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태영의 포토 바이킹 .19] ‘청년’의 흔적을 찾아가는 대구 골목 라이딩

  • 인터넷뉴스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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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5-11-13   |  발행일 2015-11-13 제40면   |  수정 2015-11-13
동인동 삼익맨션을 지나갈 땐 ‘그대에게’를 노래한 신해철의 포효가 떠오른다
(신해철의 막내 삼촌이 살았던 곳…신해철의 삼촌은 필자와 인연이 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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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해철의 할아버지와 작은 삼촌이 살았던 삼익맨션 가는 길(동덕로 38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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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세에 대구에 와 큰 업적을 남긴 성모당의 드망즈 주교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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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학생은 쏙 빼고 남학생만 기념하는 2·28기념회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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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덕동 벽화골목서 만난 자전거 수제작·수리 전문 사회적기업 ‘큰구름’의 김장근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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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태일 열사 생가 골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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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성시장 굴다리 밑을 지나가는 라이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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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일아침 김광석 벽화거리는 붐비지 않아 라이딩하기에 좋았다.



내 청춘의 문장엔 윤동주 시인의 ‘사랑스런 추억’에 “동경 교외 어느 조용한 하숙방에서, 옛 거리에 남은 나를 희망과 사랑처럼 그리워한다. 오늘도 나는 누구를 기다려 정거장 가차운 언덕에서 서성거릴 게다. … 아아 젊음은 오래 거기 남아 있거라”를 심장의 언어로 새기며 청년의 투혼이 흙바람 부는 그곳으로 향한다. 청춘의 자취를 느낄 수 있는 곳을 점으로 찍어 이어보니 이면도로(대로변의 큰 길과 연결되어 있는 좁은 길)를 따라 살방살방 안전하게 라이딩할 수 있는 그림이 그려졌다. 청년의 자취를 찾아가는 포토바이킹을 위해 길을 나서면서 ‘내가 사는 경북대 서문은?’이라는 생각이 급습했다. 그래, 여기에 그 이름을 불러줄 수 없는 젊음이 웅성거렸겠지. 역사란 무자비하게 잔인해서 기록될 가치에만 지면을 내준다. 산업기술 혁신으로 아무리 종잇값이 바닥에 떨어졌다 하더라도 역사의 한 줄은 권력자 의도대로 첨삭되진 않는다. 형장에서 “여기가 어디야? 무슨 일이야?”라면서 “언젠가는 모든 것이 밝혀질 것이다”라는 한 마디 말을 남기고 서른 살의 꽃다운 나이에 생을 마감한 인혁당사건의 여정남 열사를 떠올렸다. 그리고 대구 남아의 투혼을 대한에 떨친 여정남 열사 기념사업을 위해 들어왔다가 가을날 낙엽처럼 종적을 감춘 이상률 형을 그리게 되었다. 그 이름 한 번 불러주는 것으로 그가 대구에 바친 젊음과 하고 싶었던 꿈들을 기억하고 싶다.

대봉동의 한양 가든테라스는
1980년 37세 건축가 김석철이
도시형 복합주거공간 꿈 담아

봉산문화관 근처 대구초등은
요절한 인권 변호사 조영래가
서울로 전학가기 전 다닌 학교

신천을 가로지르는 다리 밑은 자전거가 출발하는 약속장소다. 라이딩은 동선이 생명이다. 끊기면 대오가 흩어져 흐름이 끊긴다. 자전거를 위해 건설한 도로 제로의 나라에서 자동차 식민생활로부터 자유롭진 못하다. 청춘의 꿈을 찾아가는 이 길이 칠성시장. 아침 7시30분 경대교 아래에서 일행과 만나 곧장 대구 음식을 책임지고 있는 칠성시장으로 직행. 과일·원예를 거래하는 삼성시장을 구경하고는 건너편에 있는 노점수제비 가게에서 머슴밥 한 그릇 하고 동인 꽃시장으로 향했다. 김원일의 소설 ‘마당깊은 집’에 나오는 새로 단장한 칠성시장 굴다리를 오가는 아침 자전거 행렬은 힘차 보였다. 굴다리에서 우회전, 감동의 박 사장 가게에 들러 모처럼 커피 한 잔하려고 찾았으나 문을 열지 않아 돌아 나와야 했다. 서진하여 대구역 인근 번개시장의 아침풍경을 보고 싶었는데, 번갯불에 콩 구워 먹은 듯 장보러 온 손님들은 빠져 나가고 없었다.

다음 코스는 가수 신해철의 할아버지가 살았던 동인동 삼익맨션. 대구시청 독수리상 앞에서 새 자전거 입수 기념 사진을 찍고 동인치안센터 쪽으로 이동했다. 간판이 안 보이는 자매집을 지나 사거리 세 블록 지나 좌회전 들어가면 대구아파트 역사를 한눈에 볼 수 있는 동인아파트와 고급아파트의 효시였던 삼익맨션을 둘러볼 수 있다.

삼익맨션에 대구의 부자들이 많이 살았겠지만 가수 신해철의 할아버지가 산 곳이다. 대구에 벼슬자리 얼마 안 되던 시절 군수를 지내 동네 사람들 입에 신 군수로 불린 그의 할아버지는 평산신씨 표충재종중 도유사를 지냈다. 같은 집에 살며 부친을 모시고 산 그의 막내 삼촌 표현에 따르면 성격이 매우 꼬장꼬장했던 분이었던 것 같다. 의료사고로 생명단축의 비극을 맞았던 가수 신해철은 동인동과 할아버지를 찾아온 기억밖에 없겠지만, 그의 삼촌과의 진한 인연으로 동인동을 지나갈 땐 ‘그대에게’를 노래한 신해철의 포효가 떠오르곤 한다. “예예예 예예예예예~” 신해철의 초창기 로드매니저를 해줬다던, 고인이 된 현갑 형님 생각은 더하다.

이면도로 라이딩을 하면서 도로명 주소 부여가 얼마나 졸속으로 지어졌는지를 알게 되었다. 역사를 망각한 새 도로명 사업은 숫자매김에 원칙과 질서가 없어 길잡이 역할을 할 수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동인아파트에서 동문시장, 동대구신협 쪽으로 난 국채보상로 151번 길을 따라 횡단해서 500여m 가면 신천대로 오케전업사와 빙그레 골목 안에 청년사회적기업가 육성 과정을 거친 ‘큰구름’의 김장근 대표가 자전거 수제작 및 분해조립 서비스를 하며 청년사회적 기업가의 꿈을 키워가고 있다. 담장허물기를 필두로 대구마을만들기 운동이 시작된 유서 깊은 삼덕동 골목에서 희망자전거 한 사람을 보고 간다. 삼덕동의 벽화들은 낡고 멍든 모습으로 역사성을 간직하고 있었다. 이제 달구벌대로를 건너면 방천시장 이름을 리뉴얼한 김광석벽화골목과 만난다. 시장은 문전성시를 이루지 못했으나, 가수 김광석 벽화가 떠서 프로젝트를 살린 이 거리에선 이름 없는 미술가들의 손길에 머리 숙이게 된다. 그런 한편 그들은 물론 김광석이 원하지 않았을 방향으로의 상업적 성공은 문화예술의 저력이 느껴짐과 동시에 문화예술이 서민의 삶을 피폐화시킬 수도 있다는 교훈을 던져주었다.

김광석벽화골목에서 국민은행 대봉동 지점 앞 횡단보도에 서면 신호등에 가린 멋진 건물 한 채와 만난다. 대구 중구청이 판순이 문화행정 꼬리표를 떼려면 잘 나가던 대구의 기상을 증거하는 한양 가든테라스의 얼굴을 살려주는 방향으로 발전해야 한다. 대백프라자 근처 김홍갑 의상실 건너편 횡단보도에서도 똑같은 생각을 했다.

37세 건축가 김석철이 1980년 도시형 복합주거공간의 꿈을 담은 대봉동의 한양 가든테라스는 대구에서 건축가 르 코르뷔지에를 만날 수 있는 곳이다. 당시 건설부 건축과장이 한국형 도시 주거의 표준 모델로 자리매김하자는 지지를 받기도 했단다. 가든테라스는 주상복합건물이 아니라 해방 이후 세워진 건축물 가운데 대구를 대표하는 작품이다. 한국관광의 별에 빛나는 중구청이 자기주도적 관제 문화정책에서 민간의 창의와 자발성을 격려하고 기념하는 쪽으로, 진품을 알아보고 돌보는 문화행정력으로 괄목상대해지면 얼마나 좋을까.

봉산문화거리 봉산문화회관 근처 대구초등학교는 43세라는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난 청년 법률가 조영래 변호사가 서울 수송초등학교로 전학 가기 전 5학년까지 다닌 모교다. 천재 중의 천재라고 불러도 아깝지 않을 조영래 변호사는 1965년 서울대학교 전체수석으로 법과대학에 입학하는 신화와 1971년 사법시험에 합격해 연수원에 들어갔다 사법연수원생 신분으로 서울대생 내란음모 사건으로 구속되고, 만기 출소한 후 민청학련 사건의 관련자로 수배되어 피신하면서 3년이라는 시간을 들여 전태일 열사의 삶을 기록한 ‘어느 청년 노동자의 삶과 죽음’을 집필하는 진기록을 남긴 인물이다. 대구초등학교 교정에 인서울의 흐름 속에 상경하여 모교를 졸업하지 못한 큰 인물 조영래 변호사 흉상 하나 세워보면 어떨까.

조영래 변호사가 거쳐간 곳을 찾아보니 두 바퀴는 전태일 열사가 살고 배웠던 남산동으로 굴러간다. 명덕네거리 도시철도 3호선 명덕역 앞엔 2·28민주운동기념 표지석이 초라하게 세워져 있다. 인근 명덕초등학교 동편으로 2·28민주운동기념회관이 들어섰다. 명덕초등학교엔 전태일 열사가 다닌 청옥고등공민학교가 있었고 대구교구청 후문 왼쪽 골목에 전태일 열사의 생가(남산로8길 25-16)가 있다. 블록 담벼락엔 ‘Peace’라는 페인트칠이 새겨져 있을 뿐이고 아무 안내가 없어 씁쓸했다. 대구참여연대와 뜻있는 분들이 12일부터 대구불꽃 전태일을 상상하라는 주제로 전태일시민문화제를 시작한다니 버려진 역사의 공간이 의미 깊은 곳으로 부활하게 되길 성원한다.

골목 하나를 사이에 두고 인접한 대구대교구청이 있는 이른바 성모당은 1911년 6월26일 36세의 나이로 대구교구장에 임명되어 부임해 교구로서 갖춰야할 시설이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기적 신화를 일구어냈다. 그는 부임 직후 루르드의 성모님을 교구 주보로 선포하고, 성모님께서 주교관과 신학교를 건립하고 주교좌성당을 증축하도록 도와주시면 루르드의 성모동굴과 닮은 성모동굴을 지어 바치겠다는 허원을 드렸는데 이 모든 것이 실현됐다. 성모당에 가서 맘대로 기도하지 말지어다. 나는 성모당을 시내에 있는 갓바위라고 농을 하기도 한다. 성모당에 가서 함부로 허원하지 말지어다. 감당하기 힘들게 큰 짐이 떨어질 수 있으니 말이다. 성모당에서 남산 100년 향기길을 따라 반월당 네거리로 오면 관덕정이라는 이름과 마주친다. 이 일대는 동학의 예수 수운 최제우 선생이 목 잘린 대구의 골고다 언덕이다. 필자는 몇 해 전 일제식민의 이름을 달고 있는 반월당네거리를 수운네거리로 바꿔 역사 바로세우기를 했으면 한다는 글을 썼다. 작은 변화는 감지되지만 아직은 먼 일 같아 안타깝다.

용담의 물이 흘러 네 바다의 근원이요, 구미산에 봄이 오니 온 세상이 꽃이로다(龍潭水流四海源 龜岳春回一世花). 금호강이 네 바다의 근원이라고 생각하는 포토바이킹, 대구와 함께 한 청년의 길을 답사하고 버스가 오기를 기다리는 정류장에서 흐느낀다. 우리는 언제 이 꽃다운 영혼들을 잉태한 땅으로 원시반본할 수 있을까.

인물 갤러리 ‘이끔빛’ 대표 newspd@empa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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