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기한 벼루 1500여점·문방사우 ‘문화 사랑방’ - 그때 그 감동의 ‘뮤직박스’

  • 이춘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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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9-05-17   |  발행일 2019-05-17 제34면   |  수정 2019-05-17
■ 경주 테마 박물관 스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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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년간 벼루 수집에 혼신을 쏟은 ‘취연 벼루 박물관’ 손원조 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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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0년대 에디슨이 발명한 원통에 홈을 새겨 음원을 재현할 수 있게 해놓은 실린더형 축음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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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00년의 대한민국 대중음악의 전과정을 각종 음반과 음향기기, 유명 뮤지션의 기증품 등으로 일목요연하게 정리해 놓은 전시실 전경.

취연 벼루 박물관 손원조 관장은 강동면 오금리 경주손씨 집성촌에서 태어났다. 1년에 봉행해야 될 기제사만 10번. 오랜시간 집안 어른 옆에서 먹을 갈아야만 했다. 그런 그가 벼루박물관을 만든 건 우연이 아니라 하나의 필연인지도 모른다. 그가 반세기 동안 박봉을 쪼개 벼루 수집에 나선 이유는 뭔가.

어느 날부터 벼루문화가 몰락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문이 푸대접 받고 대다수 붓글씨와 동떨어진 삶이었다. 한때 가보로 불렸던 각종 문방사우들도 멸시당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대청 마루 아래, 나중엔 고물장수의 차지가 되었다. 그는 방송·신문기자 생활을 하면서 그 현장을 누구보다 리얼하게 목격할 수 있었다.

그는 늘 ‘저 벼루는 한갓 오래된 물건이 아니라 한국의 얼굴, 그리고 우리문화의 정수’라 여겼다. 좌시하고 관망만 할 수가 없었다. 벼루가 다 사라지면 유교문화 또한 사라질 거라 믿었다. 1971년부터 만사를 젖혀두고 ‘벼루살리기’에 나선다. 황남동, 사정동 등 시내에 산재한 20여군데 골동품 가게를 집처럼 들락거렸다. 일단 국내 벼루 유통 경로부터 공부했다. 고물상이 벼루를 갖고 오면 무조건 자기한테 먼저 연락해달라고 했다. 벼루 사랑은 문방사우(文房四友) 사랑으로 이어졌다. 벼루집(硯匣), 벼루상(硯床), 120년 된 조선 종이, 105년 된 먹 등도 추가됐다.

그가 묻지마 수집에 나서자 경주의 벼루 가격도 뛸 수밖에. 그가 ‘벼루 특수’에 불을 지핀 것이다. 몇 백원에서 몇 천원으로, 몇 만원을 거쳐 몇 백만원으로 껑충 뛰었다. 경주는 좁은 것 같아 수집 공간을 전라·충청도 등 전국 골동품 경매장으로 확대했다. ‘벼루에 미친 사람’으로 소문이 난다.

그는 “벼루도 맘을 갖고 있다”고 주장한다. 맘이 심란하면 벼루와 대화한다. 서로 다른 시대, 그리고 각기 다른 제약조건을 가진 벼루의 미학. 파고들면 더 오묘하고 황홀했다. 혼자만 즐겨선 안된다고 생각했다. 그 맘은 ‘벼루박물관을 열지 않으면 제대로 죽을 수 없다’는 강박관념으로 이어진다. 모으는 과정도 험로였지만 그걸 박물관에 전시하는 것은 더 어려운 과정이었다. 그런 숱한 사연을 안고 있는 손 관장의 손금이 묻은 1천500여점 벼루는 마침내 지난달 세인의 품 속으로 나오게 된다.

◆벼루의 행간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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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자 모양의 고려 벼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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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로 만든 조선 때 벼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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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보러 가는 유생들이 선호했던 야외용 자그마한 행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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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판, 벼루, 인주까지 세트로 구비된 일제강점기 때 사무용으로 사용되던 일체형 벼루.

선비들은 괜찮은 벼루 한 점을 학수고대했다. 자연 한시, 부(賻), 찬(讚) 등 벼루에 관련된 다양한 글까지 잉태된다. 고려 문신이던 이규보는 ‘생사를 함께하자’면서 벼루에 대한 애틋한 심사를 토로했다. 조선 중기 문신 정철조는 자기 아호를 ‘돌 바보’란 의미로 ‘석치(石痴)’로 지었다. 손 관장도 석치를 염두에 두고 ‘벼루에 취한 사내’란 의미로 ‘취연(醉硯)’이란 아호를 갖는다.

벼루의 이름도 다양하다. 재료의 산지, 조각 모양, 돌의 색깔, 재료의 성분 등에 따라 작명된다. 이젠 수제벼루는 설 자리가 없다. 거의 기계로 깎은 벼루다. 그런 건 거론하는 것조차 부끄러운, 예술미가 전혀 느껴지지 않는 보급용 벼루다. 당연히 그가 가진 벼루는 모두 특제품이다. 수제 벼루는 격이 다르다.

최상의 벼루는 국가지정문화재로 대접받는다. 조선 중기 문신 약포 정탁의 벼루는 보물 494호에 지정돼 안동 국학진흥원에 소장돼 있다. 이 벼루는 임진왜란 발발 10년전 명나라 사신으로 갔다가 황제 만력재로부터 받은 선물이다. 추사 김정희의 벼루 3점은 보물 547호, 홍의장군 곽재우 벼루는 보물 671호, 이밖에 청자 퇴화문(堆花文) 두꺼비 모양 벼루도 보물 1782호로 지정돼 있다.

그동안 두 차례 벼루전을 열었다. 2001·2003년 경주세계문화엑스포 특별전이다. 그는 늘 벼루의 대국이랄 수 있는 중국의 반응이 궁금했다. 첫 전시회 때 경주시 자매도시인 시안(西安)시 문화예술인들이 전시장에 왔다. 그에게 다가와 한국 벼루를 향한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고단하기만 했던 지난 날의 수집인생이 하나의 ‘보람’으로 다가선 날이었다.

그는 문방사우도 과거와 현재가 소통해야 된다고 믿는다. 노트북 키보더·마우스·모니터·휴대폰·프린트 등을 뭉뚱그려 ‘현대판 문방사우’로 부른다. “신라와 경주가 소통하듯 문방사우도 같은 방식으로 서로를 품어줘야 민족문화의 미래도 더 욱일승천하는 거죠.”

그는 서예인은 물론 젊은 세대들이 여기서 민족유산의 숨결을 제대로 느끼는 걸 도와주고 싶어한다. 그렇다면 여긴 박물관이라기보다 세대를 연결하는 ‘문화사랑방’이다.

1층은 커피를 마시며 대화를 나눌 수 있다. 1층 한 편에는 청자 연적, 붓걸이, 고비, 붓, 벼루와 먹을 한데 묶어놓은 일체형 벼루 등 100여점의 문방사우 관련 품목이 진열돼 있다. 메인 전시장인 2층에는 엄선된 100여점의 벼루가 전시돼 있다. 커피 포함 입장료 2천~3천원 매주 월요일 휴무. 경주시 화랑로 107번길 10-9. 070-7393-8686

◆한국대중음악박물관

보문단지 경주 호텔힐튼 입구 맞은편에 있는 신평동 ‘한국대중음악박물관’으로 향했다. 한국대중음악박물관과 함께 호흡을 맞추고 있는 경주IC휴게소 내 ‘오르골소리박물관’ 때문에 경주가 ‘LP의 고장’으로 불리기도 한다. 2009년 4월에 개관한 오르골 박물관에 오면 에디슨 축음기 100여점, 스위스에서 들여온 뮤직박스 등을 볼 수 있다.


국내 유일 벼루박물관
韓문화 정수 고물로 방치 ‘벼루 살리기’
50여년간 박봉 쪼개 수집 손원조 관장
벼루집·벼루상·조선 종이·105년 된 먹
재료산지·조각·돌색깔·성분따라 작명
추사 김정희·곽재우 벼루 보물로 지정



한국대중음악박물관
전기시장 산증인 유충희 관장이 운영
LP·SP 4만여장, 20C초 매머드 스피커
유명 뮤지션 통기타·무대복 등 7만여점
한국 대중음악 콘텐츠 관련 최고 공간
대중음악 100년 서울 잠실 롯데몰 분점
빈티지 스피커 중후한 울림 뮤직카페



2015년 4월 오픈된 한국대중음악박물관. 1945년에 설립된 국립경주박물관과 함께 경주의 정부 공인 1종 박물관이다. 누구의 지원을 받은 건 아니다. 유충희 관장의 사비로 운영된다. 그는 국내 전기시장의 산증인 중 한 명. 사업해서 번 돈을 이 박물관에 쏟아붓는다. 그가 이 박물관에 집착하는 건 ‘경주가 한국 소리의 뿌리’라는 믿음 때문이다. 그는 삼국의 음악을 통일한 게 신라의 음악이라 여겼고 그래서 대중음악의 모든 걸 보여주는 박물관도 당연히 경주라 판단, 주위를 만류를 뿌리치면서 일을 저지르게 된다.

4만여장의 LP와 SP, 에디슨 축음기, 20세기초 전세계 극장가를 주름잡은 매머드 스피커, 유명 뮤지션이 기증한 통기타와 무대복 등 무려 7만여점의 소장품을 갖고 있다. 전시되는 건 10% 남짓. 연 1~2회 기획전을 통해 다른 소장품도 보여줄 계획이다.

얼마전 롯데그룹 임원이 이 박물관에 왔다가 감동을 받는다. 즉시 서울 잠실 롯데몰에 전시관 입점을 제의해 성사된다. 지난해 2월 롯데 월드몰 5층 복합문화공간에 이 박물관의 분점을 낸다. ‘서울3080’이란 이름으로 대중음악 100년사를 상설전시했다.

양과 질에서 국내 대중문화 관련 최고 박물관이란 평가를 받는다. 한국에 서양음악이 들어와 최근 K-pop의 영광을 만든 방탄소년단에 이르기까지 전 과정의 음원과 핵심 관련 자료가 총망라돼 있다. 추억의 보고라 하지 않을 수가 없다.

◆한국 대중가요 1호를 찾아서

각종 빈티지 스피커 등 소장품이 보관된 지하 1층을 포함한 지상 3층(층당 1천㎡)의 박물관은 한국발 추억 속으로 보내주는 거대한 타임머신처럼 보였다.

현관에 들어서자 이 박물관의 마스코트라고 할 수 있는 이색적인 설치물이 이목을 끈다. 바닥부터 천장까지 하나로 이어진 원형 아크릴 통에 별별 통기타, 첼로, 플루트, 유성기 스피커 등을 한데 쌓아놓은 ‘뮤직탑’이다. 그 바로 옆에는 국내에선 한 대밖에 없는 세계 최대 축음기인 EMG 10b형 오버사이드 축음기(1930)가 있다. 이 축음기에는 14인치 턴테이블까지 달려있다.

입구 맞은편은 공연장을 겸한 음악감상실이다. 1960년대 마이클 잭슨 공연 때 사용한 것으로 추정되는 투박하고 큼지막한 스폿라이트용 조명기도 보인다. 그 옆은 100여점의 빈티지 커피 글라인더를 보유한 뮤직카페 ‘랩소디 인 블루’가 있다. 노끈이 달린 신청곡 메모지에 곡명을 적어 철사줄에 묶어 놓으면 알아서 틀어준다. 감상실 정면에 비치된 1936년 미국 웨스턴일렉트릭사가 만든 ‘미로포닉(Mirrophonic)’은 검정 콘크리트 구조물 같다. 하지만 무성영화를 유성영화로 건너가게 만든 명품 스피커다. 90년 이상된 괴물처럼 생긴 저 빈티지 스피커를 통해 들리는 김장훈의 노래 ‘나와 같다면’, 디지털 음원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중후하고 깊은 맛이 전해져 왔다.

발을 옮길 때마다 도, 레, 미~ 소리가 나는 건반식 계단을 딛고 2층으로 올라간다. 그 계단 벽에는 한국 아이돌 뮤지션의 어제와 오늘을 연대기 형식으로 정리해 놓았다. 2층 전시관은 이 박물관의 CPU 같은 곳이다. 오르자 박물관의 심장인 2층 전시관이 나왔다. 에디슨이 발명한 1880년대 실린더 축음기와 나팔처럼 생긴 유성기 스피커, 실린더 음반이 장착된 주크박스, 한양가 경부철도가 등 모두 25곡이 실린 빛바랜 한국 최초의 노래책…. 인력거가 오가고 담 너머로 유성기 음반이 아련하게 들리는, 내가 경주가 아니라 100년 전 경성의 한 지점에 와 있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글·사진=이춘호기자 leekh@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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