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가 이룬 白夜…이곳서 난 잠들지 못하겠네

  • 이춘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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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6-02-19   |  발행일 2016-02-19 제33면   |  수정 2016-02-19
■2월의 자작나무를 讚하다
20160219
1974년부터 21년간 주민과 군부대, 산림청이 의기투합해 ‘경제목’으로 군데군데 집중조성한 강원도 인제군 인제읍 원대리 ‘속삭이는 자작나무숲’. 2월의 잔설과 산책로를 걸어가는 탐방객의 기운이 아련한 울림을 피워낸다.

2월과 자작나무.
궁합이 별로인 것 같니? 그렇게 생각하지 마.
봄도 아니고 겨울도 아닌,
뭐랄까, 계절의 서자 같은 2월.
이 어정쩡한 계절을 위해 자작나무가 존재하는 거라고 생각해 봐.
서성거리는 2월이겠지.
남녘 수선화는 만개하고 설중매가 실눈 뜨지만
강원도 오지의 응달은 아직 설한풍 이는 한겨울.
가는 겨울과 오는 봄 사이에 퓨즈처럼 걸려 있는 자작나무.
난 가끔 계절의 사치품 같다는 생각이 들어.


나무로 환생한 북극의 ‘백야(白夜)’인가.
이렇게 고혹하고 성스러운 수직(垂直)의 미학이 또 있을까?
산하의 푸른 기운을 삼켜버린 저 겨울을 배경으로
도도하게 직립한 한 그루 하얀 경전 앞.
인간들은 과거로도 미래로도 가지 못하고
그냥 황홀한 현재를 아득하고 아련하게 비상(飛翔)만 할 따름이지.
나는 겨울과 봄 사이에서 가장 빛나지.
다른 나무들이야 봄·가을에 더 고혹하다지만
나는 이 무렵 몸이 곧 ‘꽃’이지.
나는 흰색이 아니라 ‘은백(銀白)’.


내 몸에는 귀뚜라미 울음소리가 조금 묻어 있지.
수은의 기운이 감돌고 우물의 고요함까지 출렁거려.
신화와 설화를 거느리고 별나라로 잠행하고 있어.
다른 나무는 소곤소곤 대화를 나누는데 나는 ‘자작자작’ 담소를 나누지.
수직으로 솟아도 난 ‘수평본능’이야.
그대 굳어버린 근육을 말랑한 맘으로 숙성시켜주지.
야심조차 ‘성찰(省察)’이거나 ‘관조(觀照)’로 변속시켜주지.
더 이상 내 앞에서는 반성도 속죄도 필요 없어.
남쪽이 아니라 북쪽으로 향하는 난 한 그루의 ‘오로라’!
내 품속에 안기면 물욕도 맥을 못 추지.


과거에 대한 ‘회한’도 미래에 대한 ‘포부’도 내 앞에서는 모두 무용지물.
그대여, 이제 두 눈 감고 내 맘속에 좌정해 봐.
은하수 속에서 와선(臥禪)하는 듯
굳이 뭐가 될 것도 없고 뭘 바랄 것도 없고….
그냥 생겨먹은 그대로의 그대에게 감사하리라.
나는 시작이면서도 종점
2월 자작나무 옆에 서면
그대 절망도 곧 희망으로 발화(發花)할 거야.
꼭 그렇게 될 거야. ☞ W2면에 계속
글·사진=이춘호기자 leekh@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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