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면실 10여명 깨우고 검은 연기·암흑과 22분 死鬪

  • 양승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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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9-03-14 07:47  |  수정 2019-03-14 07:47  |  발행일 2019-03-14 제9면
대보목욕탕 숨은 영웅 이재만씨에게 듣는 그날 그 시각

지난달 19일 87명의 사상자를 낸 대구 대보목욕탕(중구 포정동) 화재 당시 60대 한 어르신의 용감한 구조활동이 있었음이 뒤늦게 알려졌다. 그는 진화가 끝나가는 마지막 순간까지 현장에 남아 이용객을 대피시키는 등 피해를 최소화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그와의 인터뷰 내용을 토대로 생사의 기로에서 자신의 한 몸 아끼지 않았던 순간을 재구성해 본다.


20190314

그날 오전 7시11분. 대보아파트 5층에 거주하고 있는 이재만씨(66·사진)는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바로 아래층 대보목욕탕에서 목욕을 한 후 탈의실에서 카운터 직원 A씨(77)와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지난 6년간 해오던 일상이었지만 이날 어디선가 타는 냄새가 나자 약간 신경이 쓰였다. 그때였다. 목욕탕 업주 B씨(64)가 다급하게 뛰어들어왔고, 그의 뒤로는 시커먼 연기와 함께 빨간 덩어리 같은 것이 목격됐다.

‘아, 불이다.’

화재임을 직감했지만 이씨가 곧장 달려간 곳은 대피로가 아니라 수면실이었다. 그는 이곳에서 ‘불이야!’를 외치며 이용객 10여명을 깨웠다. 잠에서 깬 이용객은 주변에 잠든 다른 손님을 깨우고 대피를 시작했다. 이씨는 다시 헬스장과 목욕탕 안으로 들어갔다. 불이 난 사실을 모르는 이용객이 아직 남아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다. 이씨는 그리고 마지막으로 목욕탕 내 사우나실을 둘러봤다. 사람이 없음을 확인한 이씨는 발걸음을 욕장 출입문으로 향했다. 하지만 그는 이용객 C씨와 탕 안에 꼼짝없이 갇히는 신세가 됐다. 목욕탕 입구 천장이 무너진 것이다. 곧이어 전기 공급마저 끊겼다.

밖은 검은 연기가, 탕 안은 또 다른 암흑이 지배하면서 공포감은 최고조에 달했다. 수건을 물에 적셔 얼굴을 감싼 채 바닥에 엎드렸다. C씨와 서로 의지하고 있었지만 시간이 갈수록 호흡이 힘들어졌다. 죽음의 공포가 엄습했다.


수면실·헬스장 돌며 대피시켜
탈출하다 욕장 갇혀 생사기로
“20년 전 물에빠진女 구하기도”
警 ‘용감한 시민상’ 수여 계획


“2분 남짓 짧은 시간이었지만 숨을 쉬는 게 너무 힘들었습니다. 같이 있던 C씨와 의지하며 그 순간을 버틸 수 있었습니다.”

안에 계속 머물다가는 안 될 것 같았다. 바깥 상황을 살폈다. 이때는 소방당국이 진화작업에 나서 불길을 잡고 있는 상황이었지만 이를 알 리 없었다. 이씨와 C씨는 문을 열고 힘껏 내달렸다. 소방관들이 최초 발화지점인 구둣방에 물을 뿌리며 잔불정리를 하는 모습이 보였다. C씨는 창문으로 뛰어내리다 크게 다쳤다. 이씨는 다행히 목욕탕을 무사히, 맨 마지막으로 빠져나올 수 있었다. 이때가 오전 7시33분. 화재 발생 22분 후였고, 진화가 된 지 3분이 지난 시점이었다.

“20년 전 포항의 한 해수욕장에서도 물에 빠진 40대 여성을 구한 경험이 있습니다. 앞으로 똑같은 상황을 겪어도 이같이 행동할 것입니다.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을 했을 뿐입니다. 이번 화재 사망자 가운데 목욕탕에서 가깝게 지내던 분이 계셔 마음이 무겁습니다. 다시는 이런 아픔이 재현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는 영웅이었다. 경찰은 이씨에게 조만간 ‘용감한 시민상’을 수여할 계획이다.

글·사진=양승진기자 promotion7@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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