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쏙쏙 인성쑥쑥] 책을 읽다가 묘하게 와 닿는 생각이 떠오르면 빨리 적어둔다(妙契疾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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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8-10-22 08:20  |  수정 2018-10-22 08:20  |  발행일 2018-10-22 제18면
[고전쏙쏙 인성쑥쑥] 책을 읽다가 묘하게 와 닿는 생각이 떠오르면 빨리 적어둔다(妙契疾書)

가을이 깊어갑니다. 등화가친의 계절입니다. 등불을 가까이 하여 글 읽기에 아주 좋은 계절입니다. 필자의 어릴 적 사랑방 윗목 서상에는 경서들과 치부책과 자리끼가 놓여 있었습니다. 치부책은 글로 간단히 적어두는 쪽지기록장을 말합니다. 자리끼는 밤에 자다가 마시기 위해 잠자리의 머리맡에 준비해 두는 물입니다.

한밤중에도 아버지는 일어나서 등잔불을 켜고 낭랑하게 책을 읽었습니다. 그리곤 종이쪽지에 무언가를 자꾸 적었습니다. 틈만 나면 자식들에게 ‘총명불여둔필(聰明不如鈍筆)’이라 말했습니다. ‘아무리 총명한 머리의 기억력도 삐뚤빼뚤한 글씨보다 못하다’는 뜻입니다.

이익이 쓴 성호사설에 ‘묘계질서(妙契疾書)’라는 글이 있습니다. ‘묘계(妙契)’는 ‘책을 읽다가 묘하게 와 닿는 생각’을 말합니다. ‘질서(疾書)’는 ‘빨리 적어둔다’는 뜻입니다. 이 말은 중국 송나라의 장횡거 선생이 ‘정몽(正蒙)’이라는 책을 쓸 때 머무는 곳마다 붓과 벼루를 준비해 두고 한밤중이라도 터득한 것이 있으면 일어나 등불을 켜고 기록했습니다. 그렇게 빨리 써두지 않으면 바로 잊어버릴까봐 염려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후배인 정자는 ‘이와 같은 방법은 익숙하지 못하다’고 장횡거 선생을 비웃었습니다. 정자가 말한 뜻은 생각이 반복되면 빨리 써 놓지 않더라도 저절로 잊어버리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그렇게 말한 것입니다. ‘질서(疾書)는 묘계(妙契)할 수 없다’는 논리인 듯합니다.

이익도 많은 경서들을 보면서 생각하는 바가 있으면 바로 의문이 드는 것을 기록해 두었습니다. 그리고 제목을 빨리 적어 둔다는 의미의 ‘질서(疾書)’라고 했습니다. 맹자질서, 논어질서, 중용질서, 대학질서 등으로 붙였습니다. 그런데 주변의 사람들 생각은 책 제목을 함부로 바꾼 것은 어딘지 겸손하지 못한 태도로 보였던 듯합니다. 이익을 비판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익의 제자 윤유장이 “송나라의 학자 호굉은 맹자의 ‘지언(知言)’을 제목으로 문집을 냈다. 성인인 맹자의 말씀을 제목으로 삼은 것은 겸손하지 못했다. 그러나 주자(朱子)도 호굉이 제목 붙인 ‘지언’에 관해서는 비판하지 않았다. 다만 내용이 잘못된 부분에 대해서만 지적했다”고 말했습니다.

스승 이익이 사서삼경과 경서들에 ‘~질서(疾書)’라고 제목을 붙인 것에 대해서 자기 시대를 변혁할 새로운 이념과 사상을 재해석한 것이라고 제자 윤유장은 거들었던 것입니다.

카린 제임스 인디애나대 교수도 “어떤 내용의 글쓰기든 사람 뇌에는 엄청난 도움을 준다. 글쓰기를 타이핑하기보다 직접 손으로 쓸 때에 더 많은 정보가 획득된다. 손으로 쓰는 글씨가 뇌의 주요 능력을 발달시키고 읽기의 정보습득능력에서 큰 도움을 준다”고 했습니다. 미국 초등학교에서는 알파벳 필기체 글씨쓰기가 부활하고 있다고 합니다. 배움이란 근본을 힘쓰는 것을 귀하게 여겨야 합니다. 여러 방면으로 학식이 넓은 것은 해롭지 않습니다. 항시 책을 읽다가 번쩍 떠오른 생각을 빨리 쓰는 것은 좋은 방법입니다. 우리나라에도 신언서판(身言書判) 교육이 있었습니다. 박동규(전 대구 중리초등 교장·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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