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릿한 물길 따라간 멋과 맛

  • 이춘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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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8-06-29   |  발행일 2018-06-29 제33면   |  수정 2018-06-29
[이춘호기자의 푸드로드] 영주
육지속의 섬 무섬마을 휘감은 내성천
외나무다리 건너가면 두 가문 집성촌
예천 회룡포 못지않은 관광지 급부상
선비의 고장 시작된 ‘순흥’이야기 발길
20180629
1980년대 초 수도교가 생기기 전 마을주민들은 매년 장마 때 유실된 섶다리를 다시 깔아야만 하는 수고로움을 마다하지 않았다. 95년 중앙고속도로 개통으로 이 마을은 안동 하회마을, 예천 회룡포마을 못지않은 전국적 관광지로 급부상한다. 폭 30㎝ 통나무 70여개가 깔린 S자 통나무외나무다리의 굽이를 직각으로 통과하는 내성천의 한없이 느릿한 물길이 무섬마을의 인심을 닮은 것 같다.

영주시 문수면 수도리 무섬마을에 도착했다. 오뉴월의 고요가 육중했지만 한 줄기 강 때문에 호젓함을 느끼게 해준다. 한적함의 등급이 다른 곳과 달랐다. 모래톱을 스친 바람결은 연신 뭔가를 얘기하려고 속살거린다. 1980년대 초부터 바깥 마을과 연결해주던 수도교. 이게 없었다면 무섬마을은 고립무원. 그래서 육지 속 섬이다. 수도교가 없을 때는 섶다리로 견뎠다. 하지만 장마 때마다 휩쓸려 떠내려가버렸다. 다시 다리를 놓았다. 95년 대구와 춘천을 하나로 연결해준 중앙고속도로가 개통되면서 무섬마을은 전국적 관광지로 부상하게 된다. 주민은 40여명, 집은 50여채. 민박은 스무 곳. 안동 하회마을과 예천 회룡포와 달리 무섬마을을 휘감은 내성천은 서쪽에서 동쪽으로 흐른다. 이곳을 길지로 여긴 풍수지리 관계자가 많이 찾아왔다. 볼거리를 위해 무섬마을보존회가 폭 30㎝ 통나무 72개를 연결해 150m짜리 외나무다리를 복원했다. 철제로 된 회룡포마을의 ‘뿅뿅다리’하고는 느낌의 질감이 다르다.

무섬마을이 생긴 것은 1666년. 마을에서 가장 오래된 고택은 만죽재. 반남박씨 16세손 박수가 난을 피해 안동에서 영주로 옮겨와 만죽재를 짓고 터를 잡았다. 이후 예안김씨가 박씨문중과 혼인하면서 이곳에 뿌리를 내렸다. 그래서 무섬은 이 두 가문의 집성촌이다.

영양에서 태어난 청록파의 거두 조지훈 시인. 그의 시심의 출처도 여기다. 지금도 서울에서 구순의 서예가로 활동 중인 그의 아내 김난희. 그를 만나 부부지연을 맺은 데도 바로 무섬이다. 정원이 아기자기한 김뢰진가옥이 바로 조지훈의 처가다. 그는 부인을 두고 서울로 공부하러 떠나는 애틋한 마음을 ‘별리(別離)’란 시로 노래했다.

“푸른 기와 이끼 낀 지붕 너머로/ 나즉히 흰구름은 피었다 지고/ 두리기둥 난간에만 숨은 색시의/ 초록 저고리 당홍치마 자락에/ 말 없는 슬픔이 쌓여 오느니//…// 이제 임이 가시고 가을이 오면/ 원앙침(鴛鴦枕) 비인 자리를 무엇으로 가리울꼬…”

낮 12시 어름. 평일이라서 그런지 관광객은 거의 없다. 방천 언저리 나무 그늘 아래 놓인 통나무 벤치. 아지랑이 속 가물거리는 외나무다리에 앉아 박목월 시인의 시 ‘나그네’를 베껴본다.

상류에 가설된 영주댐 때문에 수량이 너무 초라하다. 바닥을 드러낸 내성천. 얇은 유지수를 붙들고 할딱거리며 예천 삼강주막 쪽으로 내려간다.

8년전 이 마을에 무섬마을 대표 비빔밥이 탄생한다. 영주농업기술센터가 개발한 ‘무섬골동반’이다. 그 전문점이 이 마을에서 피어난다. 외지인이 5년간 끌고 가다 그만 놓아버렸다. 지금 그 골동반은 없다. 3년전 누가 바통을 이어받았다. 이 마을 주민 김한건씨다. 그가 ‘무섬식당’을 열었다. 이 집 소백산막걸리 곁에는 배추전이 잘 어울린다. 전국에서 가장 큰 메주콩인 ‘부석태’로 직접 청국장을 띄운다. 청국장에 잘 어울리게 무채, 묵나물, 고사리, 콩나물 등으로 비빔밥을 만든다. 나는 그 비빔밥을 ‘무섬밥’이라고 명명해주고 싶다.

2015년 광복절 즈음 이 마을에서 별스러운 페스티벌이 하나 영근다. 블루스기타리스트 김목경이 앞장서 무섬마을 블루스 페스티벌을 론칭시킨 것이다. 그게 해를 이어가고 있다.

나무 그늘이 푸짐한 노천카페에서 객수감(客愁感)을 시럽처럼 넣고 아메리카노 한 잔을 사먹는다. 남자 이름 같은 여주인 박영준씨는 종일 그늘과 놀며 소일한다.

나는 무섬을 빠져나와 소백산 쪽으로 더 바짝 다가선다. 영주 이전에 풍기, 풍기 이전에 ‘순흥(順興)’이라 했다. 영주로 푸드투어를 떠났을 때 뇌리는 영주 이야기보다 순흥에 더 꽂혀있었다. 영주가 선비의 고장이 될 수 있었던 것도 따지고 보면 순흥 때문이다. 순흥은 역사상 두 번이나 고을이 지도에서 사라진 저항과 항거의 고장이었다. 대의명분과 멸사봉공의 화신이었다. 한번은 ‘단종복위운동’으로, 또 한번은 국권회복을 위한 ‘소백산의병’으로 표출됐다. 그 둘을 이어준 건 한국 최초의 사립대학이자 서원인 ‘소수서원(紹修書院)’이었다. 소수서원은 한국 주자학의 요람이었고 순흥안씨를 영광의 자리로 올려준 안향(고려 충렬왕 때의 문신이자 학자). 그의 정신을 소수서원으로 끌고 들어온 두 사람의 불세출의 선비가 있었으니 신재 주세붕과 퇴계 이황이다. 둘은 공교롭게도 연이어 풍기군수로 부임한다.

영주에 가면 섬뜩한 느낌을 안겨주는 ‘피끝마을’이 있다. 영주시 안정면 동촌1리를 지칭한다. 하지만 관광객은 ‘피’의 의미를 제대로 알 리 없다. 금산과 개성을 제치고 단연 세계적 인삼으로 인정받은 ‘풍기인삼’도 그 피의 역사와 무관할 수 없었다. 풍기인삼을 알아야 영주의 3대 삼계탕으로 불리는 풍기 칠향계·영주 약선삼계탕·풍기삼계탕의 숨결을 제대로 진맥할 수 있다. 그 연장선상에 있는 순흥기지떡, 순흥묵집, 그리고 서부냉면, 그걸 휘감은 인견산업, 소백산한우, 영주사과 등의 속내를 제대로 들여다볼 수 있는 것이다. ☞ W2면에 계속

글·사진=이춘호기자 leekh@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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