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네 토크] ‘증인’ 정우성

  • 윤용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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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9-02-22   |  발행일 2019-02-22 제43면   |  수정 2019-02-22
“시나리오 마지막 장 덮자마자 결심…숨이 트이면서 치유받는다는 느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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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만 더 하면 에이스인데 아직 때가 덜 묻었어.” 신념을 접고 현실과 타협한 민변(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 출신의 변호사 순호는 로펌 대표에게 그렇게 비치는 인물이다. 회사에서는 클라이언트에게 치이고 집에서는 장가 가라는 아버지(박근형)의 성화에 어디 한 곳 마음 편히 쉴 곳이 없다. 그가 파트너 변호사로 승진할 수 있는 기회를 얻는다. 유력한 살인 용의자의 무죄를 입증하기 위해 유일한 목격자인 자폐 소녀 지우(김향기)를 증인으로 세우는 게 관건이다. 자신만의 세계에 살고 있는 지우와의 소통이 쉽지는 않지만 순호는 그의 세계에 한 걸음씩 다가가는 방식으로 간극을 좁혀간다.

‘증인’은 장르적 색채가 강한 캐릭터의 옷을 주로 입어온 정우성의 보통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일견 흥미롭고 반가운 작품이다. 최근작이 ‘인랑’(2018), ‘강철비’(2017), ‘더 킹’(2016), ‘아수라’(2016)였다는 것을 떠올려보면 그렇다. 그는 그런 일련의 작업 과정이 결코 녹록지는 않았다는 듯 “관객들의 지친 마음을 따뜻하게 보살펴줄 수 있는 영화인 동시에 스스로도 치유받을 수 있는 영화가 될 것 같아 각별한 애정을 느꼈다”고 말했다.

순호는 순수한 지우와의 만남을 통해 그가 오랫동안 지켜왔던 신념을 다시 찾게 된다. 이 과정이 다소 전형적으로 비칠 수 있지만 정우성은 인간미가 묻어나는 진심과 섬세함을 더해 캐릭터에 생명력을 불어넣었다. 특히 누구보다 사회적 현안에 대해 소신 발언을 해 온 그다. 그 덕분에 진실과 정의, 신뢰와 소통 등의 유의미한 가치를 표방하고 있는 이 이야기의 몰입도는 훨씬 높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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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호는 지극히 평범한 인물에 속한다. 시나리오를 처음 접한 느낌은 어땠나.

“편안했다. 그리고 전작들이 센 역할이었으니 이번엔 따뜻한 이야기를 해봐야지라는 생각으로 접근하진 않았다. 단지 내게 들어온 시나리오 중 마음이 끌렸던 작품이고, 읽는 동안에도 숨이 탁 트이면서 뭔가 치유받는다는 느낌이 들었다. 시나리오 마지막 장을 덮자마자 해야겠다고 결심했다. 무엇보다 좋았던 건 일상의 소소한 감정들과의 교감, 낯선 상대를 마주할 때 형성되는 의도치 않은 감정표출이 굉장히 풍부했다는 점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의 감정표출이 얼마만큼 드라마틱한지 잘 모르고 지나가는 경우가 많다. 나는 연기를 하는 사람이다 보니 평범한 일상과 그로 인해 파생되는 다양한 감정들을 늘 그리워하고 동경했다. 이 작품에서는 사소하지만 일상적이고, 드라마틱하진 않지만 아주 특별한 감정들을 느끼며 연기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 시간들을 놓치기 싫었다.”

▷순호를 준비하는 과정도 전과는 달랐을 것 같은데.

“로펌에 몸담기 전 순호는 민변 쪽에서 파이터로 이름을 날렸던 인물이다. 하지만 그가 자신의 삶을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가기 위해 현실과 타협하면서 이 이야기가 시작된다. 바로 그 시점에서 지우라는 아이를 만나게 되고, 그를 통해 삶의 본질과 가치 등을 되돌아보게 된다. 이 과정이 편안했던 건 숨을 꽉 참고 긴장하고 움켜쥐면서 힘들게 달려왔던 전작 캐릭터들과 달리 이번에는 현장의 공기를 충분히 느끼며 연기하는 게 가능했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장르색이 짙은 캐릭터를 연기할 때는 디자인을 많이 생각하게 된다. 그리고 리액션을 어떻게 해야 할지 미리 계산한다. 이 영화는 전혀 그럴 필요가 없었다. 오히려 그렇게 준비하고 들어갔다면 방해만 됐을 것이다. 어떻게 보면 순호가 지우를 만났을 때 느꼈던 감정과 같다. 모르는 사람을 대하는 것이니 가급적 마음을 열고 다가가야겠다는 생각을 순호가 가졌듯 나 역시 똑같은 마음가짐으로 임했다.”


민변 활동하다 로펌 옮기며 현실과 타협한 인물
살인 용의자 유일한 목격자 자폐 소녀와 만남
일상 소소한 교감·의도치 않은 감정표출 풍부
나 역시도 고교 자퇴, 편견대상 될수 있는 사람
당당히 살고 행복 찾느냐는 각자의 의지 달려

29개월 김향기와 광고 찍은후 17년 만에 재회
실제 부친 무뚝뚝, 보편적 관계 못느끼고 살아
아버지와 멸치 다듬는 신, 해보고 싶었던 모습

첫 촬영후 ‘우성씨가 순호네요’감독님 말 뿌듯
나이 많다고 다 알지 못해…다양한 연령과 소통
좋은 선배보다 현장에서 좋은 동료가 되고 싶어
감독 포지션에서도 잘 할 수 있는게 있는지 도전



▷김향기와는 17년 만의 만남이다. 어떻게 소통하며 합을 맞춰나갔나.

“잘 기억이 나진 않지만 향기양이 29개월 아기였을 때 함께 광고를 찍었다. 신기했다. 촬영 내내 순호가 지우를 바라보듯 향기양을 바라봤다. 일부러 말을 붙이려 하지 않았고, 옆자리가 비어있으면 그냥 말없이 앉아 있다 오곤 했다. 어떤 선입견도 없이 자연스럽게 김향기라는 배우를 바라보고, 그 순간의 느낌에 충실했던 것 같다.”

▷자폐를 앓고 있는 지우는 모두가 편견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대상이다. 실제로도 우리사회는 많은 편견을 갖고 살아간다는 점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

“나 역시 고등학교를 자퇴했다는 사실만으로 충분히 편견의 대상이 될 수 있는 사람이다. 사회가 요구하는 조건에 부합하지 않으면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그 대상으로 전락한다. 되게 불합리하고 비민주적인 일이다. 사실 사회가 요구하는 조건이 얼마나 정당한 것인지에 대해선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물론 학교를 그만두는 게 옳은 일이냐고 묻는다면 선뜻 동의하긴 어렵다. 하지만 어떤 결정이든 각자의 생각과 이유가 있을 것이고, 그 안에서 당당하게 살아가고 성장하고 행복을 찾느냐는 결국 각자의 의지에 달려있다. 자신만의 잣대로 아무렇지 않게 상대방을 평가하거나 규정짓는 건 옳지 않다. 누구든 사회의 중요한 구성원으로 살아갈 수 있는 충분한 권리와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특별히 기억에 남는 장면이 있었나.

“모든 장면이 나에게 특별하고 값진 경험이었다. 어떤 모습을 보여줘야지 하는 생각으로 특별히 많은 것을 준비한 건 없었지만 촬영장 가는 생각만으로 즐거웠다. 내가 평소 느끼고 경험해보지 못했던 모습이었기에 더 그런 것 같다. 예를 들어 아버지와 막걸리 한 잔 하기 위해 멸치를 다듬는 장면도 평소 해보고 싶고 궁금했던 모습이었다.”

▷박근형과의 일상적인 모습들이 너무 자연스러웠는데 실제 아버지와의 관계는 어떤가.

“아버지가 되게 무뚝뚝하시다. 가부장적이고 어머니의 희생을 당연히 여기는 재미없는 아버지이자 남편이다. 사실 어릴적부터 혼자 생활을 했기에 보편적인 부자관계를 느끼지 못하고 살아왔다. 아버지와 함께했던 시간 역시 아주 짧았다. 어떻게 보면 순호와 아버지와의 관계는 내가 실제 삶에서 해보고 싶은 모습이기도 했다. 그렇게 대리만족을 느꼈고 나에겐 엄청난 순간이었다.”

▷그 때문인지 전작들에서 볼 수 없었던 편안한 표정과 모습이었다.

“모니터링을 지양하는 편이다. 모니터링을 하다가 낯선 표정이 발견되면 순간 익숙한 표정으로 바꾸려는 시도를 무의식 중에 하게 된다. 전적으로 감독님을 믿고 가는 게 새로운 표정을 발견하고 찾는 데 도움이 된다. 이번의 경우가 특히 그랬다. 정말 순호처럼 보이길 원했다. 어떤 작품이든 첫 촬영이 중요하다. 작품 속 캐릭터를 처음으로 보여주는 시간이라 나름 긴장감을 가지게 되는데 감독님이 첫 촬영 후 ‘우성씨가 순호네요’라고 하였다. 그 말이 되게 듣기 좋았다.”

▷12세 관람가인 만큼 다양한 연령층과 소통하게 됐다는 점에서도 기대감이 있을 것 같다.

“그랬으면 좋겠다. 청소년들이 나를 친근하게 생각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나이를 먹더라도 꼰대는 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은 늘 갖고 있다. 그런 노력이 또 다른 시작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선 어떤 계층이나 집단을 규정지으려 하지 않는 게 중요하다. 나이가 많든 적든 개인과 개인으로 바라보고 존중해야 한다. 경험이 많고 나이가 많다고 해서 절대적인 삶의 가치와 지혜가 높은 건 아니다. 각자 다른 시간과 인생을 살아왔기에 개개인의 사고와 경험은 다를 수밖에 없다. 나이가 많다는 이유만으로 남에게 조언을 한다거나 함부로 얘기를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후배들에게 좋은 영향을 주는 선배로 평가받고 있다.

“배우로서 좋은 선배가 되는 것보다 현장에서 좋은 동료가 되고 싶다. 현장에서 같이 작업하는 모든 스태프에게도 마찬가지다. 특별하거나 거창할 필요는 없다. 의례적인 인사 대신 서로 눈을 마주보고 그가 하고 있는 일을 인정하고 격려해주는 게 중요하다. 힘들고 외롭다는 생각을 같이 공유하면 동료의식이 자연스럽게 생겨난다. 후배들이 나를 그렇게 평가했다면 그런 내 진심이 제대로 전달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순호는 민변에서 활동하다 로펌으로 자리를 옮겼다. 현실과의 타협인 셈인데 배우입장에서도 흥행과 상업적인 부분은 늘 중요한 선택 기준일 것 같다.

“나는 꼭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내 필모를 보면 알겠지만 뜬금없다고 생각할 수 있는 작품이 더러 있다. 타협이라는 게 주로 실리적이라는 말과 결부되고 있지만 그보다는 정당성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고 생각한다. 물론 내가 선택해서 출연한 작품에 대한 책임감은 당연히 가져야 한다. 독립영화라고 감독과 협의하지 않는 방식을 취한다면 그건 무책임한 일이다. 모든 영화는 흥행을 바라고 그로 인한 경제적인 이익을 추구하려는 목표를 가진 상업영화라고 볼 수 있다. ‘증인’도 마찬가지다. 이 영화가 얼마나 많은 관객과 소통이 이뤄질지는 모르겠지만 궁극적으로 많은 사람이 관람을 했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작금의 영화계는 자본, 배우, 감독이 누구냐를 중요하게 생각하고, 장르적으로 이야기와 형식을 자꾸 채워나가려 하고 있다. 그렇게 되면서 작품 선택의 폭은 오히려 더 좁아졌고, 어느 정도 커리어를 쌓은 배우와 감독들만이 영화를 찍을 수 있게 됐다. 하지만 난 그런 외형적인 조건을 떠나 가능성을 믿고 도전해보고 싶다. 그리고 그 도전이 성공했을 때 더욱 아름답게 빛날 수 있다고 생각한다.”

▷2014년 ‘나를 잊지 말아요’를 통해 제작자로 신고식을 치렀다. 올해는 감독으로도 데뷔할 예정인데 각오를 말한다면.

“예전에는 그럴싸한 이미지의 캐릭터를 형상화시키고 싶은 욕심 때문에 어떤 특정 장르를 개발하려고 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이것을 왜 해야 하는지 나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지게 됐다. 아직은 많은 시행착오를 겪고 내가 진정 하고 싶은 게 무엇인지를 깨닫는 과정이 필요하다. 그래서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고집하고 싶지 않다. 일단 감독의 포지션에서도 내가 잘할 수 있는 게 있는지 도전해 보고 싶다. 그 시작은 사극이 될 것 같다.”

글=윤용섭기자 yys@yeongnam.com
사진=롯데엔터테인먼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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