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혜숙의 여행스케치] 봉화 35번 국도

  • 임성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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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9-11-08   |  발행일 2019-11-08 제36면   |  수정 2020-09-08
“맑고 서늘한 청량, 쪽배에 누워 물결속 유랑하고픈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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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량산 입구의 학소대. 예로부터 학이 날아와 새끼를 치고 살았다는 곳으로 인공폭포를 가동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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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화 선유교. 백룡담 소 위에서 신선이 노니는 다리라는 의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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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유교 다리 입구의 피리부는 여인. 뒤쪽으로 보이는 것이 백룡담과 턱걸바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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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바위 전망대의 호랑이 상. 송암 강영달이 맨손으로 범을 잡았다는 전설이 있다.

낙동강을 따라 안동의 도산서원과 봉화의 청량산을 오갔던 퇴계는 그 길을 ‘그림 속으로 들어가는 길’이라고 했다. 세계적인 여행정보 안내서인 ‘미슐랭 그린가이드’에는 청량산을 끼고 굽이굽이 흘러가는 낙동강과 강변 마을 허리 굽은 할머니들의 노동하는 모습이 담겨 있다. 퇴계의 시대와 오늘날의 여행안내서 사이에 놓여있는 시간에는 불변의 신적인 특성이 있는 듯하다. 그것은 방일한 열정이 누릴 법한 영원한 젊음이라기보다는 결코 늙지 않는 초연한 미(美)라고 할 만한 것이다. 퇴계로에서 청량로가 되면서 봉화에 들어선다. 강변의 산자락으로부터 산을 개간해 살아가는 사람들의 마을이 멀어진다. 허리 굽은 할머니들은 보이지 않지만 낙동강은 굽이굽이 길과 함께 흘러간다. 저 먼 앞으로 길의 고도가 조금씩 높아지는 모습을 보며 이미 그림 속에 들어섰다는 것을 깨닫는다. 봉화의 35번 국도다.

학이 날아와 새끼 치고 살았던 학소대
퇴계 도산구곡 제9곡에 만든 인공폭포
선녀가 노닐었던 하늘에 걸쳐진 선유교
하늘에서 갓 내려온듯 반짝이는 여인상
백룡담의 백마가 울자 태어난 임장군
병자호란 때 임경업 장군 찾아 도움줘
신비의 도로 산길올라 범바위 전망대


◆청량산 입구에서 학소대를 마주하다

그리고 곧 청량산 입구다. 청량교 너머 산으로 드는 문이 보인다. 그리고 그 오른쪽 강변에 섬세하게 층진 절벽이 솟아 있다. 예부터 학이 날아와 새끼를 치고 살았다는 학소대다. 학소대 정수리에서부터 폭포수가 힘차게 떨어지고 있다. 선택적으로 쏟아내는 인공폭포라고는 하나 거침없고 확신에 찬 낙하는 언제나 쾌감을 준다. 이 일대는 도산구곡(陶山九曲) 중 마지막 제9곡인 청량곡(淸凉曲)이다. 도산구곡은 퇴계가 직접 설정하고 경영한 것이 아니다. 그의 발길이 즐겨 미친 곳을 더듬어 후대에 설정되었다. 정조 때의 하계(霞溪) 이가순(李家淳)이 지은 도산구곡가가 오늘날 전해진다. ‘구곡이라 청량산 더욱 우뚝하니/ 축융봉이 남쪽 아래로 긴 내를 굽어보네/ 비로소 극처는 사다리로 오르기 어려운 줄 아니/ 스무 봉우리 모두 하늘 높이 솟았기 때문이네.’

물빛은 산 빛을 닮아 초록이다. 머지않아 물빛도 산 빛도 붉어질 것이다. 맑고 서늘한 청량, 하늘높이 솟은 봉우리는 그저 바라보면 좋고 지금은 탄탄하게 짜인 쪽배에 누워 물결 속을 유랑하고 싶다는 생각만 든다. 강 상류인 명호면소재지에서부터 이곳까지는 여름철 래프팅 명소다. 주먹을 쥐고 파이팅을 외쳐야 할 것만 같은 래프팅은 방일한 열정들만이 지닐 수 있는 찬란한 용기를 필요로 하는 스포츠 같다. 학소대 맞은편은 청량산 집단시설지구로 캠핑장과 박물관, 식당 등이 들어서 있다.

◆선유교에서 백룡담을 내다보다

꽤나 한참동안 강을 거슬러 달린다. 몇 개의 다리와 몇 개의 마을을 지나면 우측의 청량산 줄기는 문명산으로 이어지고 좌측에는 만리산이 불쑥 가깝다. 길이 언제 이렇게 높아졌나 싶을 때 하늘에 걸쳐진 선유교(仙遊橋)가 나타난다. 선녀가 노니는 다리다. 선유교 입구에 두 여인상이 있다. 이름을 알지 못하는 그녀들은 물에서 갓 나온 듯, 하늘에서 갓 내려온 듯, 검게 반짝거렸다. 두 사나이가 다리 페인트칠을 막 끝냈다. “미끄러지지 않게 조심하세요.” 내일의 당신은 깨끗하게 단장된 선유교를 걸을 수 있을 것이다.

다리 아래에는 백룡담(白龍潭)이 깊다. 그 위로는 턱걸바위가 직각으로 솟아 무심히 정면을 바라보고 있다. 옛날 백룡담에서 백마가 났다고 한다. 백마가 3일 동안 울자 인근 마을에서 아이가 태어났다. 임장군이다. 임장군은 백마를 타고 다녔고 턱걸바위에서 턱걸이를 하며 무술을 연마했다고 한다. 봉화군지 ‘기인(奇人)’ 편에 ‘임장군은 조선 16대 인조 때 사람으로 이름은 전하지 않는데 석돌(石乭)이라는 설도 있다. 용마 한 필로 훈련을 쌓았고, 17세 때 출가해 병자호란 때 임경업 장군을 찾아가 돕다 이후 청나라에 들어간 뒤 종적을 알 수 없다’고 기록하고 있다. 백룡담 바위가 희다.

선유교에서 조금만 가면 명호교가 나타난다. 강 이쪽은 임장군이 태어났다는 비나리마을, 강 건너 저쪽은 고계마을이다. 다리가 생기기 전에는 ‘배나들이 나루터’에 두 척의 배를 띄웠고 겨울이면 섶다리를 놓았다고 한다. 산골오지 비나리에는 소 생일을 챙기는 순정한 사람들이 산다. 이제 곧 명호면소재지다. 이곳에 ‘낙동강시발점공원’이 있다. 낙동강으로 유입되는 1천634곳의 발원지 가운데 태백 황지연못에서 발원된 지류가 운곡천과 만나 낙동강 본류가 시작되는 곳이다. 두(이) 강(나리)이 만나고 예부터 두개의 나루가 있었다고 해서 ‘이나리강변’이라고도 부른다. 명호면소재지가 봉화 낙동강 래프팅의 시작점이다. 래프팅을 알리는 커다란 건물들이 조용히 크다. 여름과 여름의 눈부신 소음에는 휘발성이 있는 것 같다.

◆범바위에서 낙동강 물돌이를 내려다보다

비교적 부드럽게 굽이치던 길이 빙글빙글 지그재그로 산길을 오른다. ‘신비의 도로’라는 푯말이 나타난다. 오르막이 내리막으로 보인다고도 하고 내리막이 오르막으로 보인다고도 한다. 아무래도 갸웃하니 어쨌든 신비한 도로인 것은 맞다. 고갯마루가 가까워지면 ‘범바위 전망대’가 나타난다. 주차공간이 있는 쉼터에서 조금 오르면 길 가 낭떠러지 바위 위에 호랑이 조형물이 있다.

조선 고종 때 통덕랑을 지낸 송암 강영달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한양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그는 이곳에서 선조의 묘소를 바라보며 멀리서 절을 올렸다고 한다. 그 때 갑자기 집채만 한 호랑이가 나타났다. 그는 맨손으로 온 힘을 다해 호랑이를 잡았다고 한다. 그때부터 이곳을 ‘범바위’라고 부르게 되었다. 바위는 실제로 호랑이의 모습이었다는데 도로를 개설하면서 훼손되었고 대신 바위 위에 호랑이 조형물을 세웠다. 호랑이는 3마리로 이나리, 비나리, 베르미 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모두 봉화 명호면에서 만날 수 있는 지명들이다.

마치 호랑이들을 거느린 모양새로 늠름하게 아래를 내려다본다. 까마득한 저 아래에 낙동강이 크게 물돌이를 만들며 유장하게 흐른다. 저 좁고 깊은 골짜기에 안개가 덮일 때 그리도 멋있다고 한다. 새순의 계절이나 단풍의 시절이나 눈에 덮이나 비에 젖으나 아름답지 않은 강산이 있을까. 35번 국도는 부산에서 강릉까지 동해안 내륙을 종단한다. 그 중 안동에서 태백으로 향하는 봉화의 이 길이 가장 아름답다고들 한다. 목적지가 없어도 좋다. 지금이 달리기 좋은 오늘이다.

여행칼럼니스트 archigoom@naver.com

▨ 여행정보

중앙고속도로 남안동IC로 나가 안동방향 5번 국도를 타고 가다 도산서원 방향 35번 국도를 타고 봉화·태백 방향으로 가면 된다. 청량산 입구 학소대~선유교~백룡담~명호면소재지를 차례로 지나 도천삼거리에서 우회전 해 가면 삼동재로 오르고, 신비의 도로와 범바위 전망대가 나온다. 청량산 입구에서 명호면소재지(낙동강시발점테마공원)까지 낙동강을 따라 트레킹이 가능한 탐방로가 조성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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