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말과 한국문학] 일제 강점기 선비의 삶으로 본 한일 관계

  • 이은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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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9-08-08   |  발행일 2019-08-08 제30면   |  수정 2020-09-08
조선의 선비인 이태일선생
일제의 훈패를 거부하면서
日경찰서장에 육산시 보내
신념과 가치를 지켰던 그 삶
한일갈등 국면 큰 의미 전달
[우리말과 한국문학] 일제 강점기 선비의 삶으로 본 한일 관계

최근 일본의 무역 제재로 나라 안팎이 떠들썩하다. 일제의 강제 징용과 위안부 문제 등 청산되지 않은 역사적 사안에서 촉발된 논란들이 지금의 한일 관계에 막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이다. 국민 또한 일본에 대한 보이콧 열풍이 한창이다. 일본제품과 일본 여행의 수요가 현저히 낮아지고 있음을 주변을 통해 쉽게 체감할 수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일제강점기 조선의 마지막 선비로 살았던 한 사람을 떠올려 본다.

명암(明庵) 이태일(李泰一 1860~1944) 선생은 영천시 자양면 원각리의 본가에서 태어나 벽진이씨의 가학(家學)을 기반으로 학문을 닦았고, 당대 영남지역의 명유(名儒)였던 서산(西山) 김흥락(金興洛 1827~1899)과 향산(響山) 이만도(李晩燾 1842~1910), 척암(拓庵) 김도화(金道和 1825~1912) 등과 종유(從遊)하면서 그들을 통해 퇴계학을 계승한 인물이다. 선생은 일찍이 과거를 포기하고 평생 향촌에서 학문과 강학에만 매진하는 삶을 살았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선생이 일제에 의한 민족적 위기와 망국의 아픔을 온전히 외면하기만 했던 것은 아니었다. 비록 의병을 일으켜 일제에 무력으로 항거하거나, 죽음으로 항일 의지를 실천하지는 못했지만 전통 지식인으로서 망국의 현실에 대응한 선생의 모습은 그가 남긴 글과 삶의 이력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餓則效西山

굶는다면 서산(伯夷叔齊)을 본받겠고,

食則效疊山

먹는다면 첩산(謝枋得)을 본받으리라.

隱則效盂山

숨는다면 우산(程)을 본받겠고,

避則效鼻山

피한다면 비산(徐弘祖)를 본받으리라.

生則效冷山

살아서는 냉산(洪皓)을 본받겠고,

死則效文山

죽는다면 문산(文天祥)을 본받으리라.

隨遇效六山

경우에 따라 육산을 본받으면,

邱陵可學山

구릉도 산을 배울 수 있으리라.

<육산시(六山詩)-계축척장시(癸丑斥章時)>

1913년에 일제는 조선 합병의 유화책으로 전국의 유명 선비들에게 한일합방 기념 훈패(勳牌)를 내린다. 이때 선생은 자신의 훈패를 거부하면서 일본 경찰서장에게 편지와 함께 위의 육산시(六山詩)를 보낸다. 시에 등장하는 육산(六山)은 주나라 문왕의 회유를 거부하고 은거한 백이숙제를 비롯하여, 송나라 말기의 충신 사방득(謝枋得), 춘추시대의 충신 정영(程), 명말청초 출사를 거부한 서홍조(徐弘祖), 남송의 충신 홍호(洪皓)와 문천상(文天祥)을 지칭한다. 이들은 모두 중국의 역사에서 대표적인 정절지사(貞節之士)다. 선생의 육산시는 결국 일제에 굴복하지 않겠다는 자신의 굳은 신념을 드러낸 것이라 할 수 있다. 이후에도 선생은 죽음을 각오하여 ‘서사문(誓死文)’을 지었을 정도로 일제의 겁박에 결코 굴복하지 않았다. 이러한 선생의 절의 정신은 현재 영천시 자양면 용산리에 있는 용산정사(龍山精舍)와 ‘이태일 선생 항일척장비’에 그 짙은 향기를 남기고 있다.

올해는 3·1 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난 지 100주년이 되는 해다. 이러한 의미 있는 해에 일본과의 갈등이 한창인 것은 의미심장하다. 특히 청산되지 않은 역사적 문제들이 갈등의 중심에 자리 잡고 있다는 점에서 더욱 그러하다. 경제적 이익을 위해 일본과 타협할 것인지, 아니면 일본과의 관계를 이 시점에서 새롭게 설정할지는 현재 우리에게 주어진 과제다. 그러한 까닭으로 일제강점기 자신의 신념과 가치를 지켰던 명암 이태일 선생의 삶은 작금의 우리에게 나름 큰 의미로 다가온다.

한국과 일본은 지금처럼 갈등 속에서만 계속 머물러서는 안 된다. 지정학적 측면에서도 양국은 공존과 공영의 길로 함께 걸어가야만 하는 역사적 사명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서는 양국의 그릇된 역사를 바로 잡아야 하고, 이에 따른 가해자의 진솔한 사과가 선결되어야 하지 않을까.

조유영 (경북대 국어 국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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