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사의 집은 이곳에 있었다?

  • 박진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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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5-04-17   |  발행일 2015-04-17 제33면   |  수정 2015-04-17
경북대 박현수 교수 ‘대구부 남산정 662-35’ 구체적 주소 밝혀 “일대를 육사路로 지정하자”
대구 GEO 전문가와 함께하는 인문·자연지리 보고서
■ 위클리포유의 제안…대구 근·현대 ‘인물의 길’ 늘리자
20150417
대구시 중구 남산동 662-35 한옥. 이육사 연구자인 박현수 경북대 국문학과 교수(사진 속 인물)는 1929년 12월29일자 매일신보에 나온 이육사의 집 주소를 공개했다. 정면에 보이는 기와집이 육사가 살았던 집의 주소와 동일한 주소를 사용하는 현재의 집이다. 그러나 이집을 육사의 생거지로 단정하기는 여전히 어렵다. 그동안 이육사가 살던 대구지역의 주소는 대구부(府) 남산정(町) 662로만 알려져 있었다.


대구는 근·현대사의 훌륭한 인물을 많이 배출했다. 동암 서상일, 우재 이시영, 이상정 장군, 시인 이상화·백기만·이장희, 소설가 현진건, 화가 이인성, 김수환 추기경, 청년 전태일 등이 대구에서 태어났다. 대구에서 출생하진 않았으나 대구에서 의미 있는 족적을 남기거나 활동한 인물도 적지 않다. 시인이자 지사인 이육사, 동학 창도주 수운 최제우, 장진홍 의사, 박상진 열사 등이 그들이다. 이 가운데 대구에서 인물의 이름과 호를 딴 도로는 상화로(달서구)와 호암로(북구·삼성 창업주 이병철의 호), 김광석길 등이 있을 뿐이다. 국채보상로, 경상감영길, 약령길 같은 도로명도 역사적 의미가 있지만, 건조한 명칭 대신 위인의 이름을 붙이면 그 길은 역사와 생명을 갖는다. 자주 불리면 그만큼 친숙해진다. 생가터나 생거터 같은 지리적 콘텐츠가 있으면 금상첨화다. 이번호 위클리포유는 대구를 무대로 활동하거나 대구에서 큰 뜻을 펼쳤던 근대인물 생거터를 찾아봤다. 위클리포유는 주변 도로나 골목길을 해당 인물의 길로 정하면 어떨까 제안한다.


시인 이육사가 살던 대구지역 생거터의 위치가 확인됐다. 박현수 경북대 국문학과 교수는 지난 10일, 1929년 12월29일자 매일신보에 보도된 ‘대구폭탄사건 예심결정서’를 영남일보 위클리포유에 공개했다. 결정서에 따르면 육사(본명 이원록)는 형인 원기, 동생인 원유 등과 함께 장진홍 의사의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탄투척사건에 연루돼 대구형무소에서 1년7개월간 복역했으나 무혐의로 종결됐다고 나와 있다. 지금까지 이육사 평전이나 연보 등에는 육사가 살던 대구지역의 주소가 대구부(府) 남산정(町) 662로 알려졌으나 매일신보에는 남산정 662의 35로 보도됐다.

지난 10일, 박 교수와 기자는 대구시 중구 남산동 662-35(현 중앙대로67길 19-12)에 위치한 집을 찾았다. 이 집은 1960년대에 지어진 ‘ㄱ자’형의 낡은 기와집으로 건평이 66㎡(20평) 정도 됐다. 662번지는 현재 662-1~48로 세분화됐다. 1929년 남산정 662의 35 주소가 2015년 중구 남산동 662-35와 일치하는지 확인하기 위해 중구청 지적계가 보관하고 있는 일제강점기 지적도를 찾았다. 중구청이 보여준 1941년 지적도에는 662번지가 하나의 주소로 돼 있었다. 남산동 지적도는 1961년, 662-1~17로 세분화되었다가 1963년에 지금의 662-17~48로 나뉘었다. 이육사가 살던 집은 이 가운데 하나다. 그러나 그 옛날 662의 35가 지금의 662-35라고는 단정할 수 없다. 다만 밀집된 집 사이로 옛 골목은 그대로 남아 있다.

권상구 위클리포유 자문위원(시간과 공간 이사)은 1950년대 미군이 촬영한 중구 남산동 일대 항공사진을 내보였다. 권 위원은 “당시 초가집이 빽빽하게 들어선 것으로 봐 일제강점기인 1929년에도 50년대와 비슷한 형편이었을 것”이라고 추정했다. 권 위원은 또 “1929년에도 나름대로 ‘662번지 안에 있는 35번째 집’이라는 식으로 번지를 매겼을 가능성이 높다”고 했다. 하지만 박 교수는 “1941년 지적도에 662번지가 뭉뚱그려 나타나기 때문에 지금의 662-35가 1929년 남산정 662의 35로 단정짓기엔 무리가 따른다”면서 “육사의 생거터를 정확히 알려면 육사 가족의 호적이나 세무관계 서류를 떼어 보든지 남산동에 오래 살던 사람의 증언이 필요하다”고 했다. 하지만 박 교수는 “남산정 662의 35와 남산동 662-35의 주소가 일치한다는 상징성은 있다”면서 “이곳에 이육사 문학관을 건립하거나 662번지 남쪽 도로(중앙대로 67길)와 반월당으로 향하는 달구벌대로 418길 1-52를 이육사로(路)로 지정하자”고 제안했다.

그러나 이곳 부동산업체에 따르면 662번지 일대 40~50%의 지주는 재개발사업에 동의한 상태이고 재개발 기대심리에 따라 매물이 나온 주택은 없었다. 이곳은 인근 삼정그린코아아파트나 SK허브스카이 주상복합빌딩(옛 교남학교 터)처럼 고층아파트단지가 들어설 가능성이 높다.

박 교수는 “육사가 저항시인으로서의 이미지를 확고하게 굳힌 곳이 대구이고, 그가 살던 동네가 있음에도 이곳을 밀어 재개발을 한다면 민족시인의 족적을 지우는 것”이라고 했다.

이육사(1904~1944)는 안동에서 태어나 16세가 되던 1920년에 부모, 형제 등 가족과 함께 대구로 이사를 왔다. 그는 대구부(府) 남산정(町) 662의 35에 주소를 두고 37년 서울의 명륜동으로 거처를 옮길 때까지 거주했다. 대구에 적을 두고 중국과 일본에서의 유학시절을 포함하면 생애 절반 가까이를 대구에서 살았던 셈이다.

육사가 한국현대문학대사전 등에 대륜학교의 전신인 교남학교에서 수학했다고 나와 있지만 확실한 증거는 없는 상태다. 대륜 80년사(2011)에 1921년 대구의 교남학교가 설립된 이듬해 육사가 교남학교에 수학한 것으로 나오지만 육사 연구자들은 고개를 젓는다. 다만 동생 원조가 25년에 입학해 26년 5회로 졸업한 학적부가 있을 뿐이다.

김희곤 안동대 사학과 교수는 “육사의 동생 원조가 교남학교에서 수학한 적은 있으나 육사는 교남학교에서 수학했다는 기록이 없으며 다닐 틈도 없었다”고 했다.

육사는 대구에 온 이듬해(1921) 안일양과 결혼한다. 그는 처가 인근(현 영천시 화남면 안천리) 사립학교인 백학학원(현 산동중학교 전신)에서 수학한 뒤 교사로 9개월간 근무한다. 1924년 일본으로 유학한 육사는 25년 귀국 후 대구조양회관을 중심으로 활동하다 8월 중국으로 건너가 베이징 중국대학 상과에 재학하다 중퇴했다. 27년 대구에 온 그는 장진홍 의사의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탄투척사건에 연루돼 대구형무소에 구속됐다 29년 5월 증거불충분으로 출소한다. 이때 수인번호 264번이 그의 또 다른 호가 된다.

육사는 30년 1월 ‘대구청년동맹사건’으로 구속됐다 열흘 만에 석방된다. 29년 2월18일 그는 중외일보 대구지국 기자로 입사한다. 하지만 3·1절을 앞두고 다시 대구경찰서에 검속됐다 석방된다. 그해 10월 ‘별건곤’이란 잡지에 이활(대구 二六四)이란 이름으로 ‘대구사회단체개관’이란 글을 싣는다. 육사는 31년 1월21일, 레닌의 탄생일을 기해 대구지역에 뿌려진 격문사건으로 다시 구속돼 3월23일 불기소처분으로 방면된다.

육사가 대구의 주소지를 떠나 서울 명륜동(혹은 수송정)으로 간 건 1937년이다. 이후 44년 베이징 일본총영사관 감옥에서 순국할 때까지 서울에서 살았다. 육사는 40살 생애 가운데 유·소년기를 제외하고 청년기 시절 중국과 일본을 오가며 대부분을 대구에서 보냈다. 생애 처음 옥살이를 했던 대구형무소를 비롯해 감옥과 구치소를 오간 것도 대구에서만도 네 번이다. 이육사의 문학관과 생가터가 안동에 있지만 독립운동가로, 저항시인으로 치열한 삶을 살았던 그의 생애 절반 ‘대구에서의 삶’을 간과해선 안 되는 이유다. 글·사진=박진관기자 pajika@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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