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혜숙의 여행스케치] 합천 정양늪

  • 류혜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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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5-01-30   |  발행일 2015-01-30 제38면   |  수정 2015-01-30
1만 살 그곳…숨을 죽인 땅에도 생명이 약동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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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 1㎞의 황톳길에서는 정양늪의 새들을 비교적 가까이에서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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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 1만년 전 후빙기 때 생성된 합천의 정양늪. 황강의 지류인 아천천의 배후 습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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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재 데크. 입구 쪽인 늪의 북쪽 가장자리를 따라 500m가량 설치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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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양늪의 남쪽 숲과 수로. 오른쪽에는 농지가 펼쳐지고 아천천이 흐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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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천천을 가로지르는 징검다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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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양늪 생태 전시관. 2층은 전망대 구실을 한다.


겨울 늪에서 보는 것은 새들이다. 식물이 무성한 계절의 늪은 너무 눈부시어 살아 움직이는 것을 포착할 수 없다. 그러나 겨울 늪은 살아서 요동치는 것들, 생명의 시퍼런 고동을 차가운 해부실처럼 열어 보인다. 그 모습에서 경건한 슬픔을 느낀다. 그것은 이미 새들은 떠나기 위해 이곳에 머문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한때 100㏊나 되었던 늪
1988년 합천댐 준공 후
40㏊로 줄어들어
수위 떨어지고 매립되고
쓰레기까지 쌓였다가
정비 거쳐 생태공원 부활
가장자리 한 바퀴 3.2㎞

◆ 1만년 전부터 그곳에 있어 왔다

대구에서부터 합천으로 진입하면 언제나 그 커다란 황강의 물줄기와 풍성한 모래사장에 온전히 사로잡혀서 다른 건 볼 수 없었다. 강을 벗어나면 영험한 산이 있었고, 또 거기에는 오래된 절집이 있었기에 언제나 경주마처럼 바빴다. 강변과 산 아래는 보아도 보이지 않았다. 황강의 배후에 낮은 산으로 둘러싸여 있는 늪을 발견한 것은 지난해다. 발견이 아니라 이제야 비로소 보게 된 것이라는 게 맞겠다. 조류인플루엔자 확산 방지를 위해 출입이 통제되어 있던 늪은 이제 온전히 개방되어 있다. 합천의 정양늪이다.

약 1만년 전, 최종 빙기 이후 지구의 기온은 온화해졌고 해수면은 상승했다. 하천의 침식 기준면인 해수면이 상승하자 하천의 퇴적작용이 활발해지기 시작했다. 황강의 지류인 아천천 역시 퇴적에 의해 수위가 높아졌고, 범람하여 만들어진 것이 바로 정양늪이다. 바다로 가기 위한 하천 스스로의 놀라운 작용 중 하나가 늪인 것이다. 한때는 최대 100㏊ 정도의 습지였지만 1988년 합천댐 준공 이후 약 40㏊로 크게 줄었다고 한다.

댐이 만들어진 이후 정양늪의 수위는 낮아졌고, 황강의 수량이 감소되면서 늪은 더욱 육지화되었다. 인위적인 매립이 행해지기도 했고, 쓰레기가 쌓여갔고, 수질악화가 가속되었고, 그결과 습지와 늪으로서의 모습은 사라져갔다. 2007년부터 2011년까지 5년에 걸친 대대적인 정비가 진행되었다. 그리고 현재 정양늪은 30여종의 어류, 20여종의 곤충, 40여종의 조류, 10여종의 포유류, 멸종 위기종인 모래주사, 큰기러기, 말똥가리, 금개구리가 살고 있는 생태 공원으로 다시 태어났다.

◆ 정양늪 생명길 한 바퀴 3.2㎞

주차장에 서면 정면에 육각정이 쭈뼛 훤칠하다. 오른쪽에는 정양늪 생태 전시관이 자리한다. 육각정 앞으로는 정양늪의 수면 위로 만들어진 나무 데크가 멀리까지 이어져 있고 전시관 앞쪽으로는 황톳길이 시작된다. 어느 쪽으로든 출발해 늪의 가장자리를 따라 한 바퀴 걷는 길이 3.2㎞ 정도다.

황톳길을 걸어간다. 군데군데 벤치와 조류탐조대가 설치되어 있다. 무리를 지은 새를 쉽게 볼 수 있는 길이다. 오른쪽에는 국도가 나란하다. 간간한 소음에 익숙해진 탓인지 새들은 사람의 걸음에도 쉽게 놀라지 않는다. 정양늪을 찾아오는 철새는 수천마리, 개체수는 나날이 증가하고 있다고 한다. 관찰되는 새는 큰기러기, 청둥오리, 말똥가리, 쇠오리, 중대백로, 물닭, 논병아리, 왜가리, 고니, 흰 뺨 검둥오리 등이다.

늪의 남쪽 부근에 다다르면 아름다운 늪지대의 숲과 곡진 수로를 만난다. 정양늪과 아천천의 접경지대다. 물은 얕고 맑다. 물속에서 썩어가는 식물들의 유해와 그들을 품은 검은 흙이 훤히 보인다. 오른쪽으로는 농지가 펼쳐져 있다. 기름진 흙내가 바람에도 흔들리는 습지에 깃든다. 천과 늪을 가르듯, 길을 잇는 징검다리를 건너 조금 가면 정양리 하회마을 입구다. 그즈음에 장군주먹바위가 있다. 정양늪을 사이에 두고 신라와 백제가 대치했던 시절, 신라의 장수가 진지를 둘러보다 미끄러져 꽉 잡은 바위란다. 장군의 주먹 자국이 바위에 있다는데 잘 보이지는 않는다.

여기서부터는 토사길이다. 약 1.7㎞의 길이 흙과 모래로 이뤄져 조성이 아닌 자연 그대로의 맛이 난다. 토사길의 끄트머리에서 다시 한 번 더 징검다리를 건너면 나무 데크에 오른다. 정양늪의 북쪽 가장자리 부근이다. 늪과 육지의 계면에는 버드나무가 길게 군락을 이루고 있다. 버드나무와 나무 데크 사이에는 정수식물과 부엽식물, 자라풀 등이 산다. 사각의 하얀 칸막이는 보기 드문 수생식물의 집이다.

소리 없이, 살금살금, 조심스럽게 숨죽인 내 걸음에 새들이 멀어진다. 서쪽 하늘에서 커다란 날개를 펼친 새들이 나선형으로 휘- 날다 촤-악 습지의 수면을 긁으며 내려앉는다. 오랜 시간이 만들어낸 늙고 늙은 이름, 늪. 늪은 후빙기 이후 신석기인들부터 오늘의 사람까지 모두를 경험했을 것이다. 바라건대 지금 너는 몹시도 아름다우니 네가 기억하는 나쁜 인상은 모두 지워버리길.

여행칼럼니스트 archigoom@naver.com

☞ 찾아가는 길

88올림픽고속도로 고령IC로 나간다. 안림삼거리에서 합천, 해인사 방면으로 가다 매촌 교차로에서 진주, 합천쪽으로 간다. 자릿재 터널을 지나 합천대로를 따라 가다 합천대교를 건너 합천교차로에서 우회전, 정양교차로에서 좌회전해 조금 가면 왼쪽에 정양늪 생태공원 주차장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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