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비들의 사랑이야기 .15] 이 버들에 잎이 나면 내님이 돌아오겠지- 박현수와 능소(下)

  • 김봉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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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7-03-23   |  발행일 2017-03-23 제22면   |  수정 2017-03-23
능소, 암행어사 낭군과 재회…천안삼거리 혼례식 ‘흥타령’ 울려퍼져
밤비에 새잎나거든
20170323
봄의 전령이기도 한 버드나무 가지는 어디에 꽂아도 잘 자라, 예로부터 많은 사람들이 이별할 때 꺾어주며 잊지 말라는 증표로 애용했다. 이른 봄 상춘객들의 눈길을 끄는 수양버들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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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안삼거리 공원에 세워진 흥타령비. 충청도 민요인 흥타령은 박현수와 능소의 이야기에서 유래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능소의 변함없는 사랑과 재회

과거 급제 후 임금을 알현하는 자리에서, 임금이 시 구절의 의미를 묻자 박 선비는 자신과 능소의 인연을 이야기했다. 임금은 창궐하는 도적들을 회심시키고 민심을 살피라며 충청우도 암행어사를 제수했다. 능소에게는 정경부인 품계를 내렸다.

박 선비는 역졸들에게 아무 날 아무 시에 천안 관아로 모이게 했다. 한편으로는 고부 본가의 홀어머니를 모시고 천안으로 오게 하였다.

박 선비 자신은 단신으로 천안으로 갔다. 찢어진 갓에 허름한 옷차림으로 주막을 찾아가니, 주막집 노파는 능소 신세를 망쳐놓았다고 홀대하며 능소가 있는 곳을 가르쳐 주지 않았다. 이웃 사람들이 모여들더니 “쯧쯧, 어쩌나. 낙방했나봐. 몇 년 만에 저 꼴로 왔어” 하며 수군거렸다.

능소는 그날도 거리에 나가 북쪽을 쳐다보며 버드나무에 물을 주고 있었다. 아버지가 심어놓은 버드나무는 이미 울창해졌고, 자신이 심은 나무들도 제법 자라 잎사귀를 늘어뜨리고 있었다.

“아버지는 언제 돌아오시며 낭군은 또 언제 오시려나.”

한숨이 절로 나왔다. 멀리 주막집 근처에 사람들이 웅성거리고 있었다. 이상해서 가보니 꿈에 그리던 낭군이 아닌가. 능소는 아무것도 묻지 않고 박 선비를 집으로 데려와 목욕시키고 준비해 놓은 깨끗한 옷을 입혔다. 박 선비는 낙방하여 돌아올 면목이 없어 못 왔다고 말했다. 능소는 “과거가 뭐 대수기에 이런 꼴로 다니셨소. 그냥 바로 오실 것을”이라며 서운하거나 실망한 기색도 하나 없이 박 선비를 반겨주었다.


‘천안삼거리∼능소의 버들은∼’
박 선비 노래 이웃이 따라 불러
입에서 입으로 전해 민요 정착

가지 길게 늘어지는 능수버들
연약하고 가냘픈 여인을 상징
꺾은 가지 어디 심어도 잘 자라
이별때 만남 기약 징표로 건네



한편 천안 일대에서는 암행어사가 출두했다는 소문이 돌아, 삼삼오오 사람들이 모여 웅성거리고 있었다. 온갖 소식이 가장 먼저 들린다는 천안삼거리에서도 모를 리가 없었다. 그런 가운데 마침내 풍악 소리와 잡인을 물리치는 소리가 천안삼거리에 쩌렁쩌렁 울리더니, 그 행차가 능소의 집 앞에서 멈추었다. 능소가 놀라며 고개를 못 들고 있을 때, 박 선비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이 아닌가.

그 자리에서 박 선비는 홀어머니를 모시고 능소와 혼례를 올렸다. 그 광경을 본 이웃 사람들은 풍악을 울리며 흥에 겨워 어깨춤을 추니, 박 선비가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천안삼거리~ 흥~ 능소의 버들은~ 흥~ 제멋에 겨워서~ 흥~ 휘늘어졌구나 ~흥~”

흥겹고 신나는 노랫가락에 지나가는 행인들도 덩실덩실 어깨를 흔들며 함께 춤을 추었고, 이 노래는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서 ‘천안삼거리 흥타령’ 민요로 불리게 되었다.

능소가 심은 길가의 버드나무는 ‘능소의 버들’이라는 의미에서 ‘능소버들’이라 하였고, 이것이 후에 ‘능수버들’이 되었다고 한다.

천안삼거리 공원에서는 매년 다양한 행사가 펼쳐지는 ‘천안 흥타령 춤 축제’가 열리고 있다.

◆능수버들 이야기

가느다란 가지가 길게 늘어지는 능수버들은 수양버들이라고도 한다. 물을 좋아하여 물가나 들에서 잘 자라는 능수버들은 연둣빛 새싹으로 여러 봄꽃보다 먼저 봄소식을 알려주기도 한다. 가물거리는 아지랑이 사이로 늘어진 버들가지는 부드러움과 연약함으로 가냘픈 여인의 상징이 되기도 한다.

버들에 얽힌 가장 많은 주제는 사랑과 이별이다. 옛사람들이 연인과 헤어질 때 이별 장소는 흔히 나루터가 되었다. 피어오르는 물안개에 눈물을 감추고, 나루터에 널리 자라는 버들가지를 꺾어주면서 가슴과 가슴으로 사랑을 주고받았다. 이렇게 버들이 이별의 증표가 된 것은 중국의 ‘파교절류(橋折柳)’ 고사와 관련이 있다.

당나라의 수도 장안의 동쪽에는 ‘파수’란 강이 흐르고, 거기 놓인 다리를 ‘파교’라 했다. 당시 대부분의 사람들은 파교에서 이별을 했고, 늘어진 수양버들 가지를 꺾어 떠나는 사람에게 건넸다. 버들의 강인한 생명력을 빌려 떠나는 사람의 평안과 무사를 기원하는 일종의 주술적인 뜻도 있었다. 이후 명나라 때 널리 읽힌 탕현조(1550~1617)의 희곡 ‘자채기(紫釵記)’에 나오는 여주인공 정소옥이 애인 이익에게 버들가지로 장도를 빌어주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후 파교의 버들은 이별의 징표로 자리매김했다.

그리하여 많은 시인들이 버드나무를 이별과 연관시켜 읊게 되고, 버들가지를 꺾어주며 애타게 님을 떠나 보내는 정을 읊은 한시의 형태를 ‘절양류(折楊柳)’라 하기도 했다. 이런 작품은 보통 버들이 잘 자라고 배가 드나드는 항구나 강을 배경으로 한다.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곳은 중국 사신들이 오가던 대동강과 노량진의 강변 등이다. 능수버들로 유명한 천안도 이별의 상징적인 장소다.

‘비 그친 긴 둑에는 초록빛 짙은데(雨歇長堤草色多)/ 임 보내는 남쪽 포구에 슬픈 노래 퍼지네(送君南浦動悲歌)’라는 정지상의 시 ‘송인(送人)’은 대표적 절양류 시다. 이 시의 첫 구절 ‘초록빛(草色)’은 버들잎의 색깔을 말한다.

조선의 대표적 풍류 시인 백호(白湖) 임제는 ‘패강가(浿江歌)’라는 시를 남겼다.

‘이별하는 사람들이 날마다 꺾는 버들(離人日日折楊柳)/ 천 가지 다 꺾어도 가는 님 못 잡겠네(折盡千枝人莫留)/ 어여쁜 아가씨들의 많은 눈물 탓인 듯(紅袖翠娥多少淚)/ 해 질 무렵 부연 물결도 시름에 잠겨 있네(煙波落日古今愁)’

실학자 이삼환(1729~1814)의 시 ‘절양류(折楊柳)’도 있다.

‘수양버들 늘어져서 땅을 쓸 듯한데(楊柳依依拂地垂)/ 임에게 드리려고 두어 가지 꺾었다네(爲君攀折兩三枝)/ 이별의 정은 바람 앞의 잎과 같아서(離情亦似風前葉)/ 이리저리 나부껴 가눌 길 없어라(搖蕩東西不自持)’

버들은 남녀 간의 사랑뿐만 아니라 불교에서 말하는 자비와도 연관이 있다. 양류관음도와 수월관음도는 관세음보살이 버들가지를 들고 있거나 병에 꽂아 두고 있는 형식이다. 이는 버들가지가 실바람에 나부끼듯이 미천한 중생의 작은 소원도 귀 기울여 듣는 보살의 자비를 상징적으로 나타낸 것이다. 버들가지가 꽂혀 있는 관세음보살의 물병 속에 든 감로수는 고통받는 중생에게 뿌려주기도 한다. 버들의 뿌리는 감로수를 깨끗이 하는 능력이 있다고 믿어서다.

버들은 조선의 신덕왕후가 태조 이성계와 만나는 과정에도 등장한다. 정조 23년(1799) 임금은 “일찍이 고사를 보니, 왕후께서 시냇물을 떠서 그 위에 버들잎을 띄워 올리니 태조께서 그의 태도를 가상하게 여겨 뒤에 결혼을 하게 되었다”고 하였다. 급히 물을 마셔서 체할까봐 버들잎을 띄운 지혜를 높이 사서 둘째 왕비로 맞이한 것이다. 이 이야기는 고려 태조 왕건이 신혜왕후를 만나는 이야기에도 나온다.

글·사진=김봉규기자 bgkim@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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