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네 토크] 영화 ‘1987’ 연희 役 김태리

  • 윤용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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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7-12-29   |  발행일 2017-12-29 제43면   |  수정 2017-12-29
“첫 촬영부터 실제 같은 공포감…‘이게 나라인가’ 내내 화나고 답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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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다고 세상이 바뀌진 않아요.” 서울 변두리 구멍가게에서 엄마, 외삼촌과 함께 살고 있는 꿈 많은 새내기 대학생 연희. 교도관인 외삼촌 부탁으로 마지못해 옥중서신을 대신 전달하고 있지만, 식구 생각은 안하고 위험한 일을 계속하는 삼촌이 늘 걱정되고 마뜩잖다. 그런 그녀가 첫 미팅을 하러 나간 명동 거리에서 얼떨결에 시위대에 휘말린다. 데모를 하는 선배와 동기들이 무모해 보이고 늘 방관자적 입장이던 연희는 이를 통해 참담한 실상을 마주하게 되고, 그들이 옳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렇기에 그녀의 갈등 또한 깊어진다.

영화 ‘1987’은 권력 아래 숨죽였던 사람들의 크나큰 용기가 만들어낸 뜨거웠던 그해, 1987년을 담아낸다. 6월 민주항쟁을 촉발시킨 ‘박종철군 고문치사 사건’이 시작이다. 그 한가운데에 ‘아가씨’(2016)로 인상적인 데뷔식을 치른 김태리가 있다. 그는 당시의 보편적 시민을 대표하고 그들의 감정을 대변하는 연희를 연기했다. 평소 일상 이야기 속의 보편적인 인물을 연기해보고 싶었다는 김태리에겐 더없이 반가운 만남인 셈. 더욱이 신인답지 않은 강한 의지와 당찬 면모까지 갖춘 만큼 항상 마음이 단단해 보여야 하는 연희 캐릭터와의 싱크로율은 더할 나위 없다. 그렇게 김태리는 진실을 알리기 위한 많은 사람의 작은 노력이 나비효과처럼 물결로 이루어진 1987년으로 관객을 인도한다. 아직 풋내기 배우지만 자신과 캐릭터의 매력을 어떻게 승화시킬지 잘 알고 있는 그이기에 이 미션은 성공적이다.

▶대한민국 현대사의 가장 드라마틱하고 격동적이었던 1987년을 다뤘다. 이후의 세대로서 영화를 접해본 느낌은 어떤가.

“이번 광화문 평화 촛불집회 때 많은 사람이 들고 있던 피킷 문구 중 하나가 ‘이게 나라냐’였다. 이 영화를 찍으면서 그 말에 굉장히 공감했다. 보통은 나 하나, 내 가족만 잘살면 그만이라는 생각으로 눈과 귀를 닫는다. 하지만 극 중 교도관이던 외삼촌(유해진)은 불의에 항거하기 위해 사건의 진실을 담은 옥중서신을 전달하다 경찰에 붙잡혔다. 더 화가 나는 건 일언반구의 말도 없이 가족이 보는 앞에서 사람을 개 패듯이 때리고 끌고 간다. 그리고 악랄하게 고문을 자행하고 가족은 생사여부도 알지 못한다. ‘이게 나라인지’ ‘내가 대체 어디에서 살고 있는지’라는 생각을 할 수밖에 없다. 나 역시 연희처럼 촬영하는 내내 화가 나고 답답했다.”


작년 영화 ‘아가씨’로 스물여섯 늦깎이 데뷔
박종철사건서 6월항쟁까지 그린 ‘1987’ 선택
강한 의지·당찬 면모로 배역과 높은 싱크로율

“감독 ‘등장인물 중 가장 보통의 사람 대변’ 강조
양심 있고 인간적이지만 사태 외면하는 이유 등
잘 전달하려 신경 썼고 엔딩까지 힘 안배 고민 커
당시 상황과 맞닥뜨리면 나도 어찌 변할지 몰라”



▶‘아가씨’ 이후 많은 러브콜이 들어왔을 텐데 ‘1987’을 선택한 이유는 뭔가.

“이 작품에 앞서 ‘리틀 포레스트’ 출연을 먼저 결정했는데 소속사에선 차기작으로 내가 묻어갈 수 있는 작품을 찾아본다고 했다. 그게 ‘1987’이다. 하지만 절대 묻어가는 배역이 아니었다. 부담감은 있었지만 이를 상쇄시킬 만큼 인물들이 에너지를 더하고 더해 굴러가는 이야기라는 점이 좋았다.”

▶어두운 과거를 다룬 이야기지만 전반부는 사이다 역할을 하는 서울지검 공안부장 역의 하정우, 후반부는 이한열 역의 강동원과의 풋풋한 멜로가 있어서 이야기를 무겁지 않게 끌고 간다. 그 점에서 젊은 관객에게도 충분히 어필할 것 같다.

“그렇긴 하지만 아무래도 비슷한 연장선상에 있는 ‘택시운전사’보다는 홍보면에서도 좀 더 어둡게 다가가기 때문에 선입견을 가질까봐 걱정이 된다. 숨 쉴 구멍이 많은 영화인 데도 말이다. 재미와 감동을 많이 느낄 수 있을 거라고 자신하기 때문에 정말 많이 보러 왔으면 좋겠다.”

▶박종철과 이한열 열사는 알고 있었나.

“솔직히 이한열 열사만 알고 있었다. 이 영화를 접하고 나서야 이런 일 때문에 6월 민주항쟁이 시작됐다는 것을 새롭게 알았다. 극 중 연희가 이한열 열사 사진을 신문에서 발견하고 대중이 운집한 광화문 광장으로 가는 장면이 있다. 그 장면을 찍기 전에 당시 자료를 정리하다가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들었다. 얼마나 무서웠을까. 그도 희망찬 미래를 꿈꾸며 대학에 입학한 사람일 텐데. 작은 분노에서 시작해 지금은 목숨까지 위태로운 상황과 맞닥뜨렸으니 얼마나 두렵고 무서웠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정말 가슴이 아팠다.”

▶극 중 어머니와 남영동 앞에서 시위를 하다 봉고차에 실려간다. 이후 외딴 시골에 떨어뜨려 놓는 장면이 있는데 그게 첫 촬영이라고 들었다. 기분이 어땠나.

“첫 장면부터 힘들었다. 엄마와 생이별하고 어디로 끌려가는지도 모르는 그런 공포스러움이 실제처럼 느껴졌다. 그때 ‘아, 감독님이 이런 스타일이구나’라고 느꼈다. 인정사정 없고 포기하는 법이 없다. 하지만 겉으로는 끝까지 온화하게 ‘괜찮아? 괜찮으면 한 번 더 갈까’하는 스타일이다. 그래서 매번 마음을 단단히 먹고 촬영에 임했다.”(웃음)

▶만약 당시 연희의 상황이라면 어떻게 행동했을 것 같나.

“연희는 선뜻 행동으로 나서지 않고 머뭇거린다. 나도 비슷할 것 같다. 강한 신념으로 운동에 나서고, 뭔가 바꿔보겠다는 의지보다는 다들 하니까 나도 따라가야겠다는 생각으로 분위기에 휩쓸리는 스타일이다. 하지만 당시 상황과 진짜 맞닥뜨리게 된다면 나도 어떻게 변할지는 모르겠다.”

▶30년 전 상황과 작년의 촛불집회가 비슷한 점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대중이 힘을 모아 잘못된 권력구조를 바꿨다는 게 닮았다. 은폐하고 숨기는 것에 급급하다보면 거짓말이 거짓말을 낳고, 선의의 사람에게 피해를 입힌다. 때문에 이를 또 다른 폭력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폭력이 물리적인 것도 있지만 정신적으로 가해지는 폭력이 있을 수 있는데, 바로 물밑으로 전해지는 간접적인 폭력이다. 내가 대학교를 다닐 때에도 이미 그런 폭력과 부패가 만연했고 그게 알게 모르게 쌓여서 대중에게 더 큰 분노와 배신감으로 작용했다고 생각한다.”

▶연기에서 좀더 초점을 맞춘 게 있다면.

“은폐를 지시하는 대공수사처 박 처장(김윤석)도 나름의 이유가 있듯이 연희도 무작정 외면하고 귀닫는 사람이 아니라 나름의 이유가 있음을 보여주고 싶었다. 양심이 있고 인간적인 사람이지만 그렇게 차단하고 벽을 쌓는 이유를 어떻게 하면 잘 전달할 수 있을까에 초점을 맞췄다. 그런데 삼촌하고 싸우는 장면에서 대사로만 그게 잠시 언급되니까 걱정도 되고 안타까웠다. 내가 시나리오를 읽고 느꼈던 것처럼 관객도 논리적으로 영화를 감상했으면 했는데. 그래도 다행인 건 우리 영화는 감정에 따라, 이야기 흐름에 따라 얹히고 얹혀서 처음 의도한 대로 굴러가는 힘이 있다는 점이다.”

▶감독은 당신에게 어떤 주문을 했나.

“일단 내가 생각한 것보다 연희를 되게 중요한 캐릭터로 보고 있었다. 등장인물 중 가장 보통의 사람을 대변하니까 중요하다고 말했다. 대부분의 사람은 소심한 편이다. 이 사태에 분노해 목소리를 내고 싶지만 선뜻 나서기는 쉽지 않다. 세상은 용기있는 사람이 대다수가 아니다. 그런 인물을 연희가 대변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신경이 많이 쓰였다. 어떻게 하면 엔딩까지 힘을 잘 안배해서 끌고 갈 수 있을지에 대해 고민을 많이 했다.”

▶신인배우로서는 적지 않은 스물여섯살에 데뷔했다. 조바심은 없었나.

“선천적으로 좀 느긋한 편이다. 다만 최근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을 봤는데 배우 장첸이 열네살 때 찍은 첫 작품이라고 했다. 그전까지는 나이에 대한 생각을 한 적이 없었는데, 나도 그 나이 때에 내 필모를 장식하는 어떤 작품이 있었으면 좋았겠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게 지금도 부럽다.”

▶‘아가씨’ 이후 크게 달라진 건 뭔가.

“바깥 출입이 조심스러워지고 작품선택의 폭이 많이 넒어졌다. 감독님과도 편하게 얘기할 수 있는 처지가 된 것 같다. 그런데 내년에 드라마 ‘미스터 선샤인’이 방영되면 그땐 더 많이 바뀔 거라 했다. 바깥 출입은 조심스러운 정도가 아니라 아예 못한다고 하니 너무 불편하고 무섭기까지 하다. 스타덤은 정말 나하고는 안 맞는 단어인데 벌써부터 걱정이다.”

▶어떤 배우가 되고 싶나.

“좋은 배우가 되고 싶다. 좋은 배우라 함은 좋은 연기를 해야 하고 그러려면 많은 경험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급히 서두르지 않고 차근차근 경험을 쌓아갈 생각이다. 그리고 지치지 않고 일을 좀더 즐겁게 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아직은 그런 여유를 찾을 만큼 경력과 내공이 부족하니 이 또한 차분히 단련해 나갈 것이다.”

글=윤용섭기자 hhhhama21@nate.com
사진제공=김현수 dada2450@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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