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 이야기를 찾아 스토리 기자단이 간다 .6] 안동시 풍산읍 서미마을과 두 정승

  • 박순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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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6-01-27   |  발행일 2016-01-27 제29면   |  수정 2016-01-27
두 戰亂<임진왜란·병자호란> 때 충성하고 절개지킨 류성룡·김상헌
중대바위 아래 초가삼간 짓고 말년을 보내다
20160127
서애 류성룡이 농환재라는 초가집을 짓고 살았다는 안동시 풍산읍 서미리 뒤에 있는 중대바위. 서미리 입구 신양저수지 부근에 있는 ‘영의정문충공서애류선생유적비’. 서애 류성룡을 기리기 위해 세운 비석이다(작은 사진). <영남일보 DB>

안동시 풍산읍 서미마을(서미리)은 조선시대 정승 2명이 머무른 마을로 유명하다. 임진왜란 당시 조선을 전란의 위기에서 구한 서애 류성룡(1542~1607·영의정)과 병자호란 당시 저항을 주장했던 청음 김상헌(1570~1652·영의정 추증)이 서미마을에 터전을 잡았다.

서미마을은 조용하고 아름답다. 마을의 배산은 보문산(643m)인데 학가산 줄기에서 흘러나온 이 산은 예천군과 안동시의 경계를 이루고 있다. 서미마을은 한때 100호 넘는 규모로 번성했지만, 현재 40호 남짓한 가구에 60여명의 주민이 거주하고 있다. 주민 대부분은 노인이다. 쌀농사와 함께 고추, 콩, 참깨 농사를 지으며 살아가고 있다.

마을 뒤편 보문산의 ‘중대바위’는 이 마을의 상징이다. 우람한 모습의 중대바위는 ‘중대바우’ ‘장군바우’ ‘탕건바우’로도 불린다. 중대바위 아래에 중대사라는 절이 있어 붙은 이름이라고 전한다.


서애 류성룡 (1542∼1607)
임란활약후 삭탈관직 당해 낙향
방문객 줄잇자 서미마을로 옮겨
초옥 ‘농환재’서 유유자적한 삶

청음 김상헌 (1570∼1652)
인조의 ‘삼전도 굴욕’ 사건 후
패전 설움 달래려 안동서 은거
후학양성 위해 ‘서간사’ 짓기도


중대바위는 군대를 통솔하는 용맹한 장군의 모습과 흡사하다. 마치 장군이 투구를 쓴 것 같은 모습으로 볼 때마다 장관이다. 이 중대바위 아래에서 2명의 정승이 살았다.

첫 정승은 류성룡이다. 류성룡은 임진왜란 때 영의정과 도체찰사로 활약했지만, 삭탈관직을 당한 후 고향인 안동 하회마을로 낙향했다. 현재 하회마을 충효당 종택 사당에서 류성룡의 제사를 모시고 있다. 인근 병산서원에서는 풍원부원군으로 배향하고 있다.

낙향한 류성룡은 하회마을을 끼고 굽이쳐 흐르는 낙동강 건너편에 옥연정사를 짓고, 임진왜란의 경험을 토대로 ‘징비록’을 썼다. 류성룡은 옥연정사에 소나무를 심고 말년을 조용히 보내려 했지만 끊임없이 찾아오는 사람들 탓에 번거로웠다. 결국 류성룡은 지친 심신을 달래기 위해 인근의 서미마을로 거처를 옮겼다.

류성룡에게 서미마을은 최고의 은거지였다. 우뚝 솟은 중대바위는 지친 심신을 기댈 장소로 부족함이 없었다. 고향인 하회마을과의 거리도 15㎞ 남짓이어서 불편하지 않았다.

류성룡은 서미마을 중대바위 아래 초가삼간을 짓고 ‘농환재’라 이름붙였다. 농환재의 류성룡은 늘 즐거웠던 것으로 보인다. 류성룡은 서미마을을 ‘하늘 밑 첫 동네’라고 부르며, ‘안동부의 서쪽 아름다운 마을’이라면서 마을 이름을 ‘이화동’에서 ‘서미동(西美洞)’으로 고쳐 불렀다. 이후 류성룡은 농환재에서 유유자적하는 삶을 이어갔지만 채 3년이 지나지 않아 세상을 등진다. 안타깝게도 류성룡이 말년에 머무른 농환재 터가 어디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관련 기록조차 없어 아쉽다. 마을의 구전에 따르면 중대바위 넘어 ‘정터(정승이 살았던 터)’가 있었으며 한 주민의 집터가 농환재였다는 설이 있지만 구전을 아는 이들마저 이미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투구를 쓴 채 옛 모습을 간직한 중대바위만이 농환재의 위치를 기억하고 있다.

류성룡이 세상을 떠난 지 40여년 후 김상헌이 찾은 곳도 서미마을이었다.

김상헌은 인조반정과 병자호란을 겪으며 굳은 절개를 지킨 조선후기의 문신이다. 도승지, 대제학을 지냈으며 사후 영의정으로 추대됐다. 조선 16대 왕 인조가 청나라 황제에게 항복한 ‘삼전도의 굴욕’ 사건 후 안동에서 은거했다. 김상헌은 패전의 설움을 달래려 안동시 풍산읍 소산마을(소산리)로 들어온 것이다. 원래 소산마을의 지명은 ‘금산(金山)’이었지만, 김상헌은 “김가가 사는 곳을 금산이라 하면 너무 화려하고 사치스럽다. 모름지기 검소한 소산(素山)으로 바뀌어야 한다”며 마을이름을 고쳤다. 또한 조선을 침략한 청나라를 멀리한다는 의미의 ‘청원루’를 지어 거처하다가, 다시 서미마을로 옮겨 은거했다.

김상헌 역시 류성룡처럼 서미마을의 이름을 고쳐불렀다. 류성룡이 지은 서미동(西美洞)의 ‘아름다울 미(美)’자를 ‘고사리 미(薇)’자로 바꿔 불렀다. 충절을 지키기 위해 고사리로 연명한 중국 은나라의 충신 백이·숙제를 닮기 위해서였다. 김상헌은 서미마을에 지은 자신의 초옥을 ‘목석거’ ‘만석산방’이라 이름짓고 ‘서간사’를 지어 후학을 양성했다.

박순화<경북 스토리 기자단> vivianna1952@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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