만이 남아 길가에 버려졌다 한다. 그리고 오랜 시간이 흐르는 동안 철불의 손이 사라졌고, 불신은 흙에 묻혔다.



철불이 언제 발견되었는지는 정확하지 않다. 1860년경 마을 사람들의 꿈에 나타나 출토되었다고도 하고, 광복 전 밭 갈던 농부가 찾았다는 말도 있다. 마을 사람들은 막연히 미륵불로 여겼다 한다. 그러던 어느 날 사람들의 꿈에 철불이 나타난다. “나는 미륵이 아니라 석가이다. 천수(天水)를 피하게 해 달라.” 이후 초가를 지어 모셨고 현재 ‘선원동 철불좌상’은 보물 제513호로 지정되어 선정사 대웅전에 모셔져 있다.



비탈진 마을길에서 바라본다. 기름진 고양들이 넓게 펼쳐져 있고 자호천은 은빛으로 부서진다. 갈대밭이 비파의 소리를 내니, 들의 수목들이 돌풍처럼, 새 떼처럼, 이파리를 날린다. 그러나 뒷산은 너무도 울창하여 흔들림이 없고 마을은 은은하게 따습다. 대환마을은 산수의 환(環)에 안긴 한 줌 햇살의 현현, 아담해도 깊고 새것들조차 그윽하다.

류혜숙여행칼럼니스트 archigoom@naver.com

여행정보

포항 가는 20번 고속도로를 타고 북영천IC에서 내려 영천댐 방향으로 가면 된다. 28번 국도를 이용할 경우 임고 교차로에서 69번 지방도를 타고 영천댐 방향으로 간다. 임고면소재지 지나 양항교를 지나면 오른쪽에 선원동 버스 정류장이 있고 맞은편 과수원길 안쪽으로 선원동 철불좌상 이정표가 있다. 과수원을 통과해 자호천을 건너면(대환교) 바로 앞에 선원2리 대환마을이 한눈에 보인다. 마을 앞길을 따라 동쪽으로 조금 가면 선원1리 선원마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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