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의 길’로 기념할 만한 인사

  • 박진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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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5-04-17   |  발행일 2015-04-17 제34면   |  수정 2015-04-17

◆독립지사 우재 이시영

‘만주의 날개 달린 호랑이’. 도산 안창호는 우재 이시영(1882~1919)을 그렇게 불렀다. 1919년 그가 병사하자 친척이었던 성재 이시영은 “문무겸전한 그가 갔으니 또 하나의 별을 잃었다”고 한탄했다. 심산 김창숙 또한 “우재가 살아있었다면 나라 꼴이 이처럼 되진 않았을 텐데”라고 아쉬워했다.

우재는 대구에서 성리학의 대가였던 이관준의 아들로 태어나 37세의 나이로 요절한 항일독립지사다.

그는 25세 때 중국으로 망명해 독립운동에 투신했다. 이후 대구로 돌아와 박상진, 윤상태, 서상호 등과 애국단을 조직해 군자금을 마련하다 발견돼 2년간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그는 안희제, 최준, 서상일 등과 광복단을 만들었다.

우재는 1914년 다시 중국으로 가 김동삼, 김좌진 등과 독립운동을 도모했다. 15년에는 윤상태, 서상일, 박상진, 홍주일 등과 앞산 안일암(현 안일사)에서 조선국권회복단을 결성했다. 3·1운동 뒤에는 유하현 삼원포에서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하는 데도 힘을 보탰으나 그해 만주에서 병을 얻어 타계했다. 하지만 우재의 유해는 아직 찾지 못하고 있다.

우재의 증손자인 현재 이욱 원화여고 교장은 “증조부의 유해를 찾기 위해 노력하고 있지만 여의치 않다”면서 “우재 선생의 길을 만드는 데 찬성한다”고 했다. 앞산 큰골에는 우재 이시영 순국기념비가 있다. 매년 원화여고에선 현충일에 참배를 간다.

정만진 위클리포유 자문위원은 내당동과 감삼동 일대 달구벌대로와 당산로 일대를 ‘우재로(路)’로 할 것을 제안했다.


◆항일민족주의자 동암 서상일

항일지사이자 근대정치인인 동암 서상일은 대구 태생이다. 1909년 그는 백산 안희제, 일송 김동삼 등과 함께 대동청년단을 조직해 독립운동을 했다. 17년 만주에서 항일운동에 참여하던 그는 19년 귀국해 3·1운동에 참여했다는 죄목으로 투옥됐다. 감옥에서 나온 그는 대구로 와 조양회관을 건립하고 교남학교 설립에도 참여했다. 조양회관(현 망우당공원 내)은 처음 달성공원 앞에 위치했다. 2층 붉은 벽돌 건물로 지은 이 건물은 청소년에게 독립정신을 고취할 목적으로 건립한 회관이다. 1984년 대구시 효목동으로 옮겼다.

정만진 위클리포유 자문위원은 달성공원 정문 입구 달성공원로 8길~달성공원네거리 구간을 ‘동암로(路)’ 또는 ‘서상일로(路)’로 명명하자고 제안했다.



◆동학창도주 수운 최제우길 또는 광장

수운 최제우는 1864년 좌도난정이란 죄목으로 경주에서 관군에게 압송돼 경상감영 옥사에 갇혀있다가 대구중부경찰서~종로~약전골목을 거쳐 대구 남문 밖에서 사형을 당했다. 권상구 위클리포유 자문위원은 약전골목인 남성로~달구벌대로 길을 ‘수운로(路)’로 하든지 현대백화점 앞 광장을 ‘수운광장’으로 하자고 제안했다. 박진관기자 pajika@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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