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통 불능에 빠져…독자는 없고 시인만 있다

  • 이춘호 박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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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6-04-29   |  발행일 2016-04-29 제35면   |  수정 2016-04-29
■ 시인, 시인을 말하
20160429
일반인은 시집을 멀리하고 있지만 그 어떤 나라보다 시인이 많이 양산돼 ‘시문학 인플레이션 시대’를 겪고 있는 지역 시인들. 참석자들은 어렵게 마련된 이번 인터뷰를 통해 고언을 맘껏 쏟아냈고 그래서 더없이 후련하고 자신의 시적 성찰을 할 수 있는 계기가 됐다고 말했다.

◆ 나의 시론, 그리고 시단에 쓴소리

한때 시인은 이육사, 이상화, 윤동주, 한용운 등에서 보듯 ‘국부적 위상’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많은 직군 중 하나에 불과하지 않다는 인상을 준다. 시대에 맞서, 불의에 맞서 싸울 대상이 사라진 탓인지, 상당수 시인은 시보다 시인 자신을 더 섬기려 한다. 시인은 어느 순간 유명과 무명, 중앙과 지방으로 분류되기 시작했다. 참석 시인들도 저마다 속에 든 ‘불편한 진실’을 토로한다.


-중앙과 지방, 인지도로 나누는 현상
-진리 담지하던 시가 허세·장식으로
-비틀기 등 난해해져 가는 詩의 난무
-대구 200여 시인 수준높은 활동 뿌듯
-비평 부재 문제…시단 자체 성찰 절실
-영남일보-시인協 ‘시인 주간’ 큰 기대

▲김연대

예술이란 장르는 열정에서 싹트는 것이 아니고 ‘애환’에서 싹튼다고 생각한다. 그 영혼의 바탕은 한없이 곱고 아름답고 순결한 마음이라고 생각한다. 의미를 달리하면 사랑·평화·자유·진선미라고 부를 수도 있을 것이다. 예술에 다가가고 싶은 본능은 누구나 가지고 있다. 그냥 내버려둬도 소질에 따라 성취가 있을 수도 있으나, 그건 옛날에나 가능했고 지금 시대는 소질만으론 되지 않는다. 사회적 구조 자체가 근본 장애물이기 때문이다. 로마를 보려면 로마에 가야 하는 것처럼 문학도 문학판에 들어가야 활동공간이 확보된다. 특히 시가 그렇다. 그래서 등단이라는 절차를 거치게 된다. ‘필요악’이다. 때문에 폐해도 있다.

시가 점점 난해해져 걱정이다. 시는 시인에게나 독자에게나 다 같이 느낌으로 다가가는 것이지 이해를 해야 하는 것은 아니라고 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해한 시를 만나면 ‘나는 참 무식하구나’ 하는 생각에 사로잡히기도 한다. 시에서 낯설게 하기, 비틀기, 갖다붙이기를 하다보면 시는 실종되고 문자만 남게 되지 않을까.

▲노태맹

시인이라는 존재는 현실 속에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시를 쓰는 순간에만 시인은 잠시 존재한다는. 어쩌면 시인은 시가 남기고 간 흔적일 뿐이다. 시인은 그 껍데기를 뒤집어쓰고 있을 뿐. 그러니 시인인 체, 현자인 체해서는 안 되는 게 아닐까. 그럼에도 우리가 시인이라고 주장하고 시인이 되어야 하는 이유는 ‘보이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도록 하는’, 그 위대한 임무를 스스로에게 부여했기 때문일 거다. 과거의 제사장과 같은.

19세기쯤 서구에서 시는 철학이 가진 지위, 진리를 담지하는 역할을 했다. 그러나 이제 더 이상 시는 그러한 지위를 가지고 있지 않다. 현재는 차라리 광고가 더 아름답고 환상적이다. 나는 시의 미래에 대해 비관적으로 본다. 시는 이제 ‘허세’가 되었고 장식이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시를 쓰는 것은 그것이 대다수의 삶을 옹호하고 가장 낮은 사람들의 삶을 우주적 관점에서 고양시키기 때문이라고 믿고 싶다.

▲윤은희

글쓰기의 역사는 남근중심주의의 전통과 함께해왔다. 그래서 나는 ‘여성적 글쓰기’에 대해서 이야기하려고 한다. 여성은 자기 자신의 이야기를 글로 써야 한다. 여성은 스스로의 힘으로 자신을 세상에 드러내야 하고 역사 속에 부각시켜야 하며 이와 동시에 자신을, 자연발생적으로 흘러넘치는 자신의 이야기를 텍스트로 표현해야 한다.

페미니즘 운동의 효시는 버지니아 울프의 ‘자기만의 방(A Room of One’s Own)’이다. 이 책에서 그녀는 여성들의 글쓰기 필수 조건을 1년에 500파운드의 돈과 자기만의 방이라고 주장했다. 가부장적 문화의 한국 사회에서 여성으로 살아가기 위해서 버지니아 울프가 말한 ‘500파운드의 돈과 자기만의 방’을 가져야 한다는 주장에 나 또한 박수치고 환영하는 바이다.

현재 우리나라에서는 시집을 출간하는 단계에서 유명한 대학 교수들에게 비평 해설을 받기 위해 1년간 기다려야 하는 것이 관례다. 안타까운 것은 비평이론도 없이 해설만 난무하는 시집도 너무 많다. 우리 시단에서는 ‘독자는 없고 시인만 있다’는 말이 공공연히 행해지고 있다. 김수영 시인은 어느 평론에서 ‘시인을 발견하는 것은 시인’이라고 말했다. 그렇다면 시인이 시인의 작품을 제대로 읽어내기 위해서는 보여주는 텍스트뿐만 아니라 텍스트가 함의하고 있는 콘텍스트를 읽어 낼 수 있는 직관력 또한 함양해야 할 필요성이 있다.

▲변희수

매달 구독하는 잡지가 몇 종 된다. 책을 받아 읽다 보면 글쓰기에도 유행하는 패턴이 존재한다는 혐의가 짙어진다. 이 잡지에 실린 글과 저 잡지에 실린 글이 하나의 패턴처럼 비슷하다. 그래서 읽는 재미가 없다. 내용뿐만 아니라 시인들도 마찬가지다. 이미 인지도가 있거나 인맥이 닿아 있지 않으면 지방에서 활동하는 시인들은 그냥 변두리 시인일 뿐이라는 자괴감이 든다. 중앙에선 인정하기 싫겠지만, 대구에는 서울보다 인구 대비 훌륭한 시인들이 엄청 많다.

나는 두 번 등단을 한 셈이다. 영남일보와 경향신문을 통했다. 첫 등단을 하고 제대로 발표를 하지 못했다. 서울 쪽에서 청탁받은 것이 한 번뿐이었다. 융통성의 문제일 수도 있지만 난 경향신문에 당선되고 나서도 여전히 심사위원들에게 전화 한 통 하지 않았다. 내 상식은 그것이 그분들에 대한 예의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부쩍 문학상이 많아졌다고 우려도 한다. 그러나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문학상은 문학하는 사람들에게 목적이라기보다 동기로 작용한다. 동기가 많으면 문학은 더욱 풍성해질 것이다. 영남일보에 제안하자면 매년 하는 신춘문예 공모기간을 문학축제 기간으로 만들어보면 어떨까 한다. 시는 영감의 발원이고 진원지다. 따라서 지구가 멸망하지 않는 한 시인도 멸종되지 않을 것 같다.

▲김선굉

대구 시단은 엄청나다. 현대시의 역사성은 ‘시의 도시’를 자부하는 대구 시단의 긍지가 되고 있으며, 현재 활동하고 있는 시인의 수 또한 엄청나다. 대구시인협회 회원이 200명을 넘어서고 있다. 대구문인협회를 포함하면 600명을 훌쩍 넘어서고 있다. 그러나 이 시인들이 생산하고 있는 작품과 거기 담긴 시정신이 시민의 가슴으로 흘러 들어가고 있는가 하는 데는 동의하기 어렵다. 수준 높은 비평의 부재가 가장 큰 문제지만, 서정의 광맥을 제대로 캐내지 못하고 있는 시인들의 직무 유기 또한 말하지 않을 수 없다. 가장 심각한 것은 ‘비평의 부재’다. 지역에서 생산되고 있는 문학 텍스트에 대해 어떤 학자도 문제를 제기하거나 방향성을 제시하는 것을 본 적이 없다. 시인들은 일반 시민이 시를 모른다고 생각하면 큰일 난다. 어쩌면 시인의 상상력과 진정성을 훌쩍 넘어서는 시민이 의외로 많을 수도 있다. 대구 시인들의 정신주의 쪽으로 심하게 기울어진 창작 무게 중심을 유희정신 쪽으로 옮길 필요가 있다. 시가 시민을 향해 다가서는 하나의 중요한 방법론이다.

시에 관한 한 시단 자체에서라도 비평적 성찰을 시도해야 할 시점이다. 그것을 누가 하겠는가. 나는 대구시인협회가 그 짐을 짊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대구시인협회와 영남일보가 협약한 2년에 걸친 대형 문학 프로젝트가 시사하는 바는 대단히 중요하다. 이걸 계기로 텍스트의 축적을 넘어서는 비평적 담론이 대구시인협회를 중심으로 전개되기를 희망한다.

글=이춘호기자 leekh@yeongnam.com

사진=박관영기자 zone5@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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