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숙의 실과 바늘 이야기] 천개의 해가 된 바늘꽂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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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9-02-15   |  발행일 2019-02-15 제39면   |  수정 2019-02-15
고단했던 어머니의 삶 꽃으로 승화시킨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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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화 닭실댁 故 권영규 어머니
여생 공들이며 만든 바늘꽂이 1천600개
형형색색 남긴 아름다운 마음의 흔적
자투리마저 귀하게 대접하며 만들어
단아하게 쓴 일기장 성실한 삶의 행간
사소한 일상 소중히 받들고 채워나가


싸늘한 날씨에도 불구하고 나뭇가지들 틈에 연둣빛이 어리는 것을 보았다면 봄을 기다리는 너무 성급한 마음 때문일까. 봄빛을 숨겨둔 채 고요히 차디찬 겨울바람을 견디고 있는 나뭇가지들을 바라보며 문득 한 어머니를 떠올린다. 1천600개의 바늘꽂이를 만드신 봉화 닭실댁(酉谷宅) 고(故) 권영규 어머니다. 그의 전시회는 94세를 일기로 돌아가신 지 한 해가 지난 뒤인 지난 1월에야 마련되었다.

이 전시를 마련한 자제분은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이 커질수록 어머니가 남기신 아름다운 흔적들을 함께 이야기하고 생각하는 일이 어머니를 더 오랫동안 기억하는 일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어머니에 대한 효심과 실천에도 놀라운 마음이 든다. 어머니는 19세에 20세의 남편을 만나 결혼하였고 2002년 남편이 돌아가신 후부터 바느질을 가까이 해 둥근 바늘꽂이 1천600개와 윷놀이 말판 10여개, 크고 작은 복주머니 10여개, 일기장 20여권과 제문 등 많은 생활의 기록들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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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故) 권영규 어머니가 만든 다양한 바늘꽂이. 이지용 기자 sajahu@yeongnam.com

이 글을 통해 그 어머니가 남기신 고운 작품들의 예술성을 이야기하려고 하지 않는다. 다만 그 아름다운 마음의 형적(形跡)들을 찾아가 보려고 한다. 그저 물 흐르듯 놓아 버렸을 그 여생의 시간을 아껴 만든 천개가 넘은 바늘꽂이는 마음을 먹먹하게 만들 뿐이다. 자신에게 주어진 일각의 시간조차 아꼈던 근면과 그것을 생전에 딸이며 이웃이며 친지들에게 골고루 나누어 주던 나눔의 마음이 그리운 것이다. 유언으로 문상온 분들께 나누어 주라고 했던 것에서 남은 사람의 슬픔을 조금이나마 위로하려는 어머니의 마음도 읽힌다. 결코 서둘러서는 만들어지지 않는 바느질의 시간은 불현듯 떠오르는 슬픔과 아픔까지도 조용히 위로하는 시간이 되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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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故) 권영규 어머니 사진과 어머니가 남긴 메모들.

어머니가 꼼꼼히 적은 일기장에는 작은 돈의 용처까지도 차곡차곡 적혀 있었다. 삶의 행간들을 성실하게 살아오신 면모는 돈을 쓰는 일에도 꼭 필요한 일에 사용하고 그것을 잘 기록한 점에서 느껴진다. 단아하게 눌러쓴 글씨로 콩은 얼마고, 팥은 얼마인지 남은 돈은 얼마인지를 쓰셨다. 그 행간을 채운 삶의 시간들이 와르르 쏟아져 내려 마음 한편에 뜨거움이 밀려왔다.

쓰지 않으셔도 알겠다. 그 하루의 시간을 얼마나 귀하게 받들고 살았는지. 사소한 일상일지라도 이렇게 숭고한 하루로 빛난다. 그렇게 간결하게 적을 수 있는 시간이야말로 수행의 시간이 아닐까.

언젠가 어떤 하루를 그렇게 쓰고 싶다는 생각이 문득 든다. 그저 한 줄 “바람이 불었다”거나 “꽃이 피었다”거나 그렇게 담담히 지날 수 있는 시간들이 왔으면 한다. 누군가를 보고 싶은 일도, 누군가를 원망하거나 미워하는 일도 없는 그런 시간들이 왔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어머니의 글 속에는 돌아가신 시어머니의 제문도 있다. 구절마다 시어머니를 애도하며 쓴 글이다. 6·25전쟁을 견딘 글들은 마치 현장을 보듯 생생해서 한 여인으로서 한 나라의 국민으로서 견디어온 그 세월은 어머니가 쓰신 이 나라의 역사다.

봉화 닭실댁 어머니가 만드신 바늘꽂이는 옛 여인들의 삶에서 매우 소중한 것이다. 바늘꽂이는 바늘을 꽂아둘 목적으로 헝겊 속에 솜이나 머리카락을 넣어 만들었는데 형태에 따라 다양하다. 원형, 거북형 등은 바늘방석 형태로 만들었고 안경집형, 호리병형, 장방형 등은 바늘을 속에 넣을 수 있게 바늘집형태로 만들어 노리개로 차고 다녔다. 때로는 응급 의료용 기구가 되기도 하였는데 체했을 때 바늘로 손끝마다 따주신 기억이 있다.

바늘방석, 바늘겨레라는 말을 쓰기도 하는데 모든 만물에 정령(精靈)이 깃들어 있다고 생각하는 물활론적인 인식은 여기에도 예외가 없다. 바늘이 꽂히는 곳이 바늘방석이 된 연유다. 바늘방석이라는 단어는 조선왕조실록이나 개인문집에서 자주 등장했던 단어다. 한자어는 침전(針氈)이라고 했다. 전이라는 글자는 다소 어려운 ‘방석 전(氈)’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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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물관수 관장

주로 이 바늘방석들은 인두판에 매달아 썼다. 옷을 만들었던 옛 여인들은 인두판 위에 달린 바늘방석이 편리했을 것이다. 술이나 삼색 끈을 달아 노리개처럼 차고 다니거나 각색 비단을 이등변 삼각형으로 접어 가장자리를 잣물리듯 돌아가며 장식하였다. 바늘이 노출되지 않게 뚜껑을 가지고 있는 형태를 바늘집이라 부르는 것도 바늘방석이 단순하게 바늘을 꽂는 것과는 구별되기 때문이다. 조선왕조실록 성종9년(1478)의 기록을 보면 “한치형(韓致亨)이 황제가 요구하는 물목을 가져왔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 물목 내용에 호리병 바늘겨레가 들어있다. 영의정을 지낸 한치형은 성종 때 누차 사신으로 가 황제의 총애를 받았을 뿐 아니라 자신의 고모가 명나라 성조(成祖)의 비(妃)가 된 유명 인사였다. 중국 황제가 요구했던 물목에는 갖가지 수낭과 더불어 호리병 바늘겨레가 들어있다. 특히 이 바늘겨레를 “여공(女工)이 갖가지로 살아있는 듯하게 청개(靑介)·원앙(鴛鴦)·청구(靑鳩)·녹압(綠鴨)·능각(菱角)·연화(蓮花)·북(鼓) 모양 등으로 정교하게 만든 것”을 요구하고 있어서 당시 바늘겨레는 매우 보편적인 실용성과 장식성을 가진 물건으로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어쩌면 중국 황실의 안주인이 된 누님의 요구였을지 모른다. 그리고 흔히 쓰는 ‘바늘방석 위에 앉다’라는 관용어도 실록에 등장한다. 선조27년(1594)의 기록에 보면 ‘여좌침선지상(如坐針氈之上)’이 보인다. 즉 ‘바늘방석 위에 앉아 있는 것만 같다’는 기록이다.

꽃같이 환한 형형색색의 바늘꽂이가 아름다운 흔적을 말해준다. 어머니가 지나온 기도의 시간들이 우리 곁에 와서 말을 건다. 작은 자투리도 귀한 것으로 대했고, 사람에 대해서도 “애닯다 애닯다” 하시며 사랑으로 대했던 한 어머니의 삶이 우리를 눈물짓게 한다. 바늘꽂이를 만드는 시간은 고단했던 어머니의 삶을 꽃으로 승화시킨 시간이었고, 못다 한 사랑을 전하는 메시지였다. “어머니는 단 한 번도 격탕하게 노여워하지 않았다”는 막내아들의 회고는 우리를 돌아보게 한다. 슬픔에도 기쁨에도 고요히 파도를 건너고, 저 마른 가지처럼 한겨울에도 잔잔히 봄을 품고 있던 어머니의 모습은 우리 모두의 어머니이기도 하다.

박물관수 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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