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응상의 ‘천 개의 도시 천 개의 이야기’] 몽골제국의 수도 카라코룸 ①

  • 권응상 대구대 문화예술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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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4-03-22 08:04  |  수정 2024-03-22 08:05  |  발행일 2024-03-22 제13면
역사 속에 묻힌 '칭기즈칸의 도시' 박물관서 되살아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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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라코룸 박물관

몽골제국은 칭기즈칸이 1206년에 건설했다. 13·14세기 몽골제국은 역사상 가장 넓은 땅을 가진 나라였다. 유럽 정벌은 물론 1271년에는 중국의 남송까지 멸망시키고 중국 전역을 차지했다. 중국 역사상 최초의 이민족 왕조인 원나라이다.

필자는 중국문학, 그중에서도 중국공연예술을 전공했다. 중국의 고전 희곡 가운데 양식적으로 완비된 것은 원나라 잡극으로 본다. '중국문학사'에서 잡극을 다룰 때 1271년을 기점으로 '몽고시대'와 '일통시대'로 나누어 설명한다. 그리고 그 흥성기는 '몽고시대'라고 본다. 잡극 음악 자체가 북방 음악이었고, 몽골 왕실에서도 특히 애호했다.

그뿐만 아니라 원곡 사대가라 불리는 관한경, 백박, 마치원, 왕실보 등이 모두 13세기 중엽에 활동한 극작가이다. 그렇다면 당시 몽골제국의 수도였던 카라코룸에서 잡극이 활발하게 공연되었음도 유추할 수 있다. 그러나 확인할 자료가 없어서 늘 미진한 구석이 남았다. 원나라 시기에는 중국 남방의 한족까지 매료시켰던 잡극 양식이지만 그 기원에 대해서는 속 시원한 설명을 할 수 없었던 것이다. 더구나 잡극은 '대아지당'에 오른 시문과는 대척점에 있었던 속문학이었고, 특히 몽골이라는 이민족 왕조에서 기원한 양식이었으니 굳이 파헤치지도 않았을 법하다.

몽골을 마주하면 늘 이런 아련한 아쉬움이 있었다. 그것이 필자를 카라코룸으로 이끌었던 것은 아닐까 싶다. 그러나 몽골 여행을 준비하다 보니 정작 몽골제국의 옛 수도였던 카라코룸보다 인근의 미니 고비나 오르콘 계곡 투어 자료가 대부분이었고, 카라코룸은 이미 '사라진 도시'로 스쳐 지나는 곳이었다. 그래도 현장을 가보고 싶었다.

세계문화유산 등재 카라코룸 유적지
도기·성곽 등 유적유물 다수 발굴돼
2010년 개관 박물관 복원 모형 전시
기와·게르구역, 모스크 등 당시 재현

13세기 교황 사절단·고려 교류 흔적
몽골제국의 옛 수도 전성기 떠올라


울란바토르에서 350㎞, 자동차로 5시간 걸리는 거리이다. 세 개의 강이 만나는 목초지에 자리한 카라코룸은 몽골어로 '검은 자갈밭'을 뜻하는 'Qara-Qorum'으로, 중국 문헌에는 '客喇和林' 또는 '和林'으로 나온다. 현재 몽골 발음으로는 '하르허린(Хархорин)'에 가깝다. 카라코룸이 위치한 오르콘(Orkhon) 계곡 지역은 전략적, 경제적 중요도가 높은 곳이자 몽골에서 신성한 지역이다. 2004년 유네스코에 의해 '오르콘 계곡 문화 경관'의 일부로 카라코룸 유적지 및 에르덴조 사원 등이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이 지역은 7·8세기 위구르 시기부터 이미 상당한 도시의 터전이 있었다고 전한다. 투르크 제국, 위구르 제국의 유물도 상당히 많이 발견되기 때문이다. 칭기즈칸이 1220년에 수도를 정했고, 실제 건설은 1235년 그의 셋째 아들 오고타이 칸이 시작했다. 이후 쿠빌라이 칸이 1271년 남송을 멸하고 수도를 지금의 베이징으로 옮길 때까지 몽골제국의 수도로 번성했다.

오고타이는 칭기즈칸의 아들 가운데 가장 지적이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중국 장인과 프랑스 기술자를 동원하여 웅장한 성벽 도시 카라코룸을 건설했다. 말하자면 동서양 기술이 합쳐진 세계 제국의 상징 도시로 건설된 셈이다. 또 아버지 때부터 함께 일했던 야율초재를 중용하여 중국식 행정 조직과 중국과 이어지는 역참을 설치하여 통치 기반을 다졌다.

내적 안정을 기한 오고타이 칸은 1240년에 바투를 사령관으로 하는 대규모 서방 원정을 시작하여 키예프, 폴란드 등을 점령하였다. 그가 사망한 1241년에도 리그니츠 근교에서 독일과 폴란드 연합군을 격파했다. 또 헝가리군을 격파한 후 실레지아 왕 헨리 2세를 처형하기도 했다. 이 시기는 몽골이 유목국가 성격을 탈피하고, 정주 농경국가를 지향하며 세계 제국으로 변모하던 시기였다. 이처럼 카라코룸은 몽골제국 전성기를 웅변하는 도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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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라코룸 출토 도기. 중국풍 도기로서 중국과의 교류 유물로 보인다.

그러나 지금은 황량한 벌판만 남아 있을 뿐 카라코룸의 영화는 박물관 속에 갇혀 있었다. 일본 자본으로 지어져 2010년 개관한 카라코룸 박물관은 석기시대, 청동기시대, 고대도시 시대, 몽골제국 시대 등 네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몽골어, 영어와 함께 일본어 설명이 있어서 박물관에서도 자본의 위력을 실감할 수 있었다. 특히 카라코룸 여러 곳에서 발굴된 도기와 오고타이가 건설한 성곽 유적 유물 덕분에 미흡하나마 당시의 영화를 짐작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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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라코룸 복원 모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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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로 복원한 돌거북 비석.

박물관에서 가장 눈길을 끈 것은 도성 유적발굴 가마터였다. 실제 발굴 현장 위에 박물관을 지어 박물관에 유리관으로 발굴 현장을 직접 볼 수 있도록 하였다. 이곳에서 도시 건설에 필요한 각종 기와나 도기, 건설 자재들이 건조된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발굴과 기록을 토대로 도시 모형을 만들어놓았다. 모형을 보면 기와 건물과 게르 구역이 나뉘어 있었고, 모스크를 비롯한 각종 종교시설도 배치되어 있어 당시의 모습을 짐작게 한다. 성안에는 대략 1만3천명에서 1만5천명 정도 거주한 것으로 추정한다.

쿠빌라이 칸 통치기에 몽골을 왕래했던 마르코 폴로는 여행기 '동방견문록'을 통하여 당시 원나라를 유럽에 소개하는 큰 역할을 했다. 하지만 그보다 20~30년 앞서 카라코룸을 방문했던 두 명의 유럽 수도사가 있었다. 각각 구육 칸과 뭉케 칸 통치기에 카라코룸을 방문한 프란체스코파의 수도사 카르피니(Carpini)와 루브룩(Rubruck)이다. 두 수도사는 '몽골의 역사'와 '몽골기행'이라는 귀중한 여행기를 남김으로써 당시 도성의 모습과 상황을 보다 구체적으로 상상할 수 있게 한다. 유럽 사람들도 이 기록을 통해 유럽을 공포에 떨게 했던 정복자 몽골제국의 정보를 접했다.

카르피니는 1245년 교황 이노센트 4세가 파견한 수도사였다. 카르피니는 서양 가톨릭 수도사로는 최초로 카라코룸을 방문하여 4개월간 체류하고 1247년 리옹으로 귀환했다. 그리고 교황에게 몽골제국 답사 보고서를 제출하였으니, 그것이 '몽골의 역사'이다. 이 책에는 초원에 세워진 화려하게 정비되고 건설된 계획도시 카라코룸의 풍경에 큰 감명을 받았다고 기록하였다. 그는 교황의 서신을 구육 칸에게 전달하는 임무를 맡았는데, 카라코룸 박물관에는 교황의 서신과 구육이 쓴 답신이 전시되어 있다.

박물관 모형에서 보듯이 카라코룸은 4개의 성문이 있는 성벽 도시였다. 성문마다 시장이 있어서 동쪽에는 곡식, 서쪽에는 염소, 남쪽에는 황소와 사륜마차, 북쪽에서는 말을 팔았다. 성벽의 안팎에는 몽골인은 물론 중국인, 페르시아인, 위구르인 등 다양한 민족이 함께 거주했으며, 다양한 종교가 공존했다. 기록에 따르면 이 도시에는 무슬림 거주 구역과 중국인 거주 구역이 별도로 설정돼 있었고, 불교 사원 12개, 모스크 2개, 네스토리우스 기독교 교회 1개가 있었다고 한다.

두 수도사의 기록 가운데 우리의 눈길을 끄는 것은 '솔랑기', 즉 '고려(高麗)'를 언급하고 고려인을 묘사한 대목이다. 고려에 관한 기록은 '몽골의 역사'에 여섯 번, '몽골기행'에 두 번 등장하는데, 그 정보가 제법 자세한 것으로 보아 당시 고려인의 왕래도 꽤 활발했던 것으로 보인다.

카라코룸에서는 이처럼 다양하고 상이한 민족과 종교가 서로 공존하며 번영을 이루었고, 이는 몽골제국이 지향했던 다원주의를 잘 상징해 준다. 당시 카라코룸은 제국의 번성과 함께 아시아 전역은 물론 유럽의 상인, 고위 관리, 기술자들이 모여 사는 활기찬 도시였다. 카라코룸은 행정, 교역, 문화 중심지였을 뿐만 아니라 유럽과 아시아를 연결하는 접점이었다.

중국 문헌에는 대칸이 살았던 카라코룸의 궁전을 '만안궁(萬安宮)'이라 기록하고 있다. 루브룩은 '몽골여행'을 통해 그 모습을 생생하게 전해주고 있다. 궁전의 입구에는 은으로 만든 거대한 나무가 서 있었는데, 그 밑둥치에는 은제 사자 네 마리가 조각돼 있었고, 그 입에서는 말젖이 흘러나왔다고 한다. 또한 이 나무의 몸통 속에는 긴 대롱이 꼭대기까지 이어져 거기에서 다시 늘어진 나뭇가지를 통해 포도주, 마유주, 봉밀주, 미주 등 네 가지의 서로 다른 음료수가 흘러나왔다고 한다. 이 장식품을 제작한 사람은 프랑스 파리 출신의 기술자였다. 이것은 울란바토르 자이승 기념관 근처 공원에서 보았던 은제나무 분수를 묘사한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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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응상 대구대 문화예술학부 교수

이처럼 동서양 기술을 접목하여 건설한 몽골제국의 수도는 지금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당시의 도성을 유추할 수 있는 유일한 유물은 에르덴조 사원 북서쪽 300m쯤에 귀부만 남은 '돌거북'이다. 유일할 뿐 아니라 가장 중요한 유물이다. 거북등의 비석이 카라코룸의 여러 역사를 증명해주기 때문이다. 예전에는 네 개의 돌거북 비석이 카라코룸의 경계석으로 사방에 있었다. 1220년 칭기즈칸이 이곳을 수도로 정하라고 한 명령도 이 비석에 남은 글이다. 그뿐만 아니라 98m 높이의 5층 탑 '흥원각'에 대한 기록도 있다. 지금은 황량한 벌판 가운데 기단부만 남아 무상함을 느끼게 하지만 기단부에 늘어선 수십 개의 기둥 자리는 당시의 웅장한 모습을 짐작하게 한다. (계속)

대구대 문화예술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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