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세에 중국의 어머니 연락받고 北 탈출…할머니 별세 소식 마음 아파”

  • =박진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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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5-01-16   |  발행일 2015-01-16 제34면   |  수정 2015-01-16
대학생 리명룡씨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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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와 형을 북에 두고 온 리명룡씨. 한 전시장에 걸린 흑백 사진을 보며 지난 일을 회상하고 있다.



리명룡(24·가명). 그의 고향은 함경북도 회령시에서 중국과의 국경 가까이에 있다.

높은 산이 앞뒤로 가로막혀 있는 산골로 걸어서 30분만 가면 두만강에 닿는 곳이다. 맞은편은 중국 길림성 연변조선족자치주 삼합진. 리씨의 부모는 협동농장에서 농사일을 했다. 아버지는 옥수수농장, 어머니는 과수농장에서 일을 했다.

“옥수수를 쌀알크기만큼 분쇄해 옥수수밥을 지어먹었습니다. 노란 빛을 띤 데다 구수했습니다.”

그의 할아버지는 일제강점기 때 경찰을 해 집안 성분이 좋지 않았다. 그의 아버지는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농장에 들어갔다.

“열심히 일을 해도 성분이 좋지 않아 농장에서도 조장이나 반장 이상으로 올라갈 수 없습니다. 특히 김일성 부자 체제를 비판한다든지 하면 신분이 추락해 출세할 수 없습니다.”

리씨는 두 살 터울의 형과 친구들이랑 두만강에 가서 물고기를 잡아 어죽을 끓여먹던 기억도 있다.

그는 탁아소와 소학교에 다닐 때 김부자 찬양 동요를 부르며 자랐다. 그는 김일성 부자가 신과 같은 존재인 줄 알았다고 했다. 그는 고난의 행군 시기에도 배를 곯지 않았다.

“어머니가 종종 장마당에 가서 장사를 했기 때문에 먹고 사는 데는 지장이 없었습니다. 함경남도 지역에선 굶어죽는 사람도 있다고 들었지만 중국과 국경이 가까워 밀무역도 했기에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습니다. 토끼고기, 돼지고기도 가끔 먹곤 했습니다. 그때가 가장 행복했던 시절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가 13세 되던 해 그의 어머니가 중국으로 가면서부터 가세가 기울었다. 어머니는 한 달 정도만 있다 온다고 했지만 감감무소식이었다.

“한번은 어머니와 손을 잡고 길을 가다 ‘나 없으면 살 수 있겠나’ 하기에 ‘안 된다’고 했어요. 그땐 그게 무슨 말인 줄 몰랐는데…. 전 어머니가 오면 자랑을 하기 위해 한 달간 나무를 산더미같이 해 쌓아놓았습니다. 그런데도 어머니가 오지 않은 겁니다. 동네에선 어머니가 중국으로 영영 가버렸다는 소문이 났지요. 배신감이 들었습니다. 당시 우리 학급엔 40명이 한반에 있었는데 그중 3~4명의 친구 어머니가 중국으로 넘어갔습니다. 밤중에 몰래 울기도 했어요.”

그는 회령에 있는 한 고등중학교에 입학했지만 배가 고파 공부도 소홀해질 수밖에 없었다.

“희멀건한 죽만 매일 먹었습니다. 항상 배가 고팠지요. 한번은 영양실조로 길을 가다 쓰러진 적도 있습니다. 정신은 멀쩡한데 일어나려해도 일어날 수가 없어 5분 정도 가만히 앉아있었습니다. 손자 밥그릇에 강냉이밥을 가득 채워주고 할머니는 거의 굶다시피 했어요. 재작년에 할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그게 가장 마음이 아픕니다.”

18세가 되던 2008년 9월, 그는 한 브로커로부터 어머니에 대한 소식을 들었다. 중국으로 넘어오라는 전갈이었다. 그는 아버지와 함께 9월 마지막 날 국경수비대의 감시를 뚫고 두만강을 건넜다.

“처음엔 경상도 말 못알아들어 힘들어…스포츠구단 취업하는 것이 꿈”

함께 탈출하던 아버지는 다시 북으로
어머니 7년만에 서울서 눈물의 상봉
북한의 연평도 포격땐 죄책감 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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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명룡씨가 대구KYC 사무실에서 책을 읽고 있다. 운동을 좋아하는 리씨의 꿈은 프로스포츠 구단에 취업하는 것이다.


하지만 우여곡절 끝에 그의 아버지는 다시 북한으로 되돌아가야 했다. 그는 브로커가 시키는 대로 여권을 위조해 단둥으로 가서 한국으로 가는 배를 탔다. 하지만 중국 공안에 붙들려 유치장에 있다 뒷돈을 넣어 풀려났다. 그는 연변조선족자치주 왕청시에 있는 한 조선족동포의 집에서 2개월간 머물렀다.

“북한으로 다시 돌아갈까 하는 생각도 했습니다. 하지만 고향에는 가고 싶어도 그 체제 속에선 다시 살 자신이 없더라고요.”

그는 16명의 북한이탈주민과 함께 중국과의 접경지대인 미얀마로 들어가다 국경수비대에 걸려 다시 중국으로 추방됐다. 16명은 국경지대에 머무르며 다시 탈출을 엿보았다.

낮에는 숲속에 숨어 지내고 밤엔 식량을 구하러 10시간이나 걸었다. 한 달가량 결국 국경지대에 머무르다 작은 배를 나눠 타고 라오스를 거쳐 태국으로 갔다. 태국에선 불법체류자로 분류돼 12일간 구치소 생활을 하다 방콕 주재 한국대사관에 인계됐다.

2009년 3월, 그는 6개월간의 장정 끝에 대구에 도착했다. 대구에 오기 전 서울에 있는 하나원에서 7년 만에 어머니와 눈물의 상봉을 했다.

“어머니가 쌍꺼풀 수술을 해서 처음엔 몰라봤습니다. 어머니가 대성통곡을 하더군요.”

그는 K대 모 학과에 입학해 현재 4학년이다. 처음엔 친구도 정보도 없어 힘들었다. 특히 경상도 말을 못 알아들었다.

“멍 때리다가 1년이 지나갔어요. 그러다 차츰 친구도 사귀고 남한 생활에 적응이 돼 가더군요.”

그는 대학생활을 하면서 주유소와 백화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기도 했다. 축구를 좋아해 지난해 12월엔 4급 축구심판자격증을 땄다. 풋살 심판자격증도 가지고 있다. 나중에 삼성라이온즈나 대구FC 같은 스포츠구단에 취업하는 게 꿈이다.

그는 5년째 한국생활을 하면서 느낀 점이 많다. 우선 북한과 다른 점은 노력한 만큼의 대가가 있고 선택의 자유와 폭이 많고 넓다는 것이다. 하지만 지나친 경쟁으로 인해 상대적 박탈감과 상실감이 크다고 했다.

“한국이 OECD 국가 중에 자살률이 가장 높은 것도 과다한 경쟁에서 오는 현상이라고 봅니다. 북한에서 자살을 하면 정부에 반하는 행동이기 때문에 자살률이 낮습니다. 최근 제 친구 1명도 죽고 싶다고 하기에 ‘나 같은 사람도 있는데 힘을 내라’고 이야기했지요. 젊어서 고생을 한 것이 사는 데 도움이 될 것 같아요. 허허허.”

그는 북한의 연평도 포격사건 땐 왠지 죄책감이 들기도 했다고 했다. 2012년 대선 때 처음으로 투표를 했다는 리씨는 “개인적으로 어머니에게 걱정을 안 끼치고 잘사는 게 목표이고 국가적으론 저희 같은 이산가족이 하루 빨리 만날 수 있도록 평화통일이 되는 것이 소망”이라고 했다.
글·사진=박진관기자 pajika@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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