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산책] 기억의 저편에서

  • 입력 2017-01-16 07:52  |  수정 2017-01-16 07:52  |  발행일 2017-01-16 제22면
[문화산책] 기억의 저편에서
신문광 <화가>

내가 어릴 적 살았던 동네의 골목 입구에는 군용 천막을 치고 책을 빌려 주던 곳이 있었다. 한국말이 무척 서툰 일본남자가 주인이었는데 나는 아홉 살인가 열 살 무렵에 그 천막책방에 엄마 심부름을 많이 다녔던 기억이 있다.

우리 엄마는 일본에서 태어나고 자랐으므로 주로 일본 소설책과 ‘부인구락부’ 같은 신간잡지를 빌려오게 하셨다. 일본어를 모르는 나는 잡지의 삽화나 화보 사진에 매료되어 늘 엄마의 옆에서 그림책 보듯 하였다.

서점 주인은 내가 볼 수 있는 책도 자주 빌려 주곤 하여 동화책을 많이 읽었다. 그때 그 시절은 나의 독서가 시작된 순간이었지만 지금까지 책읽기는 그다지 지속되지 않은 편이다. 그 대신 잡지 속의 그림이나 사진으로 본 낯선 도시 풍경의 화려한 장면들만 아직도 선명하게 기억 속에 남아 있다. 그때 보았던 파리나 로마 같은 도시풍경들이 어찌나 마음속에 강하고 친근하게 심어져 있었던지 친구들에게 마치 그 도시에 대해 잘 아는 것처럼 지어낸 이야기를 끝없이 해주곤 했던 기억이 난다.

그래도 이야기를 글로 쓰는 사람이 되지는 못 하였고, 그토록 어린 나를 설레게 하고 들뜨게 했던 삽화와 사진의 시각적인 영향을 받았는지 나는 그림을 전공하게 되었다.

까마득하게 잊고 있었던 우연한 연결고리 하나를 갑자기 찾아낸 것 같아 새삼스럽지만 아직도 나는 파리나 로마에 한 번도 가보지 못했다. 그리고 요즘은 누구나 카메라를 아예 손 안에 넣고 다니는 세상이 되어 사진이나 그림이 더 이상 신기하지도 않다. 오히려 수백 장의 사진이 내 손 안에 저장되어 있는 자체가 부담이 되어가고 있다. 그래서 지우기에 머리를 써야 한다.

말하자면 딱 하나만 남기는 일에 창의성이 필요해지고 있는 것이다. 오직 하나의 핵심만을 남기는 일이 제일 어려운 것이 되고 말아 상상력도 줄어들고 표현은 더욱 복잡해진다.

좋은 아이디어는 지우고 버릴 때 오히려 문득 나타나기가 쉽다. 모두 사라져 버리고 멀어진 다음에야 지나간 기억 속에서 어느 날 불쑥 나타나 마치 우연인 듯 자연스럽게 표현되는 게 좋다. 상상력이란 바로 그렇게 준비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나의 어린 시절은 이야기 듣기를 좋아하던 친구들과 함께 다 사라진 줄 알았다. 그런데 어느 날 문득 기억의 저편에서 그동안 어떻게 살았는지 안부를 물으며 되살아나는 것 같다.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어도 그저 지금처럼 천천히 최선을 다 하라고 하는 것 같아 마음이 편안해진다.신문광 <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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