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남희의 그림 에세이] 이명기 ‘송하독서도(松下讀書圖)’

  • 임성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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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9-09-27   |  발행일 2019-09-27 제39면   |  수정 2020-09-08
커피숍에서 책을 펼치고 ‘송하독서도’ 선비가 되어 가을을 만끽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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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기, '송하독서도', 종이에 담채, 103.8x49.5cm, 삼성미술관 리움소장.

샛노란 국화로 물든 여고 교정은 우리의 낙원이었다. 그 시절, 감명깊게 읽은 책에서 인용한 단어를 교정 곳곳에 붙여 우리들만의 비밀 장소를 만들었다. 마음이 맞는 친구들끼리 독서토론회를 가지며 독서에 불을 지폈다. 때로는 읽던 책을 교과서 밑에 살짝 숨겨서 읽기도 했다. 그 시절의 독서가 지금까지 내 인생의 디딤돌이 되었다.

찬바람과 함께 찾아온 국화를 보며 화산관(華山館) 이명기(李命基, 1756~?)의 작품 ‘송하독서도(松下讀書圖)’를 떠올린다. 마치 독서 포스터 같다. 그림 속에는 기름진 소나무 아래 책을 펼친 선비가 있다. 시동이 찻물을 끓이는 가운데 선비의 책 읽는 소리가 낭랑하다.

이명기는 도화서(圖畵署) 화원인 이종수(李宗秀)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자연스럽게 아버지의 화풍을 이어받은 이명기는 화원으로 찰방(察訪)을 지냈다. 그의 집안은 2대에 걸쳐 어진도사(御眞圖寫)에 참여하여 초상화로 일가를 이루었다. 왕의 직속 관할인 ‘자비대령화원’을 배출한 김응환(金應煥, 1742~1789)의 사위이기도 하다. ‘신필(神筆)’이라는 극찬을 받으며 초상화 제작에 화명이 높았지만 그에 관한 기록은 미미하다. 1783년 ‘강세황초상(姜世晃肖像)’ 제작과 1796년 ‘서직수초상(徐直修肖像)’ 제작이 마지막 기록이다. 초상화에 화가의 관인이나 이름을 표기하지 않은 경우가 많았기에 정확한 기록이 전하지 않은 탓도 있다.

이명기는 1781년 어진도사시 수종화사였던 장인 김응환과 영·정조대에 걸쳐 세 차례나 어진도사에 동참화사로 참여했다. 1789년에는 당대 최고의 기량을 가진 단원(檀園) 김홍도(金弘道, 1745~1806)와 사신으로 중국 베이징을 다녀왔다. 1790년 용주사의 불화 제작과 1791년 ‘정조 어진’ 제작, 1796년 ‘서직수초상’ 제작을 함께할 정도로 김홍도와 인연은 깊었다. 또 정조의 명으로 각 신하들의 초상화를 그릴 만큼 왕의 신뢰를 받았다.

이명기의 초상화는 서양화의 명암법을 사용하여 사실적이며 입체적인 스타일이었다.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 1762~1836)은 “관료들의 초상과 낡은 초상의 모사까지 모두 이명기가 그렸다”는 기록을 남겼다. 김홍도는 “이명기의 그림은 ‘정묘함’에서 독보적이며, 서양화법인 투시법을 활용한 ‘책가도’에 뛰어난 화가”라고 칭송한 바 있다. 강세황(1713~1791)의 아들 강관이 서술한 ‘계추기사(癸秋記事)’에는 1783년 정조가 이명기에게 ‘강세황 71세상’을 제작하도록 명했으며, 작품의 제작 과정과 비용, 족자 표구과정, 보관함인 궤의 제작 등을 상세하게 서술하였다. 또한 “이명기는 28세 이전에 이미 당대 초상화의 일인자로 인정받아 임금과 조정의 신하들이 모두 그에게 초상화를 그리려 하였다”는 평을 기록해 놓았다.

‘송하독서도’는 초상화로, 이름이 높은 이명기의 또 다른 기량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바위 언덕에는 용비늘이 켜켜이 쌓인 푸른 소나무가 녹음을 펼치며 위풍당당하게 서 있다. 초가지붕 아래 커다란 창을 내어 방안이 훤히 들여다보인다. 옷매무새를 단정하게 한 선비가 독서 중이다. 뜰에선 시동이 차를 끓이고 있다. 찻물의 구수한 내음에 선비는 잠시 속세를 잊는다. 하늘은 맑아 찬바람이 불면 뜰 앞에 국화도 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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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의 오른쪽 위에는 ‘독서하기 여러 해. 심어놓은 소나무들 모두 늙어 용비늘이 생겼네(讀書多年 種松皆作老龍麟)’라는 화제와 이명기의 호 ‘화산관’ 아래 붉은 낙관이 있다. 오른쪽 화면 앞에는 여름을 견딘 화초가 이리저리 피어 있다. 바위 위에 두 그루의 소나무가 화면 전체의 공간을 압도한다. 집 안의 선비는 화가 이명기의 모습을 보는 것 같다. 시동은 무릎을 세우고 두 팔 위에 얼굴을 올려놓았다. 흩날리는 솔바람에 끓고 있는 차향이 우리를 유혹한다.

다양한 종류의 나무는 수묵으로 처리하여 맑은 담채를 베풀었다. 초상화 기법의 정교하고 사실적인 면과 수묵의 농도로 원근법을 표현하는 등 색다른 화풍을 보여준다. 나무의 필법이나 바위를 처리한 준법에서 김홍도의 화풍이 엿보인다.

연륜은 시간의 축적 속에 깊이를 더해간다. 소나무의 껍질이 인고의 세월을 견딘 훈장을 대신한다. 여고시절 하루에 한권씩 책을 읽었다면, 이제는 필요한 책을 골라 읽는다. 책을 고르는 데도 안목이 생긴 것이다.

나는 요즘 책 읽으러 커피숍으로 간다. 차를 마시며 담소를 나누는 커피숍이 이제는 책을 읽으며 공부하는 공간이 되었다. 선비가 책을 읽고 시동이 차를 끓이는 서재가 카페로 변한 것이다. 커피숍을 옮겨 다니며 실내인테리어와 바깥풍광을 감상한다. 그리고 책을 펼친다. 이명기의 그림에 나오는 ‘선비’가 되어 가을을 만끽한다. 이미 국화도 내 옆에 있다.

화가 2572kim@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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