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의 대구·경북 문화재 약탈 스토리

  • 박진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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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4-04-11   |  발행일 2014-04-11 제34면   |  수정 2014-0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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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도쿄국립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금제 이식(귀고리). 형태와 제작기법으로 볼 때 고령지역에서 도굴된 대가야의 것으로, 오구라가 반출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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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대 야외박물관에 원 소재지가 불분명한 부도탑 2기가 있다. 경북대로 옮겨지기 전까진 대구에 거주하던 오구라 다케노스케의 사택에 있던 것이다. 오구라가 광복 후 일본으로 가져갈 수 없어 남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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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보스턴박물관에 있는 대가야의 금제 귀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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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기메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용문환두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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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도쿄국립박물관에 있는 용문환두대도. 일제강점기 고령에서 도굴된 것으로, 대가야 것이다. 칼등에 ‘이 대도를 소유한 자에게는 두려울 것이 없고 높은 지위와 부가 보장된다’는 문구가 써 있다. 대가야인들이 문자를 사용했음을 알게 한다.



 

 

 

 

 

 

 

 

 

 

 

 

 

 

 

 

 

 

 

 

 

 

 

 

 

 

 

 

 

 

 

 

 

 

 

 

 

 

 

 

 

 

 

 

경주·고령은 日 도굴꾼 놀이터
고분 근처에 기관총 걸어놓고
한국인 얼씬도 못하게 한 뒤
무자비하고 대대적인 도굴 자행

근대 이후 우리 문화재는 대부분 일본에 의해 반출됐다. 일본은 고적 조사라는 미명하에 무덤을 발굴하고, 연구를 목적으로 한다며 반출을 서슴지 않았다. 특히 도굴을 통해 많은 문화재를 약탈했다. 도굴은 인류역사에서 인간이 가진 가장 잔혹한 행위이자 인간의 존엄을 파괴하는 행위다.

예로부터 우리나라에서 분묘를 파괴한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무덤 속에서 나온 물건은 재앙을 가져온다고 믿었기에 집안에 들이는 것조차 꺼렸다. 무덤 속에 있는 부장품이 돈이 된다는 것을 알려준 이는 일본의 도굴꾼이었다. 도굴꾼은 대개 일본의 규슈지방에서 건너 온 하층민들이었다.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을 거치면서 막강한 군사력을 내세워 ‘굴옥(堀屋)’이라는 도굴단까지 등장했다. 이들은 고려왕릉 근처에 기관총을 걸어놓고 한국인을 얼씬도 못하게 한 다음 대대적인 도굴을 자행하기도 했다.


문화재 寶庫 대구·경북
전국서 가장 많은 피해
日, 고적조사 미명 아래
전문 도굴꾼 동원 약탈
골동품상 등 통해 반출
일본은 물론 歐美로도
돈에 눈먼 일부 한국인
국보 헐값에 팔아넘겨

◆일본으로 반출된 대구·경북지역 문화재

“장단군과 풍덕군 등지에 한인 도적과 일인 도적이 오래된 무덤을 파고 고려자기를 도적질하여 가는 경우가 종종 있어 자손이 있는 무덤에는 밤마다 무덤을 지킨다고 한다.”(1909년 11월18일자 대한매일신보)

이들이 도굴한 문화재는 고물상, 골동품상 등을 통해 반출됐다.

대구·경북지역은 일본인이 가장 먼저 눈독을 들인 곳이다. 1900~1901년에는 야기, 1902년에는 세키노, 1906년에는 이마니시 류가 대구·경북을 중심으로 대대적으로 유물을 발굴했다. 1909년 세키노가 시행한 고건축 조사는 학술적인 목적이 아니라 식민통치를 위한 자료조사의 성격을 띠고 있었다. 경주 서악리 고분 출토품은 이때 대부분 일본으로 반출됐다. 1910년에는 고령 주산 일대에서 출토된 대가야 시대 토장품을 도쿄대 공대로 가져갔다. 1911년 경주일대, 1913년과 1915년 경주 명활산성터, 반월성터를 발굴하는 등 매년 수백 기의 출토유물이 일본으로 반출했다.

1916년부터 일제는 고적조사 5개년 계획을 세워 체계적으로 유물을 발굴했다. 이 과정에서 발굴된 유물의 일부는 사유화돼 반출됐다. 그 대표적인 예가 1917~19년 발굴된 가야유적이다. 야쓰이로는 수많은 고분을 발굴하고, 보고서도 내놓지 않았으며, 대부분의 유물을 일본으로 빼돌렸다. 1930년대 들어서 조선총독부는 조선고적연구회라는 단체를 만들어 유물을 일본으로 반출했다. 이 가운데 이마다 기요노리 같은 자는 총독부 정무총감이자 조선고적연구회 이사장이란 직함으로 경주에서 발굴된 국보급 문화재를 기증이란 명목으로 도쿄박물관 등지로 반출했다. 하지만 총독부는 이를 제지하지 않았다. 관학자를 중심으로 한 문화재 반출에 비해 도굴꾼과 골동품점이 빼돌린 유물은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많다. 실례로 1909년 일본에서 ‘고려소전람회’가 열렸는데, 이때 출품된 수량이 무려 900점이나 됐다.

정규홍 <사>대구경북향토문화연구소 문화재연구실장은 “일본의 유명인사가 소장하고 있던 일부만을 모아 한자리에 전시한 것이 900점이라면 이보다 몇 배나 되는 문화재가 일본으로 넘어갔을 것”이라고 밝혔다.

골동품상 중에는 미국, 영국, 프랑스에 지점을 둔 야마나카상회, 서울에 본점을 둔 도미타상회 등이 미국과 유럽으로 우리 문화재를 팔아넘겼다. 나라는 빼앗겨도 민족유산이 보존되는 한 민족정신은 살아있다는 신념으로 문화재를 수집한 간송 전형필 같은 애국지사가 있는 반면 사리사욕에 눈이 멀어 민족의 보배를 헐값에 일본으로 빼돌린 이도 있었다. 문명상회 이희섭, 한남서림 이순황, 조선미술관 오봉빈 같은 이들은 국내보다 일본에 고미술품을 팔아넘겼다. 정 실장에 따르면 문명상회가 일본으로 반출한 문화재는 전람회에 진열한 것만 1만4천516점이었다. 그는 1944년까지 도쿄와 오사카 상설매장에 판매한 것을 합치면 3만점이 넘을 것이라고 추산했다.

한국경제의 80% 이상을 차지하던 일본인은 부를 바탕으로 전국 각지에서 문화재를 수집했다. 광복 전 대구에서는 시라카미 대구여자보통학교 교장의 회갑기념으로 대구고미술전을 열었는데, 참가한 일본인의 수만 46명이나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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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1년 대구에서 열렸던 ‘신라예술품전람회’ 리플릿. 오구라 등 일본인이 소장한 골동품을 전시했다.


◆대구의 초기 골동상

대구에는 청일전쟁을 계기로 1894년 8월 일본군대가 달성공원에 진주한다. 1898년 대구일본인회가 창립되고 대구거류민단으로 발전한다. 대구에 일본인의 수가 증가하면서 골동품점도 생기게 된다. 조선총독부 조선사편수회 회원과 경성제국대학 교수로 있으면서 한국사를 왜곡·말살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한 일본의 이마니시 류는 1906년 그의 기록에 “경주에서 발굴이 성행해 이들 발굴품이 고물상으로 넘어가는 것을 보았다”고 증언했다.

요시무라 이노키치는 러일전쟁 후 대구에서 ‘효시상회’라는 골동품상을 운영했다. 1905년 조선신문사에 입사했다 골동품에 취미가 있어 골동품업계에 종사한 이나모토는 동성정(東城町)에 ‘이나모토 골동점’을 열고 조선의 고기와나 회화, 미술품을 수집했다.

1912년에 발간한 ‘대구요람’에 따르면 고물골동상으로 등록한 업소가 15개나 됐다. 이 중 이나모토 시노미와 신미 시게조의 골동상이 가장 이름이 났다.
박진관기자 pajika@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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