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구.경북 근.현대인물사 . 5 > 박중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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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97-03-11

우리가 흔히 3.1운동을 거족적 민족운동이라고 말하지만, 3.1운동 당시
이를 반대하던 사람들도 있었다.

그들은 3.1운동을 '사리를 헤아리지 않고 국정을 알지 못하는 자의 경거
망동(輕擧妄動)'이라 하고, '조선 독립은 허망한 것' 이라고 하였다. 소위
친일파(親日派)들로 대구지역에도 거물급이 몇몇 있었다. 그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사람이 바로 박중양이었다.

박중양이 친일파로 출세할 수 있었던 것은 탁월한 일본어 실력 때문이었
다. 경기도 양주출신이었던 그는 청일전쟁을 전후하여 서울에 있던 일본인
과 긴밀하게 교제하면서 일본에 7년간 유학하였다.

일본에서 청산영화(靑山英和)학원 중학부를 다녔고, 학교 졸업 후 도쿄
경시청에서 경찰제도연구생으로 경찰제도와 감옥제도를 연구.실습하였으
며, 이어 1903년에는 동경부기학교에서 은행업무를 익혔다.

박중양은 1904년 러.일전쟁때 귀국하여 고등통역관대우로 인천 진남포
용암포 안동현 등지에 종군하였다. 종군생활을 마치고 농상공부 주사가 되
었으나, 이후 그는 대구에서 거처하였다.

당시 대구에서는 경부선 개통 이후 이곳에 몰려든 일본인과 경북관찰사
사이에는 빈번한 대립과 충돌이 있었다.

이때 박중양은 이 충돌을 조정하는 역할을 하였다. 때로는 일본인의 편
에 서서, 혹은 중도적 입장에서 활동하면서 일본인들에게 신뢰를 얻게 되
었다. 이런 소식이 서울에 전해지면서 그는 군부기사가 되었고, 파견대신
의친왕의 수행원(통역)으로 참가하게 되었다.

이때 그는 이토에게 잘보여 귀국 후 대구군수 겸 경북관찰사서리가 되었
다. 이토는 박중양을 철두철미하게 신용하고 애지중지하였고 양자로 삼았
다.

대구 군수로서의 박중양은 일본인들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당시 일
본인들이 가장 원했던 것이 대구 성벽을 없애는 것이었다. 당시의 대구는
성을 경계로 하여 상권이 나뉘어져 있었고, 성내의 상권은 한인 상인들이
장악하고 있었다.

한인들의 상권까지 장악하고자 하였던 일본 상인들은 당연히 성벽을 허
물고 상권의 구역을 없애려고 하였다. 박중양은 일본인의 요구에 의해 일
진회원을 동원하여 성벽을 허물고 그 자리에 도로를 만들었다.

이때 만들어진 도로가 지금의 동성로 남성로 북성로 서성로이다. 이후
일본 상인이 대구의 상권을 거의 장악할 수 있었고, 일본인들은 그를 극
구 칭찬하였다. 박중양의 이런 반민족적인 행위는 당시 정부의 허가를 받
지 않고 단독으로 처리한 것이었다.

그래서 정부에서는 박중양을 징계하려 하였으나, 이토의 구원으로 이루
어지지 않았다. 박중양은 오히려 평남관찰사로 영전하였다가 다시 1908년
에 경북관찰사로 대구에 왔다.

이후 그는 친일행각 뿐 아니라 탐학도 일삼았다. 이때의 탐학과 친일활
동으로 당시의 대구에는 이를 비난하는 세간의 '동요'도 있었다.

즉 "중양가절(重陽賈節) 말말아라. 통곡일세 통곡일세. 누백년 (屢百年)
을 존숭(尊崇) 하던 대구객사(大邱客舍) 어데갔노. 애구(哀邱) 대구(大邱)
흥... 중양가절(重陽佳節) 말말아라. 전무후무(前無後無) 비기수단(肥己手
段:자기 몸만 살찌우는 수단) 대구성곽 구공해(舊公해)를 일시간에 팔아먹
네. 애구(哀邱) 대구(大邱) 흥…." (대한매일신보 1909년 1월16일 '중양타
령(重陽打令)'대구동요)라는 것이었다.

'합방' 이 되자 그의 친일행각은 날로 빛을 발하였다. 물론 그는 당시에
'요로에 있으면서 민족을 위해 노력하는것이 취할 길' 이라는 근사한 이유
를 내세우면서 1910년 충남도지사를 거쳐, 1915년 중추원참의가 되었다.

박중양은 1919년 3.1운동이 일어났을 때 대구에 있었다. 그는 이를 막기
위해 자제단(自制團)이라는 것을 만들었다. 4월6일 대구에서 이를 조직하
고 단장이 되었다.

자제단의 활동을 통하여 '경거망동으로 국민의 품위를 손상케 하는 일이
없도록 상호 자제' 한다는 것을 내걸고 '불량한 무리를 배제' 하고자 하
였다. 이 자제단 조직은 그후 경북의 여러 군에 파급되었다.

이런 친일의 공으로 그는 다시 1921년 황해도지사, 1923년 충북지사가
되었으며, 1927년 퇴관하여 다시 중추원 칙임참의가 되었다. 일본의 대륙
침략으로 중일전쟁이 일어나자 1938년 조선총독부에서는 장기전에 대처할
대내외 중요정책을 입안심의를 위해 만든 시국대책조사위원회라는 전시 최
고심의기관을 설치하였는데, 박중양은 김연수 박영철 박흥식 등의 대표적
인 친일파 10명과 더불어 그 위원이 되었다.

그리고는 1941년 중추원 고문, 1943년에는 중추원 부의장이 되었다. 이
런 지위로 당시 각종의 친일조직에 참여하여 임전보국단의 고문, 국민조선
총력연맹의 참여 등으로 활약하였으며, 학병을 권유하는 연설대에 참가하
여 경남지방을 담당하기도 하였다.

심지어 일본이 싱가포르를 점령하자 일본군을 위문하기 위해 싱가포르까
지 갔었다. 이런 친일의 결과, 그는 1945년 귀족원 칙임의원이 되었다. 최
상급의 친일파 7명에 끼이게 된 것이다.

1949년 1월 그는 반민특위에 의해 반민족행위 피의자로 검거되어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되었다. 그런데 수감된지 8~9일만에 폐렴이 발생하여 서울대
학병원에서 몇개월 치료를 받았다. 물론 다른 반민족행위자와 마찬가지로
흐지부지 처리되었을 것이다.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도 그는 친일에 대한 하등의 반성을 하지 않았다.
반민법에 의해 잡혔을 때도 자신을 '시대 변혁의 희생' 이라고 생각하였
고, 또 '일정시대에 조선인의 고혈을 빨았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정치의 연
혁을 모르고 일본인을 적대시하는 편견이다'고 하여, 한말보다 일제시대가
훨씬 좋았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었다.

이런결과 그는 이완용은 매국노가 아니라고 생각하였다. '이완용은 국난
을 당하여 나라를 부지하고 백성을 구한 선처를 한 사람' 으로 존경하였던
것이다.

해방 이후 친일파를 청산하지 못했던 것은 결국 남북 분단이라는 우리의
현실 속에서 기인하였다. 따라서 우리 사회의 문제들을 해결하고 또한 민
족의 통일을 위해서 우리는 다시한번 친일파 문제를 거론하고 매듭지어야
할 것이다.

답사기

박중양은 말년에 대구의 침산동에 거주하였다. 그리고 항상 지팡이를 짚
고 다녔다고 하여 당시의 사람들은 그를 '박작대기' 라고 불렀다. 그가
소유했던 오봉산 일대의 넓은 땅은 지금의 침산공원이 되었다.

그런데 이 공원의 중앙인 제3봉에 박중양을 기념하는 일소대(一笑臺)가
있었다. 인공폭포가 있는 시내쪽의 공원입구에서 가파르고 많은 계단을 숨
가쁘게 올라가면 산 정상에 버티고 서 있었다.

일소대는 박중양이 일제 말기 친지 22명(대개가 친일파)의 도움으로 세
운 기념비이다. 일소대라는 이름은 그가 오봉산 위에서 대구시가지의 반짝
이는 불빛을 보며 '인생은 한갓 꿈에 불과하다' 고 하면서 크게 웃었다는
것에서 따온 것이었다.

지금은 없어지고 흔적만이 남아있다. 민족문제연구소 대구지부를 비롯한
시민단체들의 맹렬한 활동때문이었다. 그들은 작년 광복절을 기해 일소대
가 친일파 박중양의 기념비라는 것을 알리는 큰 안내문을 세웠다.

구청과 시청에 친일파의 흔적을 없애달라는 몇번의 진정이 이루어지지않
자 자신들의 비용으로 이것을 세웠었다. 그러자 박중양의 후손들이 지난해
10월 자진해서 일소대를 철거했다. 그렇지만 박중양의 선조 무덤 2기는 아
직도 버젓이 남아있다.

일소대와 같은 친일파의 흔적을 없앤다고 그 친일행각의 역사가 없어질
것으로 믿어서는 큰 오산이다. 차라리 일소대의 자리에 그 내력을 써서 많
은 시민들이 보게 하는 것도 살아있는 역사 교육이 될 것으로 생각된다.

문화유산의 해를 맞아 친일파에 의해서 없어진 대구성문이나 성곽의 흔
적을 알리는 안내문이라도 만들었으면 좋겠다.

연보

* 1874년 경기도 양주 출신
* 1906년 대구군수 겸 경북관찰사 서리
* 1908년 경북 관찰사
* 1910년 충청남도장관
* 1921년 황해도지사
* 1927년 조선총독부 중추원 칙임참의
* 1943년 조선총독부 중추원 부의장(창씨명 朴忠重陽)
* 1945년 귀족원 칙임의원

김도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