② “우리시대의 것과 향가 정서의 결합…그 속에서 영원성을 찾고 싶다”

  • 이춘호
  • |
  • 입력 2015-08-28   |  발행일 2015-08-28 제34면   |  수정 2015-08-28
■ ‘신라’에 사로잡힌 시인 이성복을 경주에서 만나다
20150828
좀처럼 바깥 나들이를 하지 않는 이 시인이 지난 20일 경주시청에서 문학특강을 하면서 제7시집 래여애반다라를 중심으로 ‘신라정신론’에 대해 피력하고 있다.

2006년 여름 경주에서
신라불상전 관람
‘래여애반다라’에 전율
7번째 시집 제목 사용
서정주와 다른 식으로
향가에 접근

그에게서 느껴지는 것은
카프카와 보들레르…

그가 좋아하는 시인은
김소월·이상·백석
그리고 윤동주·김수영…

어느 날 생각도 못한 ‘신라정신(향가)’에 빙의된다. 2006년 여름이었다. 경주 동국대박물관의 신라 불상전을 보러갔다. 그 전시회의 표제인 ‘래여애반다라(來如哀反多羅)’에 감전된다. 래여애반다라는 ‘오다, 서럽더라’란 의미로 신라 향가 25수 중 하나인 ‘풍요(風謠·일명 공덕가)’의 한 구절. 그는 포스터에 적힌 래여애반다라 부분만 오려내 코팅했다. 그걸 부적처럼 책상 앞에 붙여놓고 매일 친견했다.

2013년 이 표제가 그의 7시집 제목으로 정해진다.

시집 첫 시와 마지막 시까지 ‘죽지랑을 기리는 노래’와 ‘기파랑을 기리는 노래’로 세팅한다. 향가인 모죽지랑가·찬기파랑가를 염두에 둔 것이다. 그는 시집 제목의 자구를 분리해석한다. ‘래(이곳에 와서)·여(같아지려 하다가)·애(슬픔을 맛보고)·반(맞서고 대들다가)·다(많은 일을 겪고)·라(비단처럼 펼쳐지다)’를 ‘시인의 말’에 포함시켰다. 래여애반다라는 ‘생로병사(生老病死)’를 닮았다.

그때까지 그가 알고 있는 향가에 대한 상식은 888년(진성여왕 2) 각간(角干) 위홍(魏弘)과 대구화상(大矩和尙)이 왕명을 받아 편찬한 향가집 제목이 ‘삼대목(三代目)’이란 사실, 신라 가요의 백미랄 수 있는 향가 25수 전체에 대한 최초의 해독은 일본 학자 오구라 신페이(小倉進平)의 ‘향가 및 이두의 연구’(1929)지만 양주동 박사의 ‘조선고가연구’(1942)는 오구라의 경지를 넘어 향가 해독을 본궤도에 올려놓았다는 정도였다.

그는 이날 강연을 통해 신라 정신을 한 시인이 제대로 품기에 얼마나 난감하면서도 외경스러운 대상인가 그 소회를 밝혔다.

“매년 경주 인구만큼의 사람들이 죽고 태어나요. 한 20만명이 될까요. 홍상수 감독의 ‘경주’란 영화를 보면 주인공이 부산을 가려다가 경주로 가죠. 왜 그럴까요. 경주는 신라 정신을 알게해 주는 블랙홀인데 남은 유산이 거의 없어요. 7세기 후반에서 8세기 후반에 걸쳐서 만들어진 일본에 현존하는 고대 일본의 가집(歌集)인 ‘만요슈(万葉集)’, 일본 헤이안시대에 쓰인 일본 최고의 고전소설이자 세계 최초의 장편소설로 평가받는 ‘겐지이야기’, 일본 고대 후기의 수필로 세이 쇼나곤(淸少納言)의 작품인 ‘마쿠라노소시(枕草子)’ 등 고대 시가에 대한 풍부한 문헌을 갖고 있는 일본과 달리 우리는 불국사, 첨성대, 포석정, 경주 남산 등과 같은 유형자산은 갖고 있지만 인문학적 콘텐츠는 너무나 부족합니다. 경주의 모량, 아화, 중악(팔공산), 원효와 일연의 탄생지인 경산 자인 등과 같은 지명을 통해 겨우 신라를 상상해볼 따름입니다.”

그래도 향가를 통해 신라인과 호흡할 수 있어 다행인지도 모른다. 그는 향가와 21세기 현대시가 충분히 눈높이 대화를 시를 통해 할 수 있다고 믿는다. 그게 ‘시인의 사명’이라고 여긴다.

“신라 사람들 다 사라져도 포석정 물길은 남아 있지요. 쳐다보던 사람들 다 지나가도 하늘의 애드벌룬은 그대로 떠있지요. 그처럼 우리가 없어져도 ‘시’는 남을 거예요. 뇌수가 빠져나간 해골처럼.”

그러면서 그가 향가스러운 ‘정선’이란 시 한 편을 낭독해준다.

‘내 혼은 사북에서 졸고/ 몸은 황지에서 놀고 있으니/ 동면 서면 흩어진 들까마귀들아/ 숨겨둔 외발가마에 내 혼 태워 오너라//내 혼은 사북에서 잠자고/ 몸은 황지에서 물장구 치고 있으니/ 아우라지 강물의 피리 새끼들아/깻묵 같이 흩어진 내 몸 건져 오너라’

이 시는 향가와 무관한 것 같은데 잘 음미해보면 그가 제일 품고 싶어하는 4수의 향가(찬기파랑가·모죽지랑가·제망매가·원왕생가)가 오버랩된 것 같다. 저승으로 간 자를 극진하게 예찬(禮讚)·추모(追慕)하고 제사(祭祀)를 지내고 극락왕생을 소원(所願)하는 맘이 혼융돼 있다.

갑자기 미당 서정주 얘기를 던진다.

“개인적으로 그분을 좋아하지는 않지만 그가 개척한 시의 경지를 보면 500년이 아니라 1천년이 있어도 그런 사람이 다시 태어나기는 힘들 겁니다. 그는 독보적이죠. 향가를 멋지게 스토리텔링했어요.”

하지만 그는 향가를 미당식으로 편곡하고 싶지는 않다.

“제가 향가를 재현했다기보다는 제 쪽으로 향가를 끌고 와서 이용했다고 해야 할 겁니다. 향가는 복원할 수도 없고 또 복원할 필요도 없는 겁니다. 모든 것은 망해요. 문화 또한 망합니다. 문화는 망한다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 문화입니다. 보들레르가 ‘현대생활의 화가’에서 말한 대로 당대적인 것 안에서 영원한 것을 찾아내는 것, 말을 바꾸면 우리 시대 안에 있는 것을 향가의 정서와 결합시켜보려고 해요. 당대적인 것 안에서 영원한 것을 찾아내려고 하는데 그건 불가능의 꿈이죠. 그래서 도전할 만한 가치가 있어요.”

◆ 몽영(夢泳)과 환영(幻影)의 시적 연대기

그가 7권 시집의 키워드를 알려준다.

‘뒹구는 돌은 언제 잠 깨는가’는 ‘고통’, ‘남해 금산’(86년)에서는 ‘치욕’, ‘그 여름의 끝’(90년)은 ‘사랑’, ‘호랑가시나무의 기억’(93년)은 ‘일상’, ‘아, 입이 없는 것들’(2003년)은 ‘불가능’, ‘래여애반다라’는 ‘생사(生死)’였다.

오는 9월9일 이성복 시론집이 3권으로 문학과 지성사에서 출간된다. 꼭 1년 전 열화당을 통해 지난 세월 온갖 매체를 통해 발표된 산문과 대담록, 초창기 미수록 시 등을 출간한 바 있다.

첫 시집은 카프카·니체·보들레르적이었다. 1984년 프랑스 유학을 다녀온 뒤 김소월·한용운의 연애시에 충격을 받는다. 그걸 토대로 3시집을 펴낸다. 그리고 주역·논어 등 동양철학에 빠져든다. 3시집 이후 세상과 인생을 역학적 관점에서 살펴본다. 그는 시를 인생에 대한 사상적 탐구의 도구가 되어서는 안된다고 믿는다. 모호함과 수사를 버리기 시작한다. 메타포에서 일상으로 건너간다. 다시 프랑스로 두 번째 유학을 간다. 거기서 서양과 동양 사상을 동시에 품는다. 이 결과가 4시집으로 잉태된다. 그리고 다시 동양에서 차츰 멀어지며 니체와 프로이트로 기운다. 시가 되지 않았다. 10년간 운동하다가 5번째 시집을 내고 지난해 신라에 도전장을 낸 7번째 시집을 낸다. 그 어름에 천체물리학, 사회생물학, 수학 등으로 공부의 각을 더 넓혔다.

◆ 내가 좋아하는 시인

그는 어떤 시인을 좋아할까.

무당과 같은 민족적 차원의 한을 품은 ‘김소월’, 치열한 자기반성과 속지 않으려는 정신과 맺어진 요사스러운 재능의 ‘이상’, 청정한 슬픔 속으로 여행과 개인·민족의 비극적 만남의 주인공인 ‘백석’, 폭풍 속의 고요한 불꽃과도 같은 영혼의 떨림이 있는 ‘윤동주’, 영원한 젊음과 당대적 현실의 최초의 발견자인 ‘김수영’을 꼽는다.

그를 원심분리기에 넣고 돌리면 세 가지 앙금이 남을 것 같다.

그의 산문과 눈빛에서는 독일의 소설가 ‘카프카’, 시에서는 프랑스 시인 ‘보들레르’, 그의 옆모습에서는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의 콧날 정도.

그는 대학 때 ‘카프카와의 대화’란 책 때문에 카프카를 교주로 영접한다. 공자가 가죽끈이 3번 끊어지도록(위편삼절) 주역(周易)을 탐독했듯이 그 대화록을 무려 100번 이상 읽고 또 읽었다. 카프카를 닮기 위해 그의 일거수 일투족을 복습했다. 어느 날 그의 눈빛이 카프카의 눈빛과 비슷하게 포개진다.

그는 이기적 광기를 제압하기 위해 인문학적 성찰을 장착했다. 권총 자살로 삶을 마감한 프랑스의 천재 요절 시인 랭보가 될 수도 있었지만 그를 외면했다. 대신 20세기 문명의 암담함을 가장 모던하게 보여준 서사시 ‘악의 꽃’의 시인 보들레르의 기운을 입양했다.

어떤 사물이 시로 착상되는 순간 이성복은 사라진다. 순간 그도 무중력에서 중력권으로 진입하는 우주선처럼 벌겋게 달아오른다. 밀물처럼 바람처럼 시도 때도 없이 진군해오는 시의 도미노. 1976~80년 유성우(流星雨)처럼 쏟아져 내리는 시를 받아내기 위해 365일 24시간 메모지를 붙들고 ‘비상대기’했다. 사물을 몸속으로 끌고 들어와 ‘메타포’(비유 혹은 은유)란 효모를 주입하며 ‘시적 정사’를 벌였다. 시를 위한 ‘발효 과정’이었다. 40여년째 이승 속 저승 같은 나날이다. 너무나 ‘황홀한 고통’이었다. 의무감도 사명감도 아니다. ‘운명’이었다.

글·사진=이춘호기자 leekh@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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