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망즈 주교 일기에 기록된 성유스티노신학생의 3·5 만세운동

  • 박종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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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9-03-25 08:05  |  수정 2019-03-25 08:05  |  발행일 2019-03-25 제19면
“운동장서 독립 노래 부르자 교장은 학생들 말리느라 애 먹어”
드망즈 주교 일기에 기록된 성유스티노신학생의 3·5 만세운동
1987년 한국교회사연구소가 한글로 번역해 발간한 ‘드망즈 주교 일기’(1911~1937) 278쪽 1919년 3월7일 일기(왼쪽). 오른쪽은 불어 일기 원본 파일.


성유스티노신학교 학생들의 ‘3·5만세운동’ 사실은 드망즈 주교가 쓴 일기에 자세히 남아 있다. 플로리안 드망즈 주교는 파리외방전교회 대구교구의 초대 교구장을 지냈다.

1987년 한국교회사연구소가 한글로 번역해 발간한 ‘드망즈 주교 일기’(1911~1937) 278쪽 1919년 3월7일 일기에 “한국 젊은이들이 전 황제의 장례식을 계기로 서울과 다른 곳에서 조선 독립을 위한 시위를 했다. (중략) 대구 신학교에서는 학생들이 흥분되어 있다. 그들은 그저께(3월5일) 저녁에 운동장에서 독립을 위한 노래를 불렀고, 교장은 그것을 그만두게 하느라 애를 먹었다. 그 후 화들이 나 있으며, 아마도 성소를 잃는 학생들이 나올 것이다”라고 기록돼 있다.

그러나 신학생들은 이에 굴하지 않고 독립에 대한 뜨거운 의지를 보였다. ‘영남교회사연구월보’ 제16호(1993년 2월20일)에 실린 윤광선 ‘성유스티노신학교’에 따르면, 만세운동을 준비한 구체적 인물과 역할까지 자세히 나타나 있다. 이 내용은 천주교 대구관구 대신학원이 2013년 펴낸 ‘성유스티노신학교’(1914~1945)에도 나와 있다.

“신학생들은 윌슨 대통령에게 편지를 보낼 것과 3월9일 오후 2시에 약전골목에서 있을 대구의 만세운동에 가담하기로 결정하였다. 신학생들 중에서는 삭발례 받은 김구정과 서정도가 주동이 되었고 신학교의 평신도 교사이던 홍순일이 사회단체와의 연락을 담당하였다. (중략) 김구정 신학생은 독립선언문 복사와 유인물 프린트를, 서정도는 태극기를 만들기로 역할을 분담하였다. 그러나 이 사실이 교장신부에게 알려져 본인들도 모르는 사이에 제작된 유인물과 태극기는 모두 교장실로 압수되어 버렸다.”

‘성유스티노신학교’에는 외국인 선교사들이 3·1운동에 동참하지 않은 까닭을 “당시 파리외방전교회가 관할하고 있던 한국 교회는 일제가 식민지정책의 일환으로 내세운 정교분리의 원칙에 동조하였는데, 이는 종교의 자유를 얻기 위한 현실적인 판단이었다. 또한 이들 외국인 선교사들은 민족운동인 3·1운동을 정치 문제로 해석했고, 신자들에게 정치 문제에 대해 관여하지 않도록 가르쳤으므로 대부분의 신자들은 만세운동에 참여하지 않았다”라고 서술돼 있다.

박종문기자 kpjm@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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