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네토크] 영화 ‘계춘할망’ 타이틀롤 윤여정

  • 윤용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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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6-05-20   |  발행일 2016-05-20 제41면   |  수정 2016-05-20
내공100단 여배우 “나는 ‘노배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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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thing To Lose.’ 연기에 임하는 윤여정의 마음은 늘 그랬다. 이제 잃을 것도 없다고 생각한 이 노배우는 그만큼 여유로운 마음으로 매번 자신의 다양한 필모그래피를 채워갔다. 환갑을 넘으면서 하고 싶은 것만 하겠다고 결심했다는 윤여정의 말을 빌리자면 지금은 즐기는 단계다. “유명해지는 것이나 금전적인 것을 좇기보다는 내가 좋아하는 감독, 작가와 작품 활동을 한다면 배우로서 이보다 더한 사치는 없을 것 같다”고 말한 그. 그런 윤여정이 요즘은 마음이 편치 않다. 주연을 맡은 ‘계춘할망’의 개봉을 앞두고서다. “솔직히 부담스러워서 제목을 좀 바꾸라고도 했다. 흥행이 안 되면 그건 온전히 내 책임이지 않나. 여생을 좀 편히 살려고 했는데. 아무리 결심한다고 해도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것이 인생인가 보다.”


“제작사 젊은 관계자 섭외 전화서
‘선생님 도회적 이미지 소진됐다’
한마디에 ‘그럼 도전’ 출연 결정

‘환갑 後 하고픈 것만 하겠다’ 결심
늙게 보이는 건 자신 있었는데…
분장 너무 심하게 해 여태 후유증”



해녀 계춘이 어릴적 잃어버린 손녀 혜지(김고은)가 12년 만에 고향으로 돌아오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그린 ‘계춘할망’은 소소한 일상의 즐거움과 가족의 소중함을 따뜻한 감동으로 전한다. 특히 하나뿐인 손녀에 대한 애틋하고 무조건적인 사랑을 보여주는 계춘은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있는 할머니의 모습이라는 점에서 아련하다. “누군가 진심을 다해 쓴 이야기 같았다. 할머니의 무조건적인 사랑을 받았을 때는 몰랐는데 막상 엄마가 되어 보니 어렸을 때 너무 잘못했던, 세상에서 나를 제일 사랑해주신 증조할머니가 생각났다.” 윤여정이 많은 부담감을 뒤로하고 이 작품을 선택한 가장 큰 이유다.

‘하녀’ ‘돈의 맛’ ‘장수상회’ 등 작품마다 대체불가능한 존재감으로 국내뿐 아니라 세계를 사로잡은 배우 윤여정. 연기 인생 50년이 넘은 관록의 배우지만, 매번 새로운 캐릭터를 추구하는 열정을 지닌 그가 이번에는 제주도 해녀 할머니가 돼 돌아왔다. ‘패셔니스타’란 수식어와 도회적인 이미지에서 벗어나 오매불망 손녀만 생각하는 그 정 많은 우리 시대 할머니로 말이다. 하지만 지금껏 보여준 그 어떤 얼굴보다 계춘은 윤여정과 닮아있다. 그래서 그 모습이 더욱 정겹고 포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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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스팅 당시 제작사 관계자로부터 도회적인 이미지가 소진됐다는 말을 들었다고 했는데.

“그쪽에서 전화가 왔길래 일단 이게 독립영화인지 상업영화인지 물어봤다. 이야기가 너무 착해서 상업영화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던 거지. 그런데 상업영화라는 거다. ‘그런데 왜 나를 시골 할머니로 섭외했느냐. 나는 도회적 이미지로 알려져 있는데’라고 물으니까 전화를 건 그 젊은 친구가 씩씩하게 ‘선생님의 도회적 이미지는 이제 소진되셨습니다’라고 하는 거다. ‘진짜 소진됐나요?’라고 재차 물었더니 굽히지 않고 ‘맞습니다’ 그러는데 참 재밌는 젊은이구나 싶었다. ‘그래? 소진됐다면 한번 도전을 해 볼까’ 그래서 출연을 결정했다.”

▶물론 그게 출연 이유의 전부는 아닐 것이다. 시나리오에 대한 첫 느낌이 좋았나 보다.

“상업영화에 대한 편견을 잊게 할 만큼 자극적이지 않은, 따뜻한 이야기더라. 잘 읽혔다. 관객의 시선에서 편안하게 시나리오를 보는데 너무나 잘 이해되더라. 그렇게 용서하고 이해하는 건 오직 할머니만이 해낼 수 있는 거다. 손녀를 온전히 받아들이는 건 오직 늙어서만, 노인만 할 수 있는 인간애라고 생각했다. 그런 소소한 감정을 잘 포착한 게 좋았다.”

▶할머니와의 추억도 있다고 들었다.

“증조할머니를 어릴 때 무척 싫어했다. 우리 때 할머니들은 먹을 게 있으면 직접 씹어서 손주들 입에 넣어주곤 했는데 어린 마음에는 그게 더럽다는 생각을 했다. 그런데 문득 쉰이 넘으니까 증조할머니 생각이 났다. 할머니의 인생에서 나라는 존재는 과연 무엇이었을까. 나는 삼대독자의 첫 손녀다. 몇십년 만에 생겨난 아이니 얼마나 소중하고 귀여웠겠나. 꼬물락거리는 것도 예쁘고 똥오줌 싸는 것도 예쁜 거다. 증조할머니를 생각하면 내가 많은 죄를 지었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내가 엄마가 되어 보니 알겠더라. 그래서 이 영화에는 증조할머니에게 속죄하는 심정으로 임했다.”

▶해녀를 연기해 보니 어떤가.

“진짜 해녀보다 가짜 해녀가 더 힘들다는 것을 알았다. 왜냐하면 진짜 해녀들은 물에 들어가서 물질하고 딱 5분이면 끝인데 우리는 그 과정을 계속 반복해야 했다. 그 사람들도 놀랐을 거다.”

▶노인 분장이 정말 자연스러웠다.

“분장을 너무 심하게 해서 지금까지 분장 후유증이 있다. 게다가 해녀 역할이라 햇빛에 종일 노출되다 보니 지금도 얼굴이 벌겋고 머릿결도 지금은 나아지긴 했지만 여전히 옥수수 수염같다. 아무튼 내가 평생 가보지 않아도 될 곳들을 가보고, 듣도 보도 못한 일들을 연기했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촬영은 늘 고되다. 이게 육체적으로 고되냐, 심리적으로 고되냐의 차이일 뿐이다.”

▶부상도 당했는데.

“해녀복을 벗다가 귓바퀴가 찢어졌다. 해녀복이 지퍼도 없고 입고 벗기도 힘들다. 그래서 전문 해녀들도 절대 혼자 해녀복을 입고 벗지 못하는데 의상 담당하는 아이가 내가 너무 힘들어하니까 도와주려다가 그렇게 됐다. 그런데 그건 약과다. 뱀장어한테도 물렸다. 뱀장어를 잡아서 앞치마에 넣었는데 사타구니를 물렸다. 그래서 1년이 된 지금까지도 그 부위가 까맣게 남아있다.”

▶역할을 위해 특별히 준비한 게 있다면 뭔가.

“특별한 건 없다. 예쁘게 나올 게 아니기 때문에 분장도 신경쓸 필요가 없었고. 난 늙게 보이는 건 자신있다. 젊게 보이도록 만드는 게 문제지. 내가 연극영화과 출신이 아니라서 연기적으로 어떻게 접근하는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대본을 읽으면서 내가 이 할머니라면 이 상황에선 어떨까 생각했다. 그 정도다.”

▶김고은과의 호흡은 어땠나. 그녀를 강력 추천했다고 들었다.

“강력 추천까지는 아니고 손녀 역으로 누굴 추천하고 싶으냐고 묻길래 ‘은교’ 때 인상깊게 본 김고은이 문득 생각이 났다. 저런 얼굴들이 이젠 필요할 시기가 됐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남자들이 좋아할 쌍꺼풀 있는 미인형의 얼굴은 아닌데, 배우로서 좋은 눈을 가졌다고 생각했다. 물론 연기도 열심히 잘했다. 하긴 늙은 배우도 현장에서 뛰고 있는데 열심히 하지 않는다면 말이 안 되겠지. 아무튼 연기도 잘하고 예쁜 구석이 있는 친구다.”

▶‘화녀’에서부터 ‘계춘할망’까지 필모그래피가 참 다양하다.

“단 기준은 있다. 전에 맡았던 역은 다시 맡지 않는다. 같은 얼굴에, 같은 목소리를 가진 내가 연기할 수 있는 캐릭터는 한정적이다. 그러다 환갑을 넘어서는 남은 인생을 즐기기로 결심했다. 보너스로 사는 거라고 생각하고 돈이나 명예 상관 없이, 내가 좋아하는 감독과 작가가 원하면 출연했다. 그래서 홍상수 감독의 영화에서 단역도 많이 맡았다. 만일 40대라면 그렇게 할 수 없었을 거다. 아무튼 ‘계춘할망’을 하기 전까지는 그렇게 자유로웠다.”

▶연기관을 말한다면.

“연기를 오래한다고 잘할 수 있는 거면 좋겠다. 그래서 연기는 참으로 알 수 없는 거다. 관객이 얼마나 들지 알 수 없는 것처럼. 내 연기는 아마 오염이 많이 됐을 거다. 예전에 배두나에게 그런 말을 한 적이 있다. 걔가 무슨 이유인지 이 연기는 못하겠다고 하는 거다. 그래서 못하는 게 당연하다고 말해줬다. ‘너는 나보다 감각이 신선하니까 괜찮을 거야’라고 말하면서. 만약 그때 누군가 이렇게 연기하는 거라고 가르쳐 줬다면 그 사람은 이미 굉장히 오염되고 식상한 거다. 연기에는 정답이 없다. 최근 ‘사랑에 대한 모든 것’이라는 영화를 본 적이 있는데 스티븐 호킹을 연기한 에디 레드메인이라는 배우가 되게 인상적이었다. 그 배우의 연기를 보면서 그가 진짜 스티븐 호킹이라고 착각할 정도였다. 필립 세이모어 호프먼도 좋아하는 배우이고. 그런 사람들을 보면 나와 비교되는 것 같다. 나만 못하는 것 같다는 생각에 늘 후회된다. 그럴 때면 ‘감독은 뭐 하는 거야. 보고 있으면 좀 알려주지’ 하고 괜히 심술도 난다.”(웃음)

▶매번 느끼는 거지만 말을 재미있게 잘한다.

“돌려서 말하는 것을 싫어할 뿐이다. 그렇게 말하면 피차 못 알아듣는다. 내가 정치인도 아니고 뭐하러 돌려서 말하나.”

▶최근 방영한 드라마 ‘디어 마이 프렌즈’도 재미있게 잘 보고 있다.

“여기선 내 나이가 중간이다. 고두심, 박원숙은 동생뻘. 나문희, 김혜자는 언니뻘이다. 초등학교 동창 이야기인데 진짜 우리 이야기 같다. 우리가 살아온 역사니까. 옛날에는 우리가 드라마에 다 함께 출연하고 그랬는데 이젠 각각의 드라마에서 다들 엄마로 나오고 있기 때문에 그동안 만나지 못했다. 그러다가 이 드라마를 반갑게 만난 거다. 첫 포스터를 찍을 때 혜자 언니가 내 손을 꼭 잡으면서 그러더라. ‘노희경 이 작가가 우리 죽기 전에 만나게 해주려고 이 작품을 썼나 봐’라고.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나왔다. 그래서 모두가 본인의 모습으로 진짜처럼 찍고 있다.”

▶한국에서 여배우로 산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

“난 이제 여배우가 아닌 노배우일 뿐이다. 그래서 특별한 의미는 없다. 연기는 그냥 일이다. 모르지. 내가 죽을 때가 되면 다르게 생각하게 될지. 나는 늘 생각한다. 타고난 끼도 없는 내가 배우를 하는 게 맞는지 말이다. 그래서 지금은 누가 나한테 끼가 있다고 말해줬으면 좋겠다.(웃음) 여배우나 남자배우나 배우는 특별한 직업이다. 일반 사무직과 다르다. 인기라는 말로 의미 없이 치켜세워졌다가 의미 없이 매도 당한다. 그래서 본인이 두 다리를 딛고 똑바로 서지 않으면 비틀거릴 수 있는 직업이다. 인생이 그런 것 같다. 나름의 아픔과 고통이 있었지만 살다 보니 여기까지 왔다. 이런 걸 보면 인생은 한번 살아볼 만하고, 그러면서도 힘든 거다.”

글=윤용섭기자 yys@yeongnam.com
사진= 콘텐츠난다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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