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 추 거문고 이야기] <6> 선비와 거문고(하) 세상 사람 어진 이 몰라보니…오갈 데 없는 신세로다

  • 조현희
  • |
  • 입력 2024-03-29 07:54  |  수정 2024-03-29 07:56  |  발행일 2024-03-29 제14면
거문고와 관련 공자의 일화 '의란조'
자신의 처지 홀로 핀 난초 빗대 연주
제자들에 소리 통한 마음수양 가르쳐
성군의 대명사 中순임금 오현금 즐겨
'남풍가'로 백성들 고단함 어루만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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겸재 정선의 작품 '행단고슬'. 공자가 행단에서 거문고를 연주했다는 고사를 소재로 한 그림인데, 여기서는 공자의 제자가 거문고를 연주하는 것으로 표현했다. <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 소장>

한국의 거문고와 중국의 금(琴)은 한국과 중국 선비들의 각별한 사랑을 받은 악기다. '선비의 악기' '군자의 악기'로, 도를 이루어 가는데 필요한 수행 반려 악기로 대접받게 된 연유를 더듬어 가보면 공자는 물론 순임금에까지 이르게 된다. 선비들이 존경해 마지않는 중국 요순시대의 순임금과 춘추전국시대의 공자와 관련된 거문고(琴) 이야기를 살펴본다.

◆순임금의 남풍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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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임금의 효행과 오현금 이야기를 담은 민화 '효(孝) 문자도'. <국립민속박물관 소장>

순(舜)임금은 요(堯)임금의 발탁으로 임금의 자리에 올라 선정을 펼쳤고, 중국의 전설적인 성군(聖君)이 되었다. 사마천의 '사기'에 '요임금의 인자함이 하늘과 같았고 지혜는 신과 같았다'라고 기록된 요임금과 더불어 순임금은 중국 역사 속에서 가장 이상적인 정치를 한 성군의 대명사가 되었다.

요임금이 그에게 황제의 자리를 물려주기로 결정한 가장 큰 이유는 그의 남다른 효제(孝悌) 정신이었다. 요임금은 그에게 두 딸을 아내로 주어 인성을 관찰하도록 했다. 순의 혼인 후에도 그 아버지와 의붓동생은 순을 죽이려는 음모를 멈추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순은 부모와 동생을 원망하는 대신 그들의 죄를 자기가 짊어지기를 원했고, 무슨 일이든지 항상 자기 탓이라고 여겼다. 그런 순의 정성에 아버지와 동생이 결국 감동했다. 이후 요임금은 그를 등용해 능력을 다시 확인한 후 쉰 살에 임금의 일을 대행하게 했다.

순의 효제 정신은 '효(孝)' 문자도에도 자주 등장할 정도로 널리 알려졌다. 순임금의 효는 단순히 효라고 하지 않고 큰 효라는 의미의 '대효(大孝)'로 불리었다. 효는 유가(儒家)에서 강조하는 최고의 실천 덕목이다. 맹자는 효를 '온갖 행실의 근본'이라 여겼고, '요·순의 도리는 효제(孝悌)일 따름'이라고 강조했다.

순임금은 또한 오현금을 잘 탔으며, 평소에도 즐겼다. 그는 거문고 곡 '남풍가'를 지어 직접 연주하기도 했다. 남풍가 내용은 이렇다. '훈훈한 남풍이 불어오니, 우리 백성들의 시름을 풀어줄 만하네/ 남풍이 때맞춰 불 때 우리 백성들의 재물도 넘쳐나겠구나'

순임금의 이 일화는 그림으로도 종종 그려졌다. 그가 황제의 처소인 남훈전에서 오현금(五絃琴)을 타면서 노래로 백성의 고단함을 달랜 내용을 그린 '남훈전탄금(南薰殿彈琴)'이 우리나라에 전한다. 순임금은 작곡도 잘했는데, 그가 지은 곡인 '소소(簫韶)'를 공자가 듣고 석 달 동안 고기 맛을 잊어버릴 정도였다고 한다.

순임금은 우(禹)임금에게 제위를 넘겨주며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인심은 위태롭고 도의 마음은 은미하니, 오직 정밀하게 살피고 한결같이 지켜 진실로 그 중심을 잡아야 한다(人心惟危 道心惟微 惟精惟一 允執厥中).' 순임금이 우임금에게 전한 이 말은 '십육자심전(十六字心傳)'이라 부르는데, 유가(儒家)에서 금과옥조로 삼는 문구다. '윤집궐중'은 중국 베이징 자금성의 중화전(中和殿)에 걸려 있는 편액의 글귀이기도 하다. 청나라 건륭제 글씨다.

화담 서경덕은 거문고에 새긴 글 '금명(琴銘)'에서 '그것을 뜯어 조화시킴으로써(鼓之和)/ 요순시대로 돌아가며(回唐虞兮)/ 사악함을 씻어냄으로써(滌之邪)/ 자연과 융화되는 사람이 된다(天與徒兮)'라고 말했다.

◆공자의 의란조

공자가 행단(杏檀)에서 제자들을 가르쳤다는 행단고슬(杏檀鼓瑟) 고사에 거문고(琴)를 타는 공자가 등장한다. 이 고사는 '장자'에 나오는 '공자가 치유(緇惟)의 숲속에 나아가 행단에 앉아 쉴 때 제자들은 독서하고 공자는 거문고를 타며 노래했다'라고 한 데서 유래한다. 이에 근거해 북송 때 공자가 제자를 가르치던 강당 옛터에 단을 쌓고 은행나무를 심어 행단을 복원했고, 이후 행단고슬 고사는 확고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이 고사는 그림으로 그려지기도 했다.

거문고와 관련된 공자의 일화로, 행단고슬 고사와 함께 의란조 이야기가 유명하다. 공자는 생애 초반 30여 년 동안 천하를 주유하면서 72명의 제후들을 만나 왕도정치의 이념을 설파했다. 하지만 패도정치의 무력이 지배하던 전국시대에 어느 제후도 덕으로 세상을 다스리자는 공자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참담한 심정으로 고향인 노나라로 향하던 공자는 어느 인적 없는 빈 골짜기에서 홀로 피어 있는 난초를 만나게 된다. 아무도 보아주는 이 없는 계곡에 홀로 핀 유란(幽蘭)의 그윽한 향기를 맡으며 공자는 깊이 탄식했다. 잡초 속에 묻혀 홀로 무성하게 핀 난초의 모습에서 자신의 처지를 느꼈기 때문이다. 공자는 외롭게 피어있는 난초에 자신의 심정을 담은 '의란조'라는 시를 짓고 거문고 곡으로 만들어 노래하며 연주했다.

의란조는 다음과 같다. '골바람 살랑대며 부니 날 흐리다가 비까지 내리고(習習谷風光陰以雨)/ 가던 길 다시 가려 하니 저 먼 들까지 배웅하네(之子于歸遠送于野)/ 어찌하여 푸른 하늘은 날 버리는가(何彼蒼天不得其所)/ 정처 없이 천하를 떠도니 오갈 데 없는 신세로다(逍遙九州無有定處)/ 세상 사람들 어둡고 마음이 막혀 어진 이를 몰라보고(世人闇蔽不知賢者)/ 세월은 빠르게 흘러가고 이 몸만 늙어가는구나(年紀逝邁一身將老)'

공자는 난초에 대해 다음과 같이 읊기도 했다. '깊은 산속 지초 난초는(芝蘭生於深林)/ 보는 사람 없다하여 향을 내지 않음이 없고(不以無人而不芳)/ 도를 닦고 덕을 쌓는 군자는(君子修道立德)/ 가난하다고 지조를 버리지 않는다(不爲困窮而敗節)'

공자는 29세 때 사양(師襄)에게 가서 거문고를 배웠는데, 거문고를 배우면서 열흘이 넘도록 한 곡만 연습했다. 사양이 그만하면 됐다고 해도 운율을 익힐 때까지 계속 연습했다. 운율을 알고 나서는 음악에 담긴 의미를 알 때까지 연습하고, 또 음악을 만든 사람됨을 알 때까지 연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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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봉규 (문화전문 칼럼니스트)

거문고를 수시로 연주한 공자는 제자들에게도 거문고를 가르치고, 그 소리를 통해 그 마음상태를 평하며 깨달음을 얻도록 했다. 34세 때는 주나라 대부(大夫)로 왕실의 역법(曆法)을 주관하던 장홍을 찾아가 음악을 배웠는데, 장홍은 음악을 대하는 자세 등을 보고 공자에 대해 "예를 행하고 성인의 도를 전하며 실천하는 사람"이라며 칭찬했다.

공자가 단순히 음악 그 자체만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었다. 예(禮)와 악(樂)을 좋아한다고 한 공자는 음악을 통해 예를 실천하고자 했던 것이다.

김봉규<문화전문 칼럼니스트> bg4290@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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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현희 기자

문화부 조현희 기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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