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태흥의 음악칼럼] 모차르트 작곡, 칼 뵘 연주 ‘레퀴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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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6-12-09   |  발행일 2016-12-09 제40면   |  수정 2016-12-09
이땅의 수많은 외로운 죽음을 어찌 이 한곡으로 위로할 수 있으랴만…
[전태흥의 음악칼럼] 모차르트 작곡, 칼 뵘 연주 ‘레퀴엠’

인간의 근원적 두려움의 끝은 죽음이다. 결국 인간에게 죽음은 구원이라는 메시지를 요구하고 그 결과로 종교는 탄생하게 된다. 하지만 종교에 관계없이 인간은 오래전부터 죽음이 신(절대자, 혹은 자연)에게 가는 길이라 생각했다. 해서 죽음은 그 무엇보다 경건하고 신성하게 다루어져 왔다.

살아남은 사람들이 죽은 이에게 바치는 헌사 중에 노래는 인류의 오랜 전통이었고 중요한 양식이었다. 한때 죽음의 양식, 즉 장례에 관심을 가진 적이 있었다. 특히 티베트의 장례문화, 조장에서 죽은 자를 해탈로 인도하는 ‘사자의 서’는 놀라운 것이었다.

이렇듯 동서양을 막론하고 인류에게는 죽은 이들에게 바치는 노래가 있었다. 특히 서양에서는 이를 레퀴엠이라 불렀는데 레퀴엠은 위안이라는 뜻의 가톨릭 미사음악으로, 위령곡(慰靈曲), 진혼곡(鎭魂曲), 혹은 진혼미사곡이라 불린다. 대표적으로 모차르트와 포레, 그리고 브람스의 레퀴엠 등이 있다.

그중에서도 모차르트의 레퀴엠은 그의 마지막 작품이었고 미완성이라는 점에서 많은 추측과 논란이 더해져 드라마틱한 이야기로 더욱 알려져 있다. 프란츠 폰 발자크 백작이 죽은 아내를 추모하기 위해 작곡을 의뢰했을 때, 모차르트는 자신의 죽음을 이미 예견하고 있었다. 친구이자 ‘돈 조반니’ ‘피가로의 결혼’ 등의 시나리오를 쓴 로렌조 다 폰테에게 쓴 편지에서 그는 “낯선 그 남자의 모습을 눈앞에서 떨쳐낼 수 없습니다. 언제나 그 모습이 보이거든요. 그자는 호소하고, 재촉하고, 다급하게 제 작품을 요구합니다. 저도 작곡을 계속하고는 있습니다. 쉬고 있을 때보다 작곡하고 있을 때 더 피곤하지 않아요. 그 외에도 제게는 두려울 것도 없습니다. 마지막 때가 가까운 것처럼 느껴져요. 저는 저의 재능을 충분히 펼치기 전에 마지막에 다다르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인생이란 참으로 아름다운 거죠. 삶은 행복의 전조하에 시작을 고했던 겁니다. 그렇지만 사람은 자신의 운명을 바꿀 수는 없습니다. 사람은 아무도 스스로 평생을 결정하지 못합니다. 섭리가 바라는 대로 가는 걸 받아들여야 합니다. 여기까지 쓰죠. 이것은 제 죽음의 노래입니다. 미완성으로 남겨 둘 수 없어요”라고 썼다. 하지만 모차르트는 결국 이 곡을 미완성으로 남겨두지 않겠다는 약속을 지키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가 죽고 나서 모차르트의 아내 콘스탄체는 거금이 걸린 이 곡의 완성을 위해 제자들에게 곡의 완성을 부탁했고 우여곡절 끝에 제자 중 한 사람인 프란츠 크사퍼 쥐스마이어에 의해 곡은 완성되었다.

모차르트가 편지에서 말한 그 낯선 남자는 누구였을까. 가장 대중적인 음반이라 알려진 칼 뵘의 연주는 해답을 줄 수 있을까? 칼 뵘은 모차르트의 슬픔을 느리게 또 느리게 연주한다. 자신의 죽음을 재촉하는 저승사자의 환상에 시달렸던 천재 작곡가의 마지막이 미완성이었듯이 지휘자의 지휘가 또한 미완성으로 느껴지는 것은 어쩌면 우리의 삶 모두가 미완성일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기도 하다.

지난 3일, 청와대 100m 앞에 서는데 2년7개월이 걸렸다는 세월호 유가족들의 눈물은 아직도 차가운 바닷물 속에서 떠돌고 있는 304명의 억울한 영혼들의 절규였다. 그 절규는 죽은 이들에 대해 엄숙함과 겸허함으로 치유되어야 할 세월호 참사가 국민으로부터 위임받은 권력을 사유화한 부패한 집단에 의해 조롱당하고 은폐되어 왔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생때같은 자식을 잃고 진상 규명을 위해 단식을 하는 유가족 농성장 앞에서 악마의 탈을 쓰고 폭식의 퍼포먼스를 뻔뻔하게 벌이던 이들과 이제 그만하면 되지 않았냐며 진상규명을 방해하던 쓰레기 언론들의 작태를 보면 신은 과연 존재하는가라는 의문도 사치스러운 것이었다.

모차르트의 레퀴엠만으로 세상에 버려진 이들의 죽음을 어찌 위로할 수 있으랴. 또 어찌 살아남은 자의 부끄러움을 숨길 수 있으랴. 2016년 겨울나무들이 헐벗은 이유는 삶의 끝에서 죽음으로 이르기 위한 것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을 준비하기 위함이다. 304명의 세월호 희생자와 그 가족들, 고(故) 백남기 농민, 그리고 신문의 한 구석에서 외로운 죽음을 맞이한 이들을 위해 오늘 모차르트의 레퀴엠을 바친다. 부디 그 슬픈 영혼들이 연옥을 벗어나 천국에 이르기를.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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