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혜숙의 여행스케치] 김천 교동

  • 인터넷뉴스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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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6-10-21   |  발행일 2016-10-21 제36면   |  수정 2016-10-21
아담한 연화지엔 3개의 섬과 봉황대 ‘올망졸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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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동 연화지 가운데에 있는 봉황대. 사방 3칸, 팔작지붕의 2층 누각으로 경북도문화재자료 제15호로 지정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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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천 교동의 연화지. 조선 초에 만들어진 오래된 못으로 현재는 시민들의 휴식공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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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변공원 안의 연못. 소나무와 자연석은 시민들이 기증한 것이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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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변공원 곳곳에 조각 작품이 설치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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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지천 제방길에서 본 교동. 들판 너머로 고속도로와 철길이 지나간다.


마을 앞으로 국도와 고속도로와 철길이 지나간다. 그 너머에는 벼와 감과 대추가 익어가는 들판이 펼쳐져 있다. 사람도 차도 그다지 많지 않지만 어딘가 번다한 도로다. 몇 번의 시행착오 끝에 겨우 ‘김산향교’ 이정표를 발견한다. 옛 향교로 향하는 골목의 입구는 좁고 약간 가파르다. 오른쪽에는 숲이 우거진 야트막한 언덕이 자리했고 왼쪽에는 작은 식당이 낡은 간판을 달고 있다. 기울어진 길을 슝 오르자 길은 곧바로 부드러운 곡선으로 이어졌고 그 좁고 굽은 길가에는 차가 잔뜩 서있다.

조선 초 농업용수 관개지로 만들어져
이후 기능상실…1993년 휴식공간으로

못 안 ‘三山二水’형상화해 풍류 즐기다
1707년 군수의 꿈 내용 따라 지은 이름
솔개가 봉황이 돼 날아올라서 ‘연화지’
비상한 방향의 읍취헌→‘봉황대’ 개명

마을 앞 들판 가로질러 직지천변 공원
시민 기증 나무·바위·조각품 조경 한몫


◆연화지와 봉황대

차 문을 열자 연륜이 느껴지는 가로수들이 농후한 가을의 향취를 풍기기 시작한다. 그 굵은 둥치들 너머로 물빛 조각이 거울의 파편처럼 깨어져 있다. 연화지다. 가로수는 도로를 따르는 것이 아니고, 물과 땅을 구획하는 울타리와 같은 것이었다. 연화지에는 아직 초록인 연잎들이 물 위에 가득하다.

연화. 당연히 연꽃을 의미하는 이름일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마을 유래를 전하는 안내판에 의하면 솔개 연(鳶)에 바뀔 화()를 써서 연화지다. 1707년에 부임해 온 군수 윤택(尹澤)이 어느 날 솔개가 봉황으로 변해 날아오르는 꿈을 꾼 후 지은 이름이라는 설명이다. 연화지가 조성된 것은 조선 초기로 농업용수 관개지였다 한다. 이후 원래의 기능을 상실했고 1993년에 시민들을 위한 휴식공간으로 변모했다. 계란 모양의 아담한 못이다. 못 가에는 카페와 식당, 예쁜 소품가게 등이 느슨하게 자리한다.

못 안에는 세 개의 섬이 있다. 옛 풍류객들이 ‘삼산이수’를 형상화해 놓은 것이라 한다. 하나는 매우 작고 봉긋하고 야성적인 것이 홀로 동떨어져 있다. 못의 북쪽에 다리로 연결해 놓은 또 하나의 섬에는 봉황대(鳳凰臺)라는 정자가 올라서 있다. 정자 섬에서 다시 다리로 이어지는 셋째 섬은 우거진 수목 사이로 언뜻 구조물이 확인되지만 분명하지는 않다. 봉황대의 입구인 조양문이 잠겨 있어 섬으로 오를 수 없음이 섭섭하다.

봉황대의 역사는 분분하다. 마을 유래에는 숙종 때인 1700년 지금의 김천 법원 자리에 세워 읍취헌(邑翠軒)이라 했고 이후 군수 윤택의 꿈에 나왔던 봉황이 읍취헌 쪽으로 날아가자 봉황대로 이름을 바꾸었다고 적혀있다. 봉황대 안내문에는 연화지 북쪽의 구화산에 있던 정자를 영조 때인 1771년 군수 김항주(金恒柱)가 산 밑으로 옮기고 봉황대라 했다고 적혀있다. 연화지의 남쪽과 북쪽에 있는 두 개의 기록이 엇갈린다. 다만 헌종 때인 1838년 군수 이능연(李能淵)이 지금의 자리로 봉황대를 옮겼다는 내용은 합치한다.

◆교동은 여전히 교동

김천 법원은 연화지에서 북쪽으로 약 600m 거리에 자리한다. 바로 그 남쪽에 옛날 관아와 객사가 있었다. 지금은 공원이 되어 터를 유존하고 있다. 연화지와 관아 터 사이에 김산향교(金山鄕校)가 위치한다. 김산은 김천의 옛 이름이다. 신라 진평왕 때인 614년부터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까지 존속했으니 생명이 정말 길었던 이름이다. 향교는 1392년에 창건되었고 임진왜란 때 전소된 것을 1634년에 중건했다. 지금의 건물은 중건 당시의 것이다.

교동(校洞)은 신라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이 고장의 오랜 읍치이자 문화의 중심이었다. 향교가 있어 향교골이라 했고 마을의 지형이 갓 모양과 같아 관동이라고도 했다. 교동의 한가운데에는 북쪽 구화산의 아홉 골에서 흘러내린 개천이 있다. 1905년 경부선이 개통되면서 고을의 중심은 김천역이 있는 평화동과 남산동 일대로 옮겨졌다. 교동은 구읍으로 불리게 되었고, 땅은 개천을 중심으로 갈라져 동은 교동, 서는 삼락동 등으로 나눠졌다.

지금 교동과 삼락동 사이는 좁고 긴 논이다. 황금색의 논 너머 삼락동에 묵직한 적갈색의 문화예술회관이 멋지게 서있다. 주변은 김천대학, 종합운동장, 실내체육관, 그 외 몇몇 스포츠 센터가 집합해 있다. 교동에는 김천예술고등학교, 김천생명과학고등학교, 한일여자중고등학교 등이 자리한다. 연화지, 봉황대, 향교는 교동이 조선시대 말까지 김산군의 읍치였음을 말해주는 유적이지만, 현재의 교동은 여전히 교동이다. 땅의 성질이나 운명은 쉬 변하지 않고, 길은 앞선 자취를 따른다.

◆ 직지천 강변공원

마을 앞 도로를 건너 벼와 감과 대추가 익어가는 들판을 가로지르면 직지천(直旨川)에 닿는다. 천 너머는 영남대로다. 대로를 타고 서쪽으로 향하면 김천의 큰 절 직지사다. 직지천은 직지사에서 따 온 이름으로 봉산면 눌의산에서 발원해 모암동에서 감천에 합류한다. 직전 직지천의 하류가 교동의 남쪽을 가로지른다. 천변은 길고 넓고 아기자기한 공원이다.

옛날 직지천 상류 지역에는 축산 농가가 많았다 한다. 자연히 하류는 악취와 오염에 시달렸다. 아무도 가까이 하지 않았던 강변은 1999년 공원이 되었다. 시민들이 기증한 나무가 숲을 이루고, 시민들이 기증한 바위가 조경을 거든다. 그 녹지 공간 속에 놀이마당, 다목적 광장, 배드민턴장, 산책로, 정자, 파고라, 지압보도 등 각종 편의시설이 녹아들어 있다. 곳곳에 조각 작품이 놓여 있고, 연못들은 분수를 뿜어 올리고, 수로에는 맑은 물이 흐른다.

김천에는 250여 개의 크고 작은 공원이 있다. 어디서든 몇 걸음만 가면 분수와 예술 작품 등으로 꾸며진 공원이 있다고들 말한다. 벤치 그네에 앉아 흔들흔들 천을 바라보는 부부를 본다. 나무 아래 자리 펴고 모여 앉은 아이들의 소풍을 본다. 그리고 영남대로를 따라 조각보처럼 이어져 있던 ‘사드반대’ 플래카드를 생각한다.

여행칼럼니스트 archigoom@naver.com

☞ 여행정보

경부고속도로 김천 IC로 나와 김천문화예술회관 방향 대학로를 타고 조금 가면 오른쪽에 김산향교 이정표가 있다. 우회전해 들어가면 바로 연화지다. 못 가에 주차공간이 있다. 대학로로 조금 더 가 삼락교에서 좌회전해 강변공원길로 가면 직지천이다. 강변공원 안에 주차장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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