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험한 돌할매, 맛있는 ‘들밥’

  • 이춘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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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8-06-01   |  발행일 2018-06-01 제33면   |  수정 2018-06-01
[이춘호기자의 푸드로드] 영천
검정 타조알 모양 화강암, 무게는 10㎏ 정도
소원 빈 후 들지 못하면 성취…전국구 이름값
돌할매 기운 받은 후 영천들밥 아지매와 만남
영험한 돌할매, 맛있는 ‘들밥’
영천 청통면 은해사와 교감하고 있는 팔공산 갓바위. 그 바위가 사용했던 육중한 돌염주 같은 포스의 영천 돌할매. 언뜻 심우주에서 지구로 놀러온 운석 같다. 무게는 10㎏. 이 돌은 들리지 않아야 소원이 이뤄진단다. 그래서 25년 전부터 전국구 기도처로 유명해졌고 덕분에 돌할매공원으로 발전할 수 있었다.
영험한 돌할매, 맛있는 ‘들밥’
조롱박에 보리밥, 풋나물, 부침개 등을 곁들인 ‘영천들밥’.

영천(永川). ‘긴 하천’이란 지명. 그 하천은? 그렇다. ‘금호강’이다. 영천은 고려초 ‘영주’로 불렸다. 그러다가 조선 태종 13년(1413) 비로소 ‘영천’이란 지명을 갖게 된다. 여느 고장은 알록달록한 관심거리가 많다. 그런데 내게 영천은 그냥 ‘무색무취한 따분한 고장’으로 보였다. 어떤 때는 경산, 어떤 때는 군위처럼 보일 때도 있다.

“영천은 무기(武氣)보다 문기(文氣)가 더 초롱거려.”

바로 ‘포은 정몽주’ 때문이다. 고려유학과 조선유학의 경계에 핀 연꽃 같은 존재, 그가 바로 포은이다. ‘동방이학지조(東方理學之祖)’. 영덕에서 태어난 목은 이색은 포은을 그렇게 인정했다. 한국 성리학의 종장이란 뜻이다. 사람들은 “왜 포은인가”라며 묻는다. 이유가 있다. 그가 한국 성리학사상 첫 ‘충신·효자의 대명사’였기 때문이다. 공자의 원시유학에 이기(理氣)사상체계가 가미된 주자의 성리학, 그게 안향을 통해 한국으로 스며들어온 뒤 포은이란 초거성을 만나면서 비로소 웅비하게 된다. 퇴계 이황과 남명 조식을 배출한 영남학파의 원류 역시 포은이랄 수 있다.

포은은 부모가 돌아갔을 때 6년간 ‘시묘(侍墓)살이’를 엄수했다. 임고면 우항리 생가에서 2㎞ 떨어진 양항리, 현 임고서원 부근에 짚으로 엮은 ‘여막(廬幕)’을 지었다. 매일 조석으로 거기서 묘소까지 오갔다. 십리길이다. 당시 사대부는 불교 예법에 따라 통상 100일 만에 탈상했다. 조정도 감동했다. 그의 생가 마을에 ‘효자리(孝子里)’란 표석을 세워준다. 임고서원 포은연수관 옆에 가면 포은의 여막이 재현돼 있다.

포은을 생각하면 그 어머니 영천이씨의 ‘백로가’가 생각난다. ‘까마귀 싸우는 골에 백로야 가지 마라~’. 그런 어머니 영향일까. 포은은 이방원의 ‘하여가’를 ‘단심가’로 응수했다. 하지만 포은은 부모 곁에 묻히지 못한다. 개성에서 격살된 포은. 그의 시신은 추종자에 의해 수습된다. 이후 이방원에 의해 영의정에 추증된 포은의 유해는 고향으로 돌아온다. 그런데 변고가 생긴다.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모현면 능곡로 45에 도착할 즈음 명정이 돌풍에 날려 현재 묘역 언저리에 떨어진다. 하늘의 뜻이었다. 포은은 용인에 묻히게 된다. 곳곳에 서원이 봉헌된다. 개성에는 숭양서원, 용인에는 충렬서원, 포항에는 오천서원, 언양에는 반구서원. 포은의 위세 때문인지 관련 지자체마다 앞다퉈 ‘포은마케팅’을 벌인다.

임고서원에 도착했다. 지열이 지글거리고 있다. 오뉴월 뙤약볕이 재현된 선죽교 다리 위로 비수처럼 내리꽂히고 있었다. 수령 500년의 노거수 은행나무가 승천하는 용뿔 기세로 서 있다. 포은의 삶을 음미하다보니 갑자기 푸드로드를 여행하는 기자의 처지가 더없이 딱해 보였다. 아무튼 임고서원 앞은 서원의 울림과 별로 상관없이 굴러간다. 커피숍과 그리고 토박이들이 자주 이용할 것 같은 시골 다방, 편의점, 은행…. 자본의 기세가 포은의 절조와 조금은 허탈하게 부딪히고 있었다. 아무튼 길은 자연스럽게 북안면 관리 ‘돌할매공원’으로 향한다. 돌할매. 처음엔 돌 갖고 점치는 무당할매인 줄 알았다. 아니었다. 그냥 영험한 돌이었다. 유명한 돌 때문에 그 언저리에 공원이 생겨났을 정도다. 돌할매는 한국 토속신앙의 결정체다.

검정 타조알 모양의 화강암. 어느 심우주에서 날아온 검은 ‘운석’ 같았다. 무게는 대략 10㎏. 지름은 25㎝ 남짓. 감실처럼 움푹 파인 고깔산(冠山) 층석 한편에 봉안돼 있다. 이젠 방송도 많이 타 전국구 돌이 돼버렸다. 보호전각까지 지어놓았다. 그래서 돌할배, 돌아지매 등 악덕상혼을 앞세운 제2, 제3의 돌할매까지 생겨난다. 다들 ‘짝퉁’이다. 그렇게 무겁지 않다. 초등학생 정도의 근력만 있어도 들 수 있다. 할매의 ‘신탁’은 이렇다. 일단 합장을 세 번 하라. 아무 생각없이 돌을 들어보라. 생년월일 주소 나이 성명을 말하고 소원을 말하라. 다시 돌을 들어보라. 돌이 더 무겁거나 들리지 않으면 소원성취 개봉박두다. ‘돌이 들리지 않아야 소원이 이뤄진다.’ 참 재밌는 조건이다. 이건 어른 몫이 아니다. 아이의 몫이다. 돌은 매번 ‘동심(초심)’으로 돌아가라고 가르친다. 과학적인 잣대는 돌할매한테는 무용지물.

처음엔 조금 떨어진 하천변 층석 위에 아무렇게 놓여져 있었다. 사라호 태풍 때 유실됐다가 되찾았다. 이 돌의 시작은 아주 소박했다. 주민들의 길흉화복을 점칠 때 재미삼아 들어보던 일종의 ‘치성석(致誠石)’이었다. 25년 전부터 입소문이 난다. 관광객이 몰려오기 좋게 농로도 포장된다. 이 과정에 땅주인과 지역민이 돌할매 관련 송사를 벌인다. 결국 주민이 이긴다. 그리고 할매는 지금 자리로 이전된다. 그날이 음력 6월15일. 이때 마을에서 동제를 올려준다. 돌할매지 보존관리위원장 김상도씨(72). 그가 돌할매 제문을 보여준다. 위생을 위해 자주 물수건으로 닦아준다. 한번 도난당할 뻔 했기 때문에 지금은 24시간 보호해주고 있다. 난 왠지 모르게 돌을 들고 싶지 않았다. 그냥 남들이 드는 광경만 훔쳐 봤다.

돌할매공원 맞은편에서 갈증을 날렸다. 돌할매슈퍼에서 홍삼이 들어간 천원짜리 돌할매감주를 사먹었다. 시장기가 밀려왔다. 돌할매의 기운을 조금 건네받았을 것 같은 국립 보현산천문대 아래에서 조각보처럼 살아가는 ‘영천들밥아지매’를 만나러 길을 떠났다.
글·사진=이춘호기자 leekh@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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