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응상의 ‘천 개의 도시 천 개의 이야기’] ‘보헤미아 왕국’ 체코 체스키크룸로프

  • 임성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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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9-10-04   |  발행일 2019-10-04 제37면   |  수정 2020-09-08
오렌지 지붕속 동화같은 마을…중세시대 보헤미안이 좁은 골목서 나올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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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토다리에서 조망한 구 시가지. 정면으로 이발사의 다리와 요스트 교회가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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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과 산을 연결하는 망토다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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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발사의 다리에서 본 블타바 강. 가운데 높이 솟은 것이 성 비투스 성당 첨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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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 시가지의 특이한 가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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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곤 실레 아트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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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트리아 빈에서 200㎞ 정도를 달려 도착한 나의 체코 첫 여행지는 체스키크룸로프였다. 나는 여전히 체코보다 ‘체코슬로바키아’라는 이름이 더 익숙한 아재다. 그러니 이 도시는 이름부터 낯설었다. 하지만 TV 프로그램 ‘꽃보다 할배’의 여행지라거나 유럽에서 가장 아름다운 마을, 혹은 동화 같은 마을이라는 등의 수식어 때문에 이 도시를 프라하의 경유지로 택했다. 이 도시를 가기로 결정하고 자료를 뒤적이다보니 정작 이 지역은 보헤미안의 마을이었다. 내가 알고 있는 정보와 ‘보헤미안’이라는 단어가 주는 쓸쓸한 이미지와는 어울리지 않아 잠시 당혹스러웠지만 그래서 더욱 이 도시가 기대되기도 했다.

체스키크룸로프는 과거 보헤미아 왕국이 있었던 곳이다. 규율이나 관습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로운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 감성이 이끄는 대로 방랑을 즐기는 사람들을 우리는 흔히 ‘보헤미안’이라 부른다. 어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보헤미안’은 보헤미아 사람들이란 뜻이며, 보헤미아는 바로 체코의 서남부 지역, 곧 이곳에 있던 과거 왕국이었다. 1918년 체코가 슬로바키아와 묶이기 전까지 꾸준히 역사의 한 부분을 차지했던 보헤미아 왕국에는 유랑민족인 집시들이 많이 살았다. 프랑스 사람들은 이 집시들을 ‘보헤미안’이라고 불렀던 것이다. 체코는 보헤미안의 전통 위에 세워진 국가이고, 그 핵심 지역이 이곳 체스키크룸로프인 것이다.

규율보다 자유로운 삶 사는 보헤미안
가장 번창한 14∼16C 향취 고스란히

둘째로 오랜 역사 ‘체스키크룸로프 성’
성·구시가지 감싸 굽이치는 블타바강
산과 산사이 아치형 연결한 망토다리
성주가 정원 가는길 사람 피하려 조성

왕의 아들과 이발사 딸의 슬픈 이야기
주민 위해 희생한 이발사 기리는 다리
언어·정체성 신념 마리오네트 박물관



땅거미가 지기 시작했지만 내가 예약한 게스트하우스는 좀처럼 보이지 않았다. 한참만에 찾은 숙소는 블타바 강 옆 숲속에 숨은 듯이 자리하고 있었다. 일반 가정집처럼 작은 정원이 딸려 있었다. 주차를 하고 집 안으로 들어섰지만 문은 굳게 잠겨 있었고 인기척도 없었다. 순간 당황스러웠다. 하는 수 없이 예약한 곳의 연락처를 찾아 체크인을 하겠다고 하니, 쿨한 목소리로 문 옆 우편함에 열쇠가 있고, 체크아웃할 때도 거기 두고 가면 된단다. 에어비엔비의 개인 렌트 같은 방식이다. 어쩐지 숙소 가격이 무지 싸더라니.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우편함을 열었더니, 정갈한 필체의 환영 멘트와 함께 한눈에 봐도 세월의 두께가 느껴지는 투박한 청동 열쇠가 들어 있었다. 룸을 들어서니 투박한 침대와 탁자 때문에 애써 준비한 듯한 작은 꽃 한 송이가 눈에 확 띄었다. 내 입가에 절로 미소가 번졌고, 일순 긴장이 풀리며 설명하기 어려운 편안함이 기분 좋게 몸속을 파고들었다. 저녁 요기를 하고 강가를 어슬렁거리다보니 이곳이 머나먼 타국이고, 나는 나그네라는 사실조차 아득해졌다. 체코의 첫 이미지는 이처럼 자유롭고, 오래되고, 그래서 편안함이었다. 이런 이질적이고 복합적인 감정은 이곳이 보헤미아 왕국이었다는 사실로 인해 더욱 증폭되었던 것 같다.

다음 날 일찍부터 체스키크룸로프 성과 구 시가지를 찾았다. 체스키는 체코어로 ‘보헤미아의 것’을 의미하며, 크룸로프는 ‘강의 만곡부 습지’를 의미한다니, 체스키크룸로프는 ‘보헤미안의 블타바 강 만곡습지’ 정도의 의미라 하겠다. 이런 이름을 갖게 된 것이 이 성과 구 시가지를 가로지르는 블타바 강이 우리나라의 하회마을처럼 S자로 굽이치고 그 만곡 부분에 성과 시가지가 조성되어 있기 때문이었다. 체코에서 가장 긴 젖줄인 블타바 강은 체스키크룸로프뿐만 아니라 프라하의 카를교 아래를 흘러 독일로 향한다. 블타바를 독일식으로 ‘몰다우(Die Moldau)’라고 부르므로 체코 출신 작곡가 스메타나의 교향곡 ‘나의 조국, 몰다우’는 바로 이 블타바 강을 가리킨다. 이 음악은 보헤미안 정신이 강렬하게 발현된 민족주의 음악으로 유명하다. 그러고 보면 블타바 강에 휘감겨 있는 이 도시는 보헤미안의 발원지인 셈이다.

이 도시는 13세기에 건축된 체스키크룸로프 성을 중심으로 다양한 시대의 각종 건축양식이 종합되어 있다. 14세기에서 16세기에 가장 번창했으며, 당시 보헤미아 왕국의 향취가 고스란히 남아있다. 이 도시에서 가장 최근에 지어진 건물이 18세기 것이라고 하니 체스키크룸로프의 시간은 여전히 중세라고 해도 무방할 듯하다.

성 안으로 들어갔다. 프라하 성에 이어 체코에서 둘째로 오래되고 큰 성인 체스키크룸로프 성은 20세기 초까지 꾸준히 증축, 보수되면서 고딕, 르네상스, 바로크, 로코코 양식을 두루 갖추었다. 1240년 비트코프치 가문에 의해 지어지기 시작하여 로즘베르크 가문, 비데크 가문, 에겐베르크 가문, 슈바르젠베르크 가문까지 여러 귀족가문을 거쳐 간 이 성에는 성주가 살던 궁전과 예배당, 조폐소 등이 있었다. 특히 인상적인 것은 망토다리였다. 산과 산 사이를 아치형으로 연결해 놓은 다리의 모습이 망토를 둘러쓴 것 같아서 붙은 이름이라고 한다. 과거 성주가 주민들을 마주치지 않고 산 정상에 있는 자신의 개인 정원을 드나들기 위해 놓은 다리라고 한다. 산 아래 마을을 위협하듯이 내려다보고 있는 6층 높이의 망토다리는 서민과 성주 사이의 간격만큼 높고 아득하다.

이 성의 진정한 볼거리는 성 위에서 내려다보는 구 시가지의 모습이다. 망토다리에서 내려다보이는 구 시가지는 왜 이 도시를 유럽에서 가장 아름다운 마을이라 하고, 동화 같은 마을이라고 하는지 여실히 알게 해 준다. 오렌지 색 지붕이 만들어내는 스카이라인과 지붕 아래 좁은 골목길은 이 도시의 역사와 그 역사를 살아온 사람들의 온갖 이야기를 상상하게 만들었다. 좀 더 넓은 시야각으로 조망해보고 싶어 이 성의 가장 높은 전망대 흐라데크 타워를 올랐다. 160여 개의 삐걱대는 나무 계단을 오르다보니 중세로 시간여행을 온 것 같았다. ‘크룸로프’라는 지명은 이 타워에서 보이는 블타바 강의 만곡부로 확인할 수 있었다. 성과 구 시가지를 ‘S’자로 감싸 흐르는 블타바 강이 한눈에 들어왔다.

내려다볼수록 점점 저 속의 이야기들이 궁금해졌다. 망토 다리 밑을 지나 마을로 들어섰다. 성은 물론 구 시가지 전체가 1992년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으니, 도시 자체가 오롯하게 문화유적지이다. 유일하게 남아 있는 옛 성곽 문인 부데요비츠카 문을 지나니 성주를 모시던 하인들이 거주했던 라트란 거리가 이어졌다. 그리고 마을과 성을 경계 짓는 블타바 강이 흐르고, 그 위로 크지도 작지도 않은 이발사의 다리가 나타났다. 16세기에 만들어졌다는 이 다리는 라트란 거리 1번지에 있었던 이발사의 집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성과 마을을 이어주는 이 다리에 이처럼 특이한 이름이 붙은 것은 이발사에 얽힌 슬픈 이야기 때문이었다. 신성로마제국 루돌프 2세의 아들 줄리어스가 요양 차 이곳을 찾았다가 이발사의 딸 마르케타에게 반해 결혼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가 침실에서 의문의 죽음을 당하게 되자 왕자는 마을 사람들을 의심하여 살인자가 나타날 때까지 매일 마을 사람들을 한 사람씩 죽이기 시작했다. 마을 사람들이 죽어 나가는 것을 막아야겠다는 생각에 장인인 이발사가 거짓 자수를 했다. 이발사는 처형을 당하였는데, 사실 살인자는 정신병을 앓던 왕자 자신이었음이 나중에 밝혀진다. 루돌프 2세 황제는 자신의 아들도 교수형에 처해 이발사의 억울한 죽음을 보상했고, 마을 사람들은 이발사의 희생을 기려 이 다리를 이발사의 다리라고 부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망토다리에서 느꼈던 감정처럼 높은 성과 낮은 마을에 사는 사람들의 간격이 빚은 비극이었다. 이발사의 다리 위에는 이발사를 기리기라도 하는 것처럼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상과 왕비의 고해성사 내용을 끝까지 왕에게 말하지 않아 블타바 강에 던져져 순교한 성 요한 네포무크의 동상이 서 있었다.

구 시가지는 마을이라고 부르고 싶었다. 특별한 볼거리가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왠지 모르게 정겹고 편안했다. 그것은 사람을 위압하는 높고 큰 건물이 없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고개를 들고 보아야 할 것은 오직 성당과 교회 건물뿐이었다. 길을 걷는 동안 눈에 들어오는 호텔, 식당, 기념품 상점 어느 하나 튀는 건물이 없었다. 좁은 골목골목 사이로 세월의 더께가 잔뜩 붙어 있는 모습이 금방이라도 중세 복장을 한 보헤미안이 문을 열고 나올 것만 같았다. 시청사가 있는 구 시가지 중심 스브로노스티 광장도 그랬다. 그 흔한 맥도날드나 스타벅스 하나 보이지 않았다. 그 아득한 해발 3천m의 고대 도시 페루 쿠스코에도 매장을 연 그들이 아니던가. 사실 이 기업들이 이곳에 매장 내는 것을 시도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맥도날드 본사에서 이곳에 매점을 내는 조건으로 이 마을 모든 가구의 전기료를 영원히 자기들이 부담하겠다는 제안을 했다고 한다. 그런데도 마을 주민들은 전체 회의에서 이 제안을 거절했다고 한다. 패스트푸드가 마을의 정체성에 맞지 않을뿐더러 매점이 들어서게 되면 식당으로 생계를 유지하고 있는 이웃들에게 피해가 갈 것을 염려해서라고 한다.

구스타프 클림트의 제자였던 표현주의 화가 에곤 실레도 그 정신을 물려받았던 것 같다. 어머니의 고향인 이 마을에서 에곤 실레는 3년간 머물며 작품 활동을 했다고 한다. 그는 인간에 내재된 은밀한 욕망을 마치 고발이라도 하듯 대담한 선으로 그려나간 오스트리아 출신의 요절한 화가이다. 소장 작품이 많지는 않지만 1993년에 그를 기념하는 에곤 실레 아트센터가 이 마을에 세워졌다.

대도시라면 그냥 지나쳤을 법한 작은 미술관이다. 그것은 마리오네트 박물관도 마찬가지였지만 체코 사람들이 마리오네트 인형에 이입하는 역사·문화적 애정을 알고서는 들르지 않을 수 없었다. 처음에 아동교육을 목적으로 했던 마리오네트는 점차 다양한 민중의 삶을 이야기하는 민중인형극으로 발전했고, 체코에서 민족주의 바람이 불자 자국의 언어와 정체성을 지키는 데 활용했던 것이 마리오네트였던 것이다.

한두 시간이면 다 둘러볼 수 있다는 이 작은 도시에서 여섯 시간 넘게 꾸물거렸다. 신기하게도 작고 사소한 것에 자꾸 눈길이 가고 귀 기울이게 되는 도시였다. 대구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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