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경북의 유물수집·수장가

  • 박진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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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4-04-11   |  발행일 2014-04-11 제34면   |  수정 2014-04-11
대낮에도 무덤 파헤친 ‘도굴왕’ 오구라…광복 후 트럭 7대 분량 日로 가져가

◆대구부호 오구라 다케노스케

‘오구라 컬렉션’으로 유명한 오구라 다케노스케. 그는 일본인 골동수집가 중 규모나 투자에서 최고의 수집가로 알려져 있다. 대학에서 법학을 전공한 오구라는 1904년 경부철도회사에 입사해 회계를 담당하면서 그해 대구에 정착했다. 이듬해 회사를 그만두고 한국제정회사를 설립했다. 그는 대구읍성 밖에 거주하며 동문과 북문 외곽에 있는 땅을 엄청 사모았다. 읍성이 헐리면서 막대한 부를 축적한 그는 1911년 대구전기회사를 설립했다. 이후 남선전기, 북선전기, 조선전력 등 3대 회사 사장을 했다. 대구민단 의장, 경북도회 의원, 대구상공회의소 소장을 역임하면서 막강한 재력을 바탕으로 우리나라 고미술품을 농단했다.

그는 고고자료, 조각, 금속공예품, 도자기, 칠공예, 서예, 화화 토속품 등을 닥치는 대로 수집했다. 우리나라 문화재수집의 대부 간송보다 10배나 거액인 2천만엔을 투자했다고 알려져 있다. 오구라는 대구시 중구 문화동, 지금의 동아백화점 앞에 살면서 서울에도 호화주택을 뒀다. 그가 서울에 가기만 하면 문전성시를 이뤘다. 오구라는 골동품값을 후하게 쳐주었다. 그래서 거상뿐만 아니라 인력거꾼까지 거래상인으로 나서기도 했다. 그는 도굴꾼을 시켜 민족유산을 도둑질했다. 1920년대 대구, 경주, 고령 일대 신라·가야문화권의 도굴이 성행했을 때 상당수는 그의 손아귀에 들어갔다. 1923년 총독부가 대구 달성고분을 파괴해 발굴을 했는데, 당시 발굴된 유물 중 관모전립금구 등 많은 유물도 그의 수중에 들어갔다.

증언에 따르면 그는 대낮에 당당하게 인부를 이끌고 와서 도굴을 했지만 총독박물관으로부터 미술품기부자로 포상을 받기까지 했다고 한다. 현재 일본문화재로 지정돼 있는 ‘금동투조관식’을 비롯해 금동관, 철제갑옷, 미륵보살반가사유상 등 각종 불상이 오구라 컬렉션에 포함돼 있다. 현재 경북대학교 야외박물관에 있는 2개의 부도(浮屠·승려들의 사리를 안치한 무덤보물 제135호, 제285호)도 산간벽지에서 불법으로 자신의 저택에 갖다놓았으나 광복 후 일본으로 가져갈 수 없어 남긴 것이다. 오구라는 광복 후 기범선을 빌려 타고 일본으로 도망갔다. 오구라의 회사에 근무하던 한국인의 증언에 따르면 그때 가져간 문화재가 트럭 7대 분량은 족히 됐다고 한다. 그가 일본으로 반출한 문화재는 총 1천110건으로 알려져 있다. 그 가운데 고고자료가 580건, 미술공예품이 494건, 기타가 38건이다.

광복 후 그는 일본에서 오구라 컬렉션을 설립하고 전시관을 지어 유물을 전시하다 아들에게 물려줬다. 하지만 생활이 어려워진 아들은 유물을 일부 처분하고 1982년 도쿄국립박물관에 기증했다. 이때 유물을 포장하는 데만 열흘이 걸렸다고 한다.

한편 지난 1일 우리문화재찾기반환운동에 앞장서고 있는 혜문 스님이 도쿄국립박물관 관장에게 오구라 컬렉션 소장을 중지해 달라는 신청서를 보냈다. 혜문 스님은 도쿄박물관이 현재 소장하고 있는 조선대원수 투구 등 왕실유물 9점, 금관총 유물 8점, 부산 연산동 및 창녕 출토유물 17점 등 총 34점이 도굴품이라고 했다.


●대구의 병원장 이치다 지로

|대구에서 오구라 다음의 골동품 수장가는 금속 및 자기류를 수집한 이치다 지로다. 그는 대구에서 병원을 경영하며 광적일 정도로 한국의 고미술품을 수집했다. 그의 저택에는 도자기실을 따로 마련하고 고려자기, 조선백자와 신라·가야고분군에서 나온 도굴품을 소장했다. 그의 소장품 가운데는 공민왕릉에서 나온 도인(陶印)도 있으며, 고려자기만 해도 400점이 넘었다. 이치다는 대구 이남에서 도굴한 도굴품을 오구라와 함께 가장 많이 보유한 인물이다. 광복 전 그는 대구에서 열린 ‘신라예술품전람회’에 삼국시대 순금제이식, 은제환도병두, 사리호 등 총 300여점을 출품했다. 광복 후 일본으로 소장품을 밀반출하려다 걸려 골동품이 국제시장에 나와 헐값에 팔려나갔다. 하지만 그가 따로 보관한 400여점의 고려자기는 일본으로 반출됐는지 국내에서 하나도 알려진 게 없다.

●대구의 목재상 스기하라 초타로

스기하라는 1903년 경부선철도공사를 청부받아 대구에서 목재상을 했다. 경북도의원, 대구부회 부회장을 하면서 부를 이용해 문화재를 사 모았다. 그는 1944년 그의 소장품 중 ‘조선고고도록’까지 만들어 소장품을 자랑했다. 환두태도, 세형동검 등 신라·가야 유물을 비롯해 평양의 유물도 다수 수집했다.

●대구여고보 시라카미 주키치 교장
 그는 평양공립고등여학교 교장을 하면서 낙랑시대 유물을 다수 수집했다. 대구에 온 뒤 신라·가야 고분발굴에도 적극 참여해 각종 유물을 마구 끌어모았다. 1940년 6월 회갑기념으로 고고품도록을 만들었는데 평양에서 수집한 것은 물론 퇴계 이황의 서한, 김정희의 서한, 서애 류성룡의 글씨 등도 있다.
박진관기자 pajika@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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