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응상의 ‘천 개의 도시 천 개의 이야기’] 스페인 론다(Ronda)

  • 인터넷뉴스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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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7-05-05   |  발행일 2017-05-05 제37면   |  수정 2017-05-05
절벽이 짊어진 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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릴케가 말한, 절벽이 지고 있는 하얀 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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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에바스 델 솔’, 즉 태양의 동굴. 동굴 아래에 카페가 늘어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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론다로 가는 도중에 만난 안달루시아 평원의 해바라기 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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협곡 아래에서 올려다본 누에보 다리.

스페인 안달루시아 지역의 대표적인 관광도시로는 플라멩코의 고장 세비야를 비롯해 메스키타로 유명한 코르도바, 피카소의 고향이자 지중해 연안의 국제적 휴양지인 말라가, 그리고 알람브라 궁전으로 대표되는 그라나다를 꼽을 수 있다. 이런 도시들에 뒤지지 않을 만한 곳이 론다이다. 교통도 편하지 않고 도시도 크지 않아서 지나치기 쉽지만 의외로 이 도시를 안달루시아 지역 관광의 첫손가락에 꼽는 사람이 많다. 세비야나 말라가에서 버스나 기차 같은 대중교통을 이용하면 2시간에서 3시간 정도면 도착할 수 있지만 경험적으로 렌터카를 이용할 것을 추천한다. 그것은 론다로 가는 도중에 만나게 되는 아름다운 안달루시아 평원과 자동차 여행이 아니면 가보기 힘든 동굴마을 세테닐을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 일행은 세비야에서 자동차를 렌트하여 론다로 향했다. 두 시간여를 달렸을 때 우리를 붙든 마을이 바로 세테닐(Setenil de las Bodegas)이다. 론다가 협곡 위에 다리를 놓고 마을을 일군 도시라면 세테닐은 반대로 협곡 아래 바위를 뚫고 집을 지은 독특한 마을이었다. 그래서 구불구불한 길을 한참이나 내려가서야 마을 입구를 만날 수 있었다. 이곳은 이슬람이 지배하던 시절, 가톨릭교도들이 일곱 번이나 공격하였으나 실패한 지역이라고 해서 라틴어 ‘Septem(일곱)’과 ‘Nihil(없다)’이 합쳐져 ‘Setenil’이 되었다고 한다. 또 ‘Bodegas’는 ‘술 저장고’라는 뜻인데, 로마시대부터 유명한 와인 산지였으므로 이곳의 주거 형태와 잘 어울리는 이름이라 하겠다. 이곳을 관통하는 트레호 강에 의해 침식된 동굴 주거지가 이 지역의 가장 특징적인데, 외벽에 하얀 회칠을 해서 일반적인 스페인의 ‘하얀 집’처럼 보이지만 집안에 들어가면 바위를 그대로 천장과 벽으로 이용하고 있다. 이런 집들이 미로 같은 좁은 골목을 만들어 자꾸만 사람들을 끌어당긴다. 인구가 3천여명에 불과한 작은 마을이지만 ‘쿠에바스 델 솔(Cuevas del Sol)’, 즉 태양의 동굴이라고 부르는 양지(陽地) 쪽에는 카페나 상점들도 있다. 우리 일행이 한동안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던 식당도 그러했다. 거의 모든 메뉴가 1유로인 ‘착한 카페’로 사람을 한없이 느긋하고 여유롭게 만드는 그곳의 기억들을 우리는 ‘1유로의 행복’이라고 부르며 여행 내내 꺼내먹곤 했다.

안달루시아 지역의 첫손 꼽히는 관광지
세비야서 車로 2시간 ‘동굴마을 세테닐’
바위를 천장·벽 삼은 협곡 아래 집 독특
끝없는 해바라기 천지 평원은 ‘황홀경’

협곡 위 해발 780m 절벽도시 론다 도착
물레타 투우가 시작된 신시가지 투우장
150m 협곡 ‘누에보다리’ 건너 구시가지
릴케·헤밍웨이·가우디 작품의 모티브


세테닐의 행복한 기억은 론다로 가는 20여㎞의 안달루시아 평원으로 이어졌다. 끝도 없이 이어진 광활한 해바라기 천지가 갑자기 눈에 들어온 것이다. 자동차 여행의 묘미다. 자동차로 오지 않았으면 만나지 못했을 풍경이다. 푸른 하늘의 뜨거운 태양을 향해 끝도 없이 펼쳐진 해바라기의 간절한 군무. 이 인상적인 광경은 여행이 모두 끝난 후에도 한동안 뇌리를 떠나지 않았다.

릴케가 ‘하늘 정원’이라고 했던 도시, 헤밍웨이가 ‘세상에서 가장 로맨틱한 도시’라고 했던 론다에 도착했다. 3만5천의 인구를 가진 론다는 로마와 이슬람의 지배를 거쳐 나폴레옹의 침공과 스페인 내전을 겪은 고난의 역사를 품고 있다. 도시를 가로지르는 과달레빈 강이 만든 엘 타호 협곡 위 해발 780m 고지대에 세워진 절벽 도시이다. 이 협곡을 기점으로 북쪽은 신시가지인 엘 메르카디요(El Mercadillo), 남쪽은 옛날 아랍인들이 살았던 구시가지 라 시우다드(La Ciudad)이다.

신시가지에서 가장 눈길을 사로잡는 것은 투우장이다. 말을 타고 창으로 찌르던 전통 투우 방식에서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물레타(붉은 천)를 흔들어 소를 흥분시키는 방식의 투우를 창시한 곳이 바로 이곳 론다이다. 1785년에 건설한, 에스파냐에서 가장 오래된 투우장 중 하나인 론다 투우장에서는 지금도 가끔씩 투우 경기가 열린다고 한다. 물레타를 창시한 전설적인 투우사 로메로의 동상이 투우장 정문에 서 있다. 론다 태생인 그는 은퇴할 때까지 한 번도 진 적이 없었으며, 자신은 상처 하나 입지 않고 일생 동안 5천585마리의 소를 죽였다고 한다. 투우장의 첫인상은 피와 함성으로 뒤덮였던 곳이라고는 생각되지 않는 고요함과 단아함이었다. 그저 방과 후 홀로 남겨진 학교 운동장 같은 느낌이다.

투우장을 나와 스페인 광장을 지나면 절벽 위에 우뚝한 국영호텔 파라도르 론다(Parador Ronda)가 나오고, 그 옆으로 론다를 대표하는 누에보 다리(Puente Nuevo)가 보인다. 광장에서 길과 함께 보이는 누에보 다리는 그저 좁은 도로였지만 다리 입구에서 갑자기 떨어지는 타호 협곡의 아찔한 높이를 보면 그제야 이 도시가 ‘하늘 정원’임을 실감하게 된다. 이 다리를 건너면 구시가지이다. 론다의 신시가지와 구시가지는 150m 깊이의 타호 협곡으로 인해 가깝고도 먼 사이였다. 그래서 필립 5세는 두 마을을 가장 가깝게 잇는 협곡 정상에 직경 35m의 아치형 다리를 만들고자 했다. 그러나 8개월의 공사가 진행되었을 때 50여명의 사상자를 내며 다리는 무너져버렸다. 그 후 몇 년이 지난 1751년에 안달루시아의 건축가인 호세 마르틴이 아래쪽부터 단단히 돌을 쌓아 42년 만인 1793년에 지금의 새로운 다리, 즉 누에보 다리를 완성한 것이다. 그러나 정작 호세 마르틴은 자신이 만든 이 다리에서 추락사 하였다. 가장 쉽게 누에보 다리의 절경을 즐길 수 있는 방법은 파라도르 론다에서 시작되는 ‘헤밍웨이 산책로’를 따라 전망대까지 걷는 것이다. 그러나 조금 힘들더라도 절벽 아래에서 올려다보며 누에보 다리의 전체 모습을 담아보기를 추천한다. 구시가지 골목길을 따라 계곡 아래로 내려가면 누에보 다리를 조망할 수 있는 뷰 포인트가 있다. 이곳에서 보는 누에보 다리는 인간 역사(役事)의 위대함을 느끼게 한다.

다리 아래로 내려가는 비탈길에서는 또 이슬람 역사의 흔적들을 만날 수 있다. 적의 해골에 포도주를 따라 마셨다는 무서운 무어 왕의 별장 ‘카사 델 레이 모로’나 이슬람의 마지막 왕이 살았던 ‘몬드라곤 궁전’ 등은 역사의 의미를 새기고 만나지 않으면 그냥 지나칠 수밖에 없을 정도로 소박하고 초라하기까지 하다. 필립 5세의 문도 그저 동네 초입의 표지처럼 소담스럽다. 궁전이나 황제 같은 역사적 단어가 주는 위압감은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다. 이 절벽 마을에 자리한 유적들이 이처럼 낮고 소박한 것은 자리하고 있는 곳이 이미 충분히 높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한동안 이곳에 살았던 독일의 시인 라이너 마리아 릴케는 “거대한 절벽이 등에 작은 마을을 지고 있고, 뜨거운 열기에 마을은 더 하얘진다”(조각가 로댕에게 보낸 편지 중에서)라고 이곳을 노래했다.

론다의 이런 모습이 예술가들의 영감을 자극하는 것일까? 헤밍웨이는 소설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를 이곳에서 집필하였다. 헤밍웨이의 스페인에 대한 애정은 투우로부터 시작되었다. 1925년에 발표한 그의 첫 장편 소설 ‘해는 다시 떠오른다’의 배경도 투우다. 투우에 대한 헤밍웨이의 관심은 1932년 출간된 ‘오후의 죽음’에서 절정에 이른다. 그는 이 책에서 “전쟁이 끝난 뒤인지라 삶과 죽음, 다시 말하면 격렬한 죽음을 볼 수 있는 곳은 오로지 투우장뿐이었고, 나는 그것을 잘 살필 수 있는 스페인에 몹시 가고 싶었다”라고 토로하고 있다. ‘시민 케인’으로 유명한 영화감독이자 배우였던 오슨 웰스 역시 ‘이곳에서 죽기를 택한 진정한 론다인’(론다에 세워진 흉상의 비문 중에서)이었다. 투우장 부근에 이 두 사람의 흉상이 세워져 있고 이들의 이름을 딴 길도 있다. 천재 건축가 가우디가 바르셀로나의 ‘성가족 성당’을 설계할 때 영감을 받은 곳도 이곳이라고 한다. 성당의 뾰족한 첨탑 모티브가 론다 협곡 ‘엘 타오’의 절벽이라는 것이다. 릴케는 그가 머물렀던 레이나 빅토리아 호텔에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다.

“나는 꿈의 도시를 찾아다녔다. 그리고 마침내 그곳을 론다에서 찾았다.” 대구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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