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세…아코디언의 살아있는 전설 조경제씨

  • 이춘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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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3-11-15   |  발행일 2013-11-15 제35면   |  수정 2013-11-15
60년대 최무룡이 만경관서 노래 때 반주
최희준도 “이런 좋은 반주자 처음” 감탄
“한때는 아코디언 선율이 백미였는데…”
73세…아코디언의 살아있는 전설 조경제씨
반세기 이상 아코디언 연주에 올인해 온 조경제씨. 일흔을 넘겼지만 아직도 아코디언만 연주하면 스스로 옛가요로 녹아든다. 젊은시절 영화배우 허장강과의 공연 때 찍은 빛바랜 사진이 훌쩍 늙어버린 지금의 그를 액자 속에서 바라보고 있다.


‘미스터 아코디언’.

추억파 가수들은 조경제씨(73)를 귀하게 여긴다. 그는 현재 대한민국 아코디언의 살아 있는 전설로 불려도 충분할 정도로 연주 실력을 갖고 있다. 그의 연주에는 그 시절 악극단 유랑악사의 애조와 비브라토가 묻어 있다.

얼마 전 대구문화예술회관에서 열린 제22회 대구영화제에 특별출연 해 ‘동백아가씨’와 ‘울고넘는 박달재’를 연주했다. 그는 한숨을 내쉬면서 좋았던 악극단시절을 떠올렸다.

고교시절 대구 제일극장에서 한호승(재일교포 아코디언 연주자)의 연주에 감전된다. 예전에 중구 남산동 미애예식장 자리(현 동아쇼핑)에 있던 제일음악학원에 등록을 한다. 원장은 권명식씨.

생애 첫 무대는 1960년대 초 만경관. 그날 영화배우 최무룡이 상영작 ‘외나무 다리’ 홍보 차 대구에 왔다. 주제가를 부를 때 그가 반주를 해줬다.

곧이어 화려한 카바레 시절이 시작된다. 오비카바레, 대화카바레, 대안카바레, 남남카바레 등을 누볐다. 틈이 나면 전성기를 맞은 악극단 악사로 뛰었다.

경북에 근거지를 두고 있는 미도악극단과 자주 호흡을 맞춘다. 그때는 전화도 귀하던 시절, 공연 건이 있으면 단장이 직접 집으로 찾아온다. 중구 봉산동 집으로 와서 계약을 맺는다. 그래서 조경제 악단이 형성된다. 7~8인조이고 악기는 드럼, 베이스, 기타, 색소폰, 트롬본, 트럼펫 등이 축을 이룬다. 그땐 전자 오르간이 없어서 아코디언을 사용했다.

한 곳에 죽치고 앉아 있을 수 없었다. 전국을 누벼야만 먹고 살 수 있었다. 멀게는 강원도 통리와 삼척, 그 밖에 포항, 청송 등 경상도 곳곳을 주름잡는다.

“시골로 가면 공연 장소는 묻지마 극장이죠. 그게 없으면 공회당으로 갑니다.”

출발 장소는 현재 대구시민회관 자리에 있던 KBS대구방송국 소속 KG홀 앞.

청송 가는 데는 거의 하루가 걸린다. 중간에 식당이 없어서 도시락을 준비해 간다. 보통 이틀 공연을 한다. 극장에서 공연할 경우 입장료의 30~40%는 극장이 먹고 나머지는 단장이 알아서 분배한다. 밴드마스터는 개런티가 좀 낫지만 나머지 무명 출연자는 쥐꼬리보다 못한 출연료에 만족해야 됐다.

“요즘은 엘프라는 반주기가 있어 암보할 필요가 없는데 그때는 레퍼토리를 전부 머리 속에 외우고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요즘 연주자보다 필이 더 강하죠. 악단이 갑의 입장이고 출연자는 당연히 을의 위치에 있었어요. 그래서 잘 봐달라는 의미로 가수와 배우들이 담배 등을 안기기도 하죠. 잘난 척하거나 밉살스러우면 일부러 골탕 먹이려고 키를 올리기도 했어요.”

그가 24살 때 포항의 한 무대에서 가수 최희준 옆에서 반주를 해줬다.‘길잃은 천사’였다. 전주를 자유롭고 유장하게 펼쳤다. 그러자 최희준도 그 연주력에 감탄을 한다.

“팔도강산 다니면서 이렇게 좋은 반주자는 처음입니다. 여러분 조경제 선생님에게 박수를 보내주세요.”

그는 아직도 그날을 잊지 못한다.

그 시절 악단에선 아코디언이 ‘절대강자’였다. 그게 없으면 무대가 부드럽지가 않았다. 심금을 울린다고 하지만 그게 배우의 연기력, 가수의 가창력 못지않게 빼어난 아코디언 연주에서 비롯된다고 믿는다. 아코디언 선율이 공연의 백미였다. 모두 아코디언을 찾으니 자연스럽게 연주자 몸값이 비싸질 수밖에 없었다.

출연료도 상당했다. 월급쟁이보다 10배 더 받았다. 한때 교사의 꿈도 갖고 있었는데 워낙 호경기에 있어 벌이가 이게 더 나을 것 같아 이 길로 왔다. 70년대 초까지만 해도 아코디언 연주하는 유랑악사가 대구시 중구 향촌동 등지를 누볐다. 손님이 주는 팁으로 연명했는데 그 벌이도 꽤 괜찮았다.

그는 지역의 모 요정에도 자주 불려나갔다. 전두환·노태우 대통령은 물론 정계 요인들의 여흥 자리였다.

박정희 대통령 서거와 함께 아코디언 전성기도 쓰러진다. 그 이후 반주기와 가라오케, 디스코장, CD 등이 그의 호시절을 앗아갔다. 유랑악사도 다른 직업을 찾아 떠나갔다.

그도 새로운 일을 찾아 포항으로 갔다. 틈틈이 작곡도 했다. 포항 타워나이트·탑맨나이트에서 7년쯤 독주연주자로 일했다. 12년 전 포항 무대를 마지막으로 대구로 와서 대구시민운동장 정문 건너편 대구여관 지하에서 조경제 아코디언 가요작곡실을 운영하다가 5개월 전에 그만뒀다. 평생 잡았던 아코디언만 20대가 넘는다. 제일 비싼 것은 이탈리아제 파올로 소프라니(Paolo Soprani). 갖고 있는 아코디언도 20여개. 현재 경산에 살고 있다. 011-827-9936
이춘호기자leekh@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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